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혁명의 슬픈 볼레로, 현계옥

[혁명을 꿈꾼 여성들]

  <동아일보> 1925년 11월 7일 자 현계옥의 사진과 기사 캡처 [출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현계옥(1896~?)은 경남 밀양에서 1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악공이었으며, 어머니는 관기로 추정된다. 이들 남매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장녀인 계옥에게 어려서부터 글과 노래 그리고 춤을 가르쳤다. 먹고 살기 위해서 관기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1897년부터 관기 제도가 혁파되면서 관기가 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들 모두 경북 달성으로 이사했다. 현계옥의 아버지로서는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으려는 시도였다. 그곳에서 현계옥의 재주는 금방 소문났고, 기생들의 조합인 대구기생조합에 들어가게 됐다. 당시 17세였다. 대구기생조합은 관기 제도가 폐지되면서 기생들이 생계 수단으로 만든 사적 활동 단체였다. 일종의 사적 활동이지만 이전의 신분을 재생산했다. 또 다른 차별과 소외의 시대였다.

최고 기생의 기구한 운명이 시작되다

소리, 산조, 춤, 가야금 등 풍류 가무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한문에 조예가 깊은 현계옥은 대구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당연히 풍류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명기였다. 요즘 말로 ‘인싸(무리에 잘 섞여 노는 사람)’였던 것이다. 그런 그의 운명이 전환점을 맞이했다. 노동야학 교사였던 현정건(1893~1932)을 만나면서다. 현정건은 ‘운수 좋은 날’, ‘빈처’, ‘술 권하는 사회’로 유명한 작가 현진건의 사촌 형으로, 일본과 중국 등에서 유학한 인텔리였다.

교사와 야학생의 관계로 시작된 이들은 금방 사랑에 빠졌다. 현정건 집안의 반대에 부딪힌 건 예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현정건의 결혼이 급속히 진행됐다. 현정건은 1910년 경남 양산의 만석꾼 토호 집안의 윤덕경(1895~1933)과 혼인했다. 윤덕경은 경주부호 최준과 함께 손꼽히는 민족자본가 집안의 딸이었다. 윤덕경의 큰오빠 윤현태는 백산상회 창립자였고, 작은오빠 윤현진(임시정부 재정 차장)은 현정건과 절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결혼 3일 만에 현정건은 윤현진과 함께 상해로 떠났다. 집안의 강제 결혼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 때문에 부부관계는 평생 서먹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세 사람의 기구한 운명이 시작된 것이다.

1913년 현정건은 국내에 들어와 현계옥을 만나 사랑을 새롭게 이어갔다. 현계옥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영산못에서 만남을 가졌다. 현계옥이 ‘오빠’라고 부르면 현정건이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다는데, 이것은 교사와 학생 사이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란다.

현정건이 상해로 돌아간 뒤에도 서로 편지를 열렬히 주고받으며 사랑을 꽃피웠다. 현계옥에게는 현정건 외에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했으나 현정건은 조금 더 기다리라는 답만 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14년, 현계옥은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도 현계옥은 ‘인싸’였다. 그의 노랫소리는 웅장하면서도 거침이 없었고, 때로는 가슴을 후벼 파는 애절함과 뭉클함도 있었다. 가야금 연주는 어찌 그리 절묘한지, 다물어지지 않는 입에 손을 갖다 댈 수밖에 없었다. 승무는 왜 이렇게 경건한지, 세상의 모든 소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적막한 산사의 한 마리 나빌레라. 여기에 한문을 알고 글도 잘 쓰니 그 누가 대적할 수 있겠는가.

그는 스물두 살인 1917년에 한강 남쪽 기생들을 모아 기생조합인 한남권번을 만들었다. 이때 그와 같이 한남권번을 만들었던 이가 바로 사회주의자로 유명한 정칠성이었다.1) 현계옥과 정칠성은 경성 제일의 기생으로 쌍벽을 이뤘다.

사상기생으로의 전환

이때부터 현계옥은 사상기생으로 바뀌어 갔다. 이에 따라 경찰의 취조와 고문 끝에 7일간의 구류에 처하는 등 감시의 대상이 됐다. 또, 동료들과 함께 승마를 배웠는데 종로경찰서에서는 이마저도 금지했다. 그가 승마를 배운 것은 앞으로의 활동을 위한 준비였다. 혁명가로서의 꿈은 아닐지라도 정칠성과의 사상적 교류가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매일신보> 1918년 3월 5일 자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디지털컬렉션]

1919년 2월 현정건이 독립자금을 모으려고 국내로 잠입했다. 오랜만에 현정건과 해후한 현계옥은 그에게 연인의 관계로 머물지 말고 동지의 관계로 발전시켜나가자고 제안했다. 민족해방운동의 당당한 주체로서 자신의 역할을 시작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였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중국으로 떠나기로 했다. 이들은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경성을 빠져나가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 상해로 옮겨갔다.

