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의 대상은 우리 자신이다

[양규헌 칼럼] 노동자계급에게 대타자는 없다

얼마 전, 예전에 함께 활동하던 지인을 만났다. 반가움의 인사를 끝내고 세월호 정세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던 그 친구가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진보정당 통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는 질문에, 그 질문의 요지가 뭔지 되물었다. ”민주노동당 시절이 그리워서 묻는 말입니다“. 뜬금없는 질문이라 생각했지만 그 친구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치노선과 관련해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으리라.

“동지는 진보의 범주를 어떻게 구분하나” 반문하며 그 ‘구분의 잣대는 뭐냐’고 물었다. 그 동지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야 뭐~~ 이전 민주노동당에 몸담았던 사람들과 그 주변에 있는 정치조직들’이죠.

애매모호한 진보는 이념이 보이지 않고, 머릿수만 늘려 양적확장만을 중심에 두는 잣대는 진보의 가치와 정체성은 물론 노선에 물 타기 하는 양상으로 진행되는 것이 오늘의 진보지형이다. 진보정당이 이념에 확신이 없고 오로지 세력규합에 대한 고민과 정치적 이합집산만 생각한다면 ‘목욕하던 사람(민중)들은 통째로 버리고 때가 둥둥 떠 있는 목욕물(권력)에만 집착하는 꼴만 보일뿐’이다. 민주노동당 이후 각각 흩어져 각개약진하는진보정당들의 통합에 반대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진보정치의 이념과 노선을 선명하게 하고 그간의 행보에 대해 평가를 토대로 진보정당의 발전방향을 수립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그래야 왜 흩어지고 분리되었으며, 왜 다시 결합해야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

자본주의가 주입하는 환상의 환각제에 취해 널부러져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볼 일이다. 바야흐로 한국은 진정한 정치가 없는 가운데 정치의 계절이 계속되고 있다. 맥락 없는 창조경제가 환상을 불러오고 행복의 주술이 세상을 도배함으로서 역동성이 넘실댄다는 한국에 왜 진정한 정치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세월호 참사로 3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는데도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 노동자, 민중에게 씌워지는 억압의 굴레는 이중 삼중으로 겹쳐지고 기본권과 일할 권리조차도 실종되어 질식할 정도의 억압이 지속되는데, 정치가 없다. 가계부채가 1000조를 훌쩍 넘겼으며 경제위기가 가속화되고민중의 생존이 파탄을 맞고 있는데 재벌의 곳간은 넘쳐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자본에 의해 편재된 세력들의 권력다툼이 있을 뿐이고 거리에서 투쟁하는 미세한 계급정치가 보일 뿐이다.

민노당 건설당시에 제기되었던 자본주의에 대한 입장과 노동자계급정당의 꿈은 왜 실종되었는지, 야만의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은 포기한 것인지, 노동해방쟁취를 외쳤던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노동운동을 통해 축적된 투쟁의 성과와 한계에 바탕을 둔 현재의 진보정당들과 새 정치 화두를 들고 나온 민주당과는 어떻게 다른지, 노동자계급 정당과 혁명의 기치를 들고 당 건설을 외치는 각각의 단위들은 어떻게 다른지, 서로 동지라는 범주로서 용인하면서도 세계관과 정세분석의 관점이나 당 건설 경로, 강령 등에서 노출되는 이견의 폭은 얼마나 큰지 등에 대해서는 확인도 명확한 결론도 없다. 뿐만 아니라 어느 조직을 막론하고 현상유지에 안간힘을 쏟고 있을 뿐, 내일에 대한 희망은 고사하고 수세적 상황을 견디며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외에 뚜렷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진단과 평가가 없거나 미비한 상태에서 마련되는 전략에 대한 기획은 과학이 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진보세력의 지향이 진정 변혁이라면 지금이라도 평가를 통해 대안을 수립할 토론장을 열어가야 하지 않을까. ‘실패하더라도 다시 더 낫게 시작하라’는 고전의 명제가 절실한 시점이다.

