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대중과 함께

[서평] 아사드 하이더, 권순욱 옮김, 《오인된 정체성》(두번째테제, 2021).

1964년 2월 25일, 당시 미국의 대표적 인권운동가 맬컴 엑스, 프로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 미식 축구 선수 짐 브라운, 가수 샘 쿡이 모였다. 이들이 모인 것은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의 우승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지만, 실상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인권에 대해 격론을 벌이는 자리였다. 맬컴 엑스는 자신이 꿈꿔왔던 평등한 세상에 관해 친구들을 설득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활동하던 ‘네이션 오브 이슬람’(Nation of Islam)에 관한 계획을 밝히고 있다. 영화 <원 나이트 인 마이애미>(One Night in Miami, 2020)의 일부 장면인데, 픽션이 가미된 작품이다. 영화는 1960년대 미국의 인권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1년 후 맬컴 엑스는 자신이 몸담았던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조직원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듯이 이틀 전인 1965년 2월 19일 이 말을 남겼다.

"It is a time for martyrs now, and if I am to be one, it will befor the cause of brotherhood. That's the only thing that can save this country"(순교자가 필요한 시기다. 내가 순교자가 된다면, 단체의 대의를 위해서일 것이다. 그것만이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

맬컴 엑스가 살해되고 1년이 지난 1966년, 미국 흑인들은 ‘블랙팬서당’을 만들었다. 핵심 인물은 휴이 뉴턴과 바비 실 등이었다. 이들은 흑인 학생들을 위해 아침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고, 해방학교 공동연구소, 무료 법률지원, 무상의료 등을 운영했으며, 무장순찰단을 조직해서 흑인들이 지역 경찰에게 위협을 당하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젊은 흑인들의 선풍적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미 연방수사국(FBI) 에드거 후버 국장은 이들을 “국가 안보에 가장 커다란 위협”이라고 선포한 뒤 ‘블랙 메시아’로 규정해 무력화시킨다. 미국 정부의 전방위적 압박을 받으며 폭력, 고문, 살인, 암살 혐의로 조직원들이 잇따라 검거된 끝에 1982년 해체됐다. 실화를 바탕으로 블랙팬서당의 몰락을 그린 영화가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Judas and the Black Messiah, 2021)이다. 2021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과 주제가 상을 받았다.

이들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공통된 주제는 인종 이데올로기다. 그리고 두 영화 모두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제작하고 상영했다. 트럼프 정치의 특징은 백인 남성 중심의 정치를 강화하려는 ‘정체성의 정치’(identity politics)다. 이는 전통적인 미국 공화당 우파의 노선과 일맥상통한다. 정체성 정치는 새로운 담론이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소수 민족·인종, 여성,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 독자적인 정체성을 주장했던 정치적 움직임을 가리킨다. 그런데 트럼프가 등장해서 인종 이데올로기를 포퓰리즘 경향으로 거칠게 확장시킨 것이다. 이로 인해 트럼프 집권 기간 미국 사회는 야만과 광란의 시간이었다. 따라서 트럼프 정치에 대항하는 문화적 활동은 앞서 소개한 영화뿐만 아니라 학술활동 등 다양한 활동으로 전개됐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출간물 중 하나가 아사드 하이더의 《오인된 정체성》(두번째테제, 2021)이다.

아사드는 파키스탄계 미국인이다. 2001년 9.11사태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그는 백인 친구들과 교사들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적대적 관계를 형성했다. 당시 그의 정체성은 국가안보 문제가 됐다(21쪽).

  아사드 하이더, 권순욱 옮김, 《오인된 정체성》(두번째테제, 2021).

그런 그의 운명을 바꾼 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블랙팬서당 창설자인 휴이 뉴턴이 감옥에서 집필한 《혁명적 자살》이다. 휴이 뉴턴이 플라톤의 《정치》를 탐독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정치적 실천을 바깥 세계로 향했듯이 저자 역시 휴이 뉴턴의 저서를 읽으면서 인생을 바꿨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반전운동에 앞장섰으며, 촘스키의 열렬한 독자였다. 인종차별과 불평등한 자본주의 사회는 그를 좌파로 이끌었으며, 좌파 매체인 《뷰포인트》(Viewpoint)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그에게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종식이 해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의 집필은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에서의 극우주의 부상과 그에 대응하는 사회운동의 분열이 핵심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 트럼프의 정체성 정치에 대항하는 ‘정체성 정치’가 약자들끼리의 인정투쟁과 보상심리로 인해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회운동이 개별화되어 연대와 공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흑인운동의 역사와 정체성 정치의 기원을 논하며, 그 현상을 여러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다. 특히 백인종의 발명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문학 논쟁을 통해 살펴본다.