상해에서 현계옥은 현인권으로 개명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개명이나 차명은 일반적인데, 이름을 ‘인권’으로 하는 것은 신기하기도 하지만 무모하기도 하다. 처음에 그는 기생 출신이라는 편견과 왜곡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회 출연 등 공개적인 활동을 하면서 자금을 모으는 일에 앞장섰다. 그의 진정성이 드러났고 결국 운동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이것은 그에게 시작에 불과했다.

유일한 여성 의열단원

그가 진정 원했던 것은 의열단에 들어가 활약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여성인 그를 단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의열단에 여성 단원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치지 않고 꾸준히 김원봉을 만나 설득했고, 결국 의열단원이 됐다. 의열단 유일의 여성 단원이 탄생한 것이다.

의열단에 들어간 현계옥은 폭탄 제조 기술과 육혈포(탄알을 재는 구멍이 여섯 개 있는 당시 권총) 사격법 등을 배웠다. 이와 함께 외국어까지 학습하며 비밀공작원으로 활동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다. 외국어 능력이 뛰어났던 현계옥은 만주와 상하이를 오가며 폭탄을 운반하는 일을 자주 담당했다. 헝가리인 폭탄 전문가 마자르를 도와 폭탄 제조와 안전 운반 작업 수행의 일익을 담당한 것이다. 마자르와는 부부로 연출해 일제의 검문을 피한 적도 있었다.

중국 천진에 있는 폭탄을 상하이로 운반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일제의 검문이 있을 때마다 알지 못하는 서양인 옆으로 가서 말을 걸어 부부가 여행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을 정도로 외국어 실력과 기지가 뛰어났다. 이러한 일화를 모티브로 영화 <밀정>에서 연계순(배우 한지민)이 서양인과 부부로 위장하는 장면이 등장한 것이다.

또한 현계옥은 변장술에도 굉장히 능한 인물이었다. 폭탄 운반 과정에서 여성이라고 항상 의심을 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일본 경찰을 따돌릴 방안을 고민하던 현계옥은 한 가지 묘안을 떠올린다. 바로 남장을 해 자신을 숨기는 것이었다. 남성으로 위장해 상황을 탈 없이 넘기고 임무를 완수해낸 그녀의 업적이 당시 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

그런데 1924년 4월, 의열단의 활동 방식을 놓고 갈등이 생겼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주도로 창립된 연합조직 청년동맹회가 의열단을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비판한 것이다. 그러자 의열단도 청년동맹회를 맹렬히 비난했는데, 특히 현정건이 일본공산당에서 돈을 받아 유용하고 있다고 퍼뜨렸다. 이러한 갈등으로 현계옥은 난처한 상황에 놓였고, 결국 의열단을 떠나게 됐다.

1925년 상해에서 위신이 크게 손상된 의열단은 광저우로 본거지를 옮기는데, 현계옥은 현정건과 함께 공산당 조직에 남았다. 그리고 청년동맹회를 주축으로 삼아 새로 활동한 일이 국한문 잡지 <女子解放(여자해방)>의 발간이다. 이 잡지는 오롯이 현계옥과 현정건 두 연인의 실천적 작품이었다. 이 잡지에서 현계옥은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조선의 무산 여성들이 민족해방운동 및 계급혁명 운동과 함께 해야 여성해방도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논리였다. 절친인 정칠성을 비롯한 조선의 사회주의 여성단체들과 동일한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1927년 4월 중국의 장개석이 국공합작을 깨뜨리면서 중국에 있는 좌파 세력은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됐다. 이에 따라 1928년 3월 현정건이 체포됐다. 현정건은 신의주로 압송됐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돼 3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932년 6월 10일에 쇠약해진 몸으로 만기 출소했다. 그리고 곧장 아내 윤덕경의 집으로 들어갔다. 윤덕경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에도 현정건의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다. 1932년 12월에 고문 후유증으로 급성 복막염이 발병했고, 입원 6일 만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윤덕경은 현정건을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두 달 후 음독자살한다.

현계옥은 현정건이 수감 생활을 하고 있던 1931년 7월에 상해를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1935년에 정칠성은 옛 친구 현계옥이 외몽고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그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다. 그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요원으로 외몽고에서 어떤 임무를 수행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볼레로는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대표곡으로 영화 <밀정> 후반부에 총독부의 구락부 건물이 폭탄 공격을 받았을 때 흐르던 곡이다.



[각주]

1) “여성 노동자의 벗, 정칠성의 사회주의 운동과 여성해방론”, 《워커스》 86호, 2022.1.1. 참조


[참고문헌]

- 김영범, “기생에서 혁명가로, 玄桂玉의 사랑과 자기해방의 고투”, 《지역과 역사》 45호(부경역사연구소, 2019).
- 김영범, “현계옥 스토리 이면의 ‘또 다른 신여성’ 윤덕경 연구”, 《여성과 역사》 32호(한국여성사학회, 2020).
- 김희곤 외, 《대구여성독립운동인물사》(대구여성가족재단, 2019).
- 김중순, “근대화의 담지자 기생Ⅱ-대구 지역 문화 콘텐츠로서의 가능성”, 《한국학논집》 제47집(계명대한국학연구원, 2012).
- 송건호, 《의열단과 민족해방전선》(한길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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