우리는 공격일변도인 권력에 맞서 돌파구를 찾기보다는 방어에 급급하고 있다. 사안적 쟁점에 대한 투쟁에는, 정권에 대한 본질을 폭로하고 사회적 모순에 맞서 연대라는 이름으로 투쟁해 왔으나 투쟁기조나 전술에 대한 통일성은 빈약한 상태였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사회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으나, 중요한 목표는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 좌파는 지금까지 투쟁에서 지배계급에게 때를 묻히는 데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 중요한 것은 그들을 ‘거세’하는 것이다. 그 ‘거세’는 어떻게 가능할까? 혁명의 과정이란 점진적 진보가 아니라 실패하더라도몇 번이고 시작을 반복하는 운동이다. 그리하여 노동해방의 관점을 끝까지 가져가면 다시 소환되는 것이 ‘사회주의적 이론’이다. 우리는 점진적 진보가 진보의 유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급속한 변화의 물줄기에서 비켜남으로서 결국 자본에 포섭되는 과정을 목격해왔다.

정리해고를 비롯한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하루하루의 목숨을 연장해나간다. 배고프고 춥고 절망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목숨을 포기하기도 하지만, 온갖 혼돈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멈출 수가 없다. 그러나 ‘메시아’는 끝내 오지 않는다. 아니 올 수가 없다. 노동자에게 ‘메시아’란 원래 없기 때문이다. 호피 족 속담인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들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를 알았더라면, 마치 시지프의 신화처럼 반복되는 (부조리한) 일상 속에서 어떠한 신화적 기다림에도 의탁하지 않은 채 우리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이 순환적인 세계의 문밖으로 외출할 수 있었을 지 모른다. 노동자의 ‘자기권력화’란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은 바로 우리라는 걸 알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대타자는 없다. 우리가 곧 해방자이고 해방이며 우리는 ‘노동자계급’ 자신이다.

우리들의 삶은 투쟁이고 세상의 발전은 투쟁이 있기에 가능하며 계급적 단결도 투쟁 속에서 만들어진다. 역사는 투쟁의 자양분을 먹고 자라나며 그 속에서 변화 발전해 왔다. 자! 그렇다면 경험으로 축적된, 투쟁으로 단련된 우리는 자존감이 충분한 연대로 무엇과 싸워야 할까? 계급의식이 실종된 시민단체와 노선투쟁을 해야 하고, 진보라는 보자기에 갇혀 계급성이 결여된 가짜 진보와 싸워야한다. 또 어설픈 변혁을 내 세우는철지난 민주대연합(반 박근혜)과 싸워야 하고, 건전보수를 자칭하는 수꼴들과 싸워야한다. 국가권력과 자본과의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하고, 노동자계급에게 이데올로기적, 물리적 억압을 멈추지 않는 자본가계급과 싸워야 한다. 그러나 더더욱 힘든 싸움은 우리자신과의 싸움이다.

지금까지 숨 가쁘게 달려와 실천 강령을 실현할 우리시대의 진보에게 진보는 어떤 존재이며 누구를, 무엇을 기다리는가를 물어 볼 차례이다.

물론 사회주의 이념에 계속 충실하기만 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이념에 실천적 긴박함을 부여하는 적대를 역사적 현실 안에서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지적 재산권등과 관련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과학기술 발전의 사회·윤리적 함의’, 새로운 장벽과 빈곤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차별정책) 생성, 이러한 파국적 위협과 불평등, 분할통치에 맞선 투쟁이 공유하는 체제이다. 자본주의의 체제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인류가 파멸에 봉착할 수 있다는 진단을 부정할 수 없다. ‘자본주의를 폐절하고 새로운 사회건설에 동의하는 진보’라면 동일한 지향점으로서 연대의 정신은 일치될 것이고 투쟁의 위력은 배가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보정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논의의 장은 내일을 향한 새로운 장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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