아사드 하이더는 인종 이데올로기가 생물학적 요인과 사회학적 요인을 결합시킨 것으로서, 이는 이미지에 불과하다고 문제 제기를 시작한다. 인종은 실재하지만 추상적인 허구다. 일종의 ‘허구적 실재’인 것이다.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계 미국인 지배계급은 강제노역을 합리화하기 위해 아프리카인들이 열등하다는 이데올로기를 제시해야 했으며 … 유럽의 이민자들이 증가하면서 미국에서의 인종 이데올로기는 더욱 발전하였다”(98쪽).

이렇게 인종 이데올로기는 유럽의 이민자들이 미국을 정복하고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주조한 것이다. 이민자들이 건설한 국가인 미국은 인종차별에 있어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독보적인 나라다. 이후 인종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면서 인종차별이 더욱 심화됐고, 이에 맞선 투쟁도 강화됐다. 따라서 마틴 루터 킹, 맬컴 엑스, 휴이 뉴턴과 블랙팬서당 등의 등장은 필연이며 통과의례인 것이다.

그리고 1974년 호전적인 흑인 레즈비언 단체인 컴바히강공동체가 만들어졌으며, 이들에 의해 ‘정체성 정치’가 정치담론으로 도입되었다(27쪽). 이때가 1977년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이 만든 이 단체는 성차별주의와 인종주의를 넘어서야만 사회주의 이행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 운동은 인종, 젠더, 계급을 융합하는 운동을 지향했다. 하지만 컴바히강공동체는 기존의 계급환원론적인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 방식을 전개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저자는 “사회주의는 백인우월주의에 대항하는 흑인 투쟁에 불가결한 구성 요소이며, 또한 반자본주의 투쟁은 흑인 자결권을 위한 투쟁과 결합해야”(38쪽)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적들에 의해서 정체성 정치가 활용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정체성 정치는 개인에게 소속감과 존재감을 심어주어 조직기반을 다지고 운동 역량를 제고해서 투쟁을 고양시키는 동력이 된다. 집단의 성격과 목적이 명료하고 선명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반면에 확장성과 대중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개인과 집단 모두가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정체성 정치는 특정 범주화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폐쇄적인 성격을 갖기 쉽다. 그로 인해 그 집단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인하여 연대, 협력, 노동착취, 소외 등에 매우 취약하다. 대표적인 예로 “파파 독(Papa Doc)”으로 불린 아이티의 뒤발리에는 정체성 정치를 이데올로기로 활용해서 부패한 독재정권을 뒷받침했다(36-37쪽).

저자가 강조하고 주장하는 요지는 간단명료하다. 인종주의를 기반으로 삼고 있는 사회구조, 그리고 그것을 새롭게 변혁하고자 하는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대중운동이다. 그가 정의하는 정체성의 정치는 “인종억압에 대항하는 운동의 중립화”다(35쪽). 이는 “사회정의와 연대에 기반한 대중운동을 만드는 방향”(184쪽)을 의미한다. 저자가 20세기 미국에서 여러 차례 일어난 인종주의에 맞선 대중운동에서 교훈을 얻은 것이다.

“인종주의 없는 자본주의는 있을 수 없다”고 한 맬컴 엑스, 혁명적 민족주의와 반동적 민족주의 사이를 구분했던 휴이 뉴턴 역시 억압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한 대중의 정치적 실천을 핵심 과제로 삼았다.

또한 프랑스 혁명과 아이티 혁명 등 역사적 교훈을 바탕으로 ‘반란자적 보편성’(insurgent universality)(170쪽)으로 명명하였다. 그러면서 인종주의에 맞선 투쟁이 이러한 정체성에 기반할 것이 아니라 실제 구체적인 현실에서 시작하여 해방이라는 보편성을 추구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해방적인 정체성 정치는 그 정체성을 기본적으로 프롤레타리아에 기반하면 된다. 정체성의 개념 자체가 배타적이고 폐쇄적이기 때문에 그 근거를 인종이나 민족 등 협소한 범주에 기반하면 그것은 해방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착취를 가져오게 된다. 21세기의 사회주의에 적합한 프롤레타리아 범주로 재구성하면 된다. 그것이 프레카리아트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이름으로 호명될 수도 있다. 사회주의가 계급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종적 불평등을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종식할 수 있는 정치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노동해방, 여성해방, 민중해방이 되어야 의미있는 것이다.

이 책은 현재의 미국 정치, 흑인운동의 과거와 현재, 미국의 문학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다(182쪽). 한국사회에서도 언제부터인가 정체성 정치가 유행처럼 확산되어 많은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최근 차별금지법를 둘러싼 논쟁이나 세대, 젠더 등의 문제를 보면서 무엇을 어떻게 할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 <한겨레>에서 2021년 ‘올해의 책’을 선정했는데, 번역서 10권 중 두번째테제 출판사가 발간한 《오인된 정체성》이 뽑혔다. 정말 축하한다. 두번째테제는 주로 인문 사회과학 책을 펴내는 출판사로서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2번에서 빌려왔다.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 실천으로부터의 고립된 사유의 현실성이나 비현실성에 관한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주의적 문제이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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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 실천으로부터의 고립된 사유의 현실성이나 비현실성에 관한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주의적 문제이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2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