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주대낮에 출근길 기자를 테러했던 군인들

[1단 기사로 본 세상] 청산하지 못한 군사문화 백주대낮에 출근길 기자를 테러했던 군인들

[편집자주] 주요 언론사가 단신 처리한 작은 뉴스를 곱씹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려고 한다. 2009년 같은 문패로 연재하다 중단한 것을 이어 받는다. 꼭 ‘1단’이 아니어도 ‘단신’ 처리한 기사를 대상으로 한다.

육군정보사령부 소속 요원들이 1988년 8월 6일 중앙일보 자매지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사회부장에게 대검을 휘둘렀다. 백주 대낮에 벌어진 테러였다. 하지만 사건의 전말은 지금도 완벽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테러가 일어난 시기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이 직선제를 수용하고 보통사람을 내세운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였다.

당시 테러의 피해자 오홍근 기자가 지난 9일 향년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오홍근 기자는 테러로부터 31년이 지난 2018년 6월 7일, 프레시안에 쓴 칼럼에서 당시 끔찍했던 상황을 생생히 묘사했다. 오 기자가 월간중앙 1988년 8월호에 쓴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라는 제목의 칼럼에 불만을 품은 정보사령부 현역 군인들은 같은 해 8월 6일 출근길의 오 씨에게 다가가 테러를 자행했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서 자행된 테러는 우발적인 것도 아니었다. 장성 둘을 포함한 현역군인 10여 명이 시나리오를 짜고 사전 모의한 테러였다. 오 기자는 군인이 휘두른 칼에 허벅지가 34cm나 찢어졌다. 오 기자를 테러한 정보사는 사촌격인 기무사와 함께 군사정권의 잔재다. 기무사는 2016년 광화문 촛불 뒤에 숨어 계엄령 선포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들은 2014년 세월호 참사 초기에도 인양 반대 여론을 꾸며내고 희생자를 수장시키자는 야만성을 드러냈다. 흑역사는 이렇게 되풀이되고 있었다.

  동아일보 3월 11일 25면.

그날 아침 체육복을 입은 두 청년이 출근길의 오홍근을 공격했다. 칼에 찔린 오홍근은 때마침 출근하던 아파트 경비원 덕에 목숨은 건졌다. 경비원은 차량 번호는 잘 모르겠지만 현대 포니 차량을 지목했다. 경찰이 차량을 조회한 결과 포니 차량이 육군 정보사령부 소속이라는 걸 밝혀냈다. 정보사는 오리발을 내밀었다.

경찰 수사가 답보에 빠진 가운데 8월 23일 익명의 제보자가 중앙일보에 “정보사 소속 부대원 4명의 사건 당일 행적이 불분명하다”며 이들의 신원을 제보했다. 경찰은 이들 4명이 오홍근의 칼럼에 불만을 품고 혼내주겠다는 생각으로 저지른 개인적 테러라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체포된 4명 외에도 현장에 4명이 더 있었고, 장성도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평화민주당이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여론까지 악화되자 결국 국방부는 정보사 예하부대장 이규홍 준장(학군 1기, 성균관대)이 자신의 부하인 박철수 소령에게 지시했고, 박 소령은 자신의 산하 요원 4명에게 테러 진행을 맡겼다고 밝혔다. 당시 육군정보사령부 사령관 이진백 소장은 이 사건을 보고받고도 묵인해 예편 조치됐다. 이진백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하나회 출신 이진삼 전 자유선진당 의원의 동생이다. 이진삼 의원도 육군정보사령관 재직 때 국내 불법 정치공작을 묵인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군인이 민간인을 죽이려 했는데도 군사법원은 이 준장과 박 소령에게 집행유예, 직접 테러한 팀장급 대위에게 선고유예라는 터무니없는 판결을 내렸다. 당시 재판부는 “죄질로 봐서는 엄중 처벌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범행 동기가 개인의 사리사욕이나 이기심에서가 아니라 군을 아끼는 충정에서 비롯됐고 피해자의 피해 정도가 가볍기 때문에 이를 참작해 집행유예와 선고유예 판결을 내린다”라고 판시했다.

