해리 벨라폰테-예술가는 진실을 지키는 문지기다

[워커스] 힙합과 급진주의

힙합 역사상 가장 성공한 래퍼 중 한 사람인 제이지는 2012년 누군가 자신을 비판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말로 공격을 주고받는 일은 래퍼들에게 흔했지만 이번 상대는 좀 특이했다. 그 상대는 미국의 가수이자 배우 해리 벨라폰테였다. 당시 85세였던 이 노가수는 한 인터뷰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유명 예술가들이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제이지와 비욘세 부부를 대표사례로 꼽았다. 그는 백인 록 가수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오히려 소수자들을 잘 대표하는 “진짜 흑인”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제이지는 이에 “내 존재 자체가 자선행위야”라는 말을 남기며 자신의 곡과 인터뷰를 통해 반감을 드러냈다.

이들의 대립은 크게 번지지는 않았고, 몇 년 후 대화로 갈등이 해소됐다. 벨라폰테의 비판은 얼핏 보기에 나이든 세대가 힙합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드러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힙합의 문화적 의미와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인물이었고, 제이지 개인이나 힙합이라는 장르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제이지보다 더 엄격한 태도를 가졌고, 힙합이 탄생하기 오래 전부터 미국에 존재해 왔던 사회참여적 예술가들의 전통을 평생 고수해 온 인물이었다.

  해리 벨라폰테(좌)와 마틴 루터 킹

벨라폰테는 1927년 뉴욕에서 태어나 자메이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미 해군 복무를 마친 후 194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가수와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1956년 그는 칼립소를 비롯한 카리브해 지역의 음악을 담은 앨범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노래와 연기 분야에서 승승장구했다. 동시에 그는 운동가로서의 명성도 쌓기 시작했는데, 자신처럼 스타 배우였던 친구 시드니 프와티에와 함께 1960년대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던 시민권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벨라폰테는 미국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남아공 정부에 의해 여권이 말소되고 시민권을 박탈당한 가수 미리엄 마케바의 활동을 지원하며 함께 음반 작업을 한 것이 대표적 사례였다. 1980년대 들어 그는 기아에 시달리던 아프리카를 위한 기금 마련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이 계획은 ‘We Are the World’라는 노래로 구현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그는 오랫동안 유엔아동기금(UNICEF)의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세계 각지의 인권 문제에 목소리를 내 왔다. 90세가 넘은 그는 최근까지도 예전과 같은 사회적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벨라폰테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을 만한 온화한 예술가는 아니었다. 그의 사상과 행동은 보다 급진적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성향은 그가 평생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던 폴 로브슨에게 크게 영향 받은 것이었다. 가수이자 배우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로브슨은 미국의 인종주의를 비판하고 소련을 지지하는 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그 결과 1950년대 내내 공산당과의 연계를 추궁당하며 출국이 금지된 채 고립됐다. 그리고 벨라폰테는 이 시기 로브슨의 곁에서 오랜 싸움에 동참한 몇 안 되는 사람에 속했다. 그 결과 벨라폰테는 로브슨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예술가로 간주됐고, 연예인 블랙리스트에 올라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그는 한평생 미국의 거의 모든 대외 정책에 반대했고, 반미 성향의 사회주의 국가들을 방문하며 혁명 정부를 지지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미국의 쿠바 제재에 반대하며 수차례 쿠바를 방문해 피델 카스트로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2005년에는 베네수엘라를 방문해 수많은 미국인들이 사회주의를 표방한 우고 차베스 정부의 혁명을 지지한다고 발언했으며, 동시에 이라크 전쟁에 열성이던 조지 부시 대통령을 “세계에서 제일가는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쿠바나 베네수엘라의 정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혁명 정부들이 살아남아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판단해 비판을 삼갔다.

그는 1970년대 뉴욕의 파티에서 탄생한 힙합의 문화적 가치를 빠르게 알아본 사람이었다. 그는 1984년 문화로서의 힙합을 다룬 초기 영화 중 하나인 ‘할렘가의 아이들(Beat Street)’의 프로듀서로 제작에 참여했다. 폭력과 마약 대신 브레이크댄스와 그래피티에 열중하는 뉴욕의 청년들을 그려낸 이 작품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흥행하며 힙합이 가진 긍정적 힘을 알렸다. 틀림없이 이 영화를 보고 자랐을 뉴욕 출신 래퍼 나스는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2015년 그가 제작한 힙합 다큐멘터리 는 가난과 범죄가 판치는 환경에서 브레이크댄스에 빠져드는 세계 각지의 청소년들을 다루었는데, 영화를 제작하며 나스는 분명 자신이 어렸을 때 본 영화를 떠올렸을 것이다.

  2016년 생코파 주최로 열린 공연에 참여한 해리 벨라폰테(우)와 커먼 [출처: https://www.billboard.com/articles/news/politics/7526706/harry- belafonte-donald-trump-many-rivers-to-cross-festival]

2013년 벨라폰테는 한 발 더 나아가 예술가의 사회적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단체를 설립했다. ‘생코파(SANKOFA)’라는 이름의 이 단체는 “예술가는 진실을 지키는 문지기다”라는 폴 로브슨의 말을 인용하면서 많은 예술가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힙합의 창시자로 꼽히는 디제이 쿨허크를 비롯해 큐팁, 모니 러브, 데드 프레즈, 매클모어, 타이 달라 사인 등 세대를 뛰어넘는 많은 힙합 음악인들도 운동에 동참했다. 자신들의 음악과 사회적 활동을 나누어 생각하는 법이 없는 래퍼들인 척디나 커먼 역시 벨라폰테의 운동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음악과 사회적 활동을 통해 자신들을 닮은 선배 예술가에게 수차례 존경심을 표시한 바 있었다.

1999년 쿠바를 방문한 벨라폰테는 우연히 언더그라운드 흑인 래퍼들을 만나 그들의 공연을 관람했다. 다음날 그는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흑인 래퍼들이 인종주의 없는 사회로 자부하는 쿠바에서 활동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힙합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던 카스트로에게 그는 힙합이 인종주의와 불의에 저항해 왔으며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예술이라고 설명했다. 이듬해 다시 쿠바를 방문한 벨라폰테는 그에게 꽃을 건네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래퍼들을 만났다. 그가 카스트로와 힙합에 관한 대화를 나눈 뒤 “쿠바 문화의 참된 표현양식”으로 랩이 인정됐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카스트로가 힙합 음악이 혁명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혁명의 전위”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아 지원을 지시했고, 래퍼들이 무대와 녹음실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벨라폰테가 쿠바의 힙합 음악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면 물론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런데 힙합이 쿠바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려면 쿠바의 랩은 어떤 메시지를 담아야 하는가? 물론 그 답은 쿠바 래퍼들이 스스로 정해야겠지만, 적어도 카스트로가 기대했던 내용은 아닐 것이다. [워커스 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