고등군사법원은 준장과 소령에게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판결 뒤 상당수가 다시 정보사로 복귀했다.

  한겨레 3월 10일자 23면.

대체 오 기자가 1988년에 쓴 월간중앙 8월호 칼럼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가 얼마나 대단했기에 군인들이 백주대낮에 테러까지 감행했을까. 칼럼은 1988년 노태우 정부가 여소야대 국면에서 정기승 대법원장을 임명했는데 국회에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부결(1988년 7월2일)돼 경색된 정국을 진단하면서 시작한다.

오 기자는 “문제의 핵심은 6공화국의 집권층이 국민과 사법부와 입법부를 보는 시각이 잘못돼 있다는데 있다. 그 같은 시각이 바로 군사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라고 썼다. 군인들이 발끈할 만하다.

그러나 오 기자는 집권층의 군사문화에 저항하는 학생운동도 “폭력은 안 된다”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대학 총장실을 부순 서울대생들 행동엔 “개탄스러운 노릇”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칼럼의 내용은 “학생 폭력은 나쁘다. 그러나 학교와 교수들에게도 문제가 있었다”라는 식의 양비론에 그쳤다. 오 기자는 학생들의 과격한 행동도 ‘군사문화’에서 출발한다고 짚었다.

다시 읽어보면 주류 언론이 상식적 수준에서 쓸 만한 칼럼이었는데도, 오 기자의 칼럼을 본 군인들은 “사회의 모든 악행과 부조리가 군사문화에서 기인한다는 취지의 내용이 군을 일방으로 매도하고 민·군을 이간시킨다”라며 그에게 도심 한복판에서 테러를 자행했다.

2018년 오 기자와 동료·후배들이 ‘88 언론테러 기억모임’을 만들어 ‘펜의 자리, 칼의 자리’란 제목으로 ‘테러 30년’을 기념하는 책을 냈다. 당시 중앙경제신문 사회부 기자로 오 기자 밑에서 테러사건을 직접 취재하고 보도했던 후배기자 김현종씨가 모임을 이끌었다.

그 책에는 노태우 군사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다. 당시 중앙일보는 삼성그룹의 공식 계열사였다. 오 기자가 일하던 중앙경제신문도 마찬가지였다. 오 기자는 “한 달쯤 병원에 있다가 퇴원하니까 회사 분위기가 이상하더라고요. 삼성 비서실에서 오홍근 때문에 삼성 망하게 생겼다는 이야기가 들려요. 그때가 한창 방산 수주할 때에요”라고 밝혔다. 한국형 전투기 사업이랍시고 F-16을 도입하던 시기였다.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 수도권 장군들을 5~6명씩 그룹핑해서 매일 저녁 냉면 그릇에다 맥주 소주 붓고 술대접하면서 돕니다. ‘저희가 가해잡니다. 이해해 주세요’ 이랬다는 거죠.”, “그분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만, 신문사 사장으로 얼마나 속이 불편했겠어요. 수행 직원이 만취한 이 양반 어깨를 끼고 차를 태워요. 그러면 타면서 ‘야,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하면서 운다는 거지. 그 얘길 듣고 어떻게나 가슴이 아프던지.” 오 기자의 칼럼 이면엔 군사정부 하에서 주류 언론의 처세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은 채 군사문화는 지금도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이 테러는 의도와 달리 시민들에게 ‘5공 청산’의 필요성을 깊이 심어줬다.

  한국일보 3월 10일자 24면.

한편 피해자인 오홍근 기자는 사건 이후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에 중앙일보를 떠나 초대 국정홍보처장, 대통령 공보수석비서관,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을 지낸 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나섰지만 낙선했다. 이후 18대 대선 안철수 진심캠프 국정자문단에 참여하고,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안철수계 몫 최고위원을 지내다가 이후 안철수 의원을 따라 탈당하고 국민의당 발기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등 안철수계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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