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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정의 바보같은사랑](100)유서 쓰고 고공농성 시작한 영남대의료원 13년 해고노동자 박문진 씨 이야기

[기자 주] 7월 1일 새벽, 대구 영남대의료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 2007년 해고돼 13년 째 원직복직 투쟁을 해오고 있는 박문진·송영숙 씨(민주노총 보건의료노동조합 영남대의료원지부)가 70m 높이 영남대의료원 응급의료센터 건물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노조 기획탄압 진상조사, 책임자처벌 및 재발방지, 노동조합 원상회복, 해고자 원직복직, 영남학원 민주화,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며 7월 8일 현재 8일 째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2006년, 영남대의료원 노동조합은 주5일제 시행에 따른 인력충원과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 기존 단체협약 이행을 요구했다. 영남대의료원 사측은 창조컨설팅 심종두 노무사와 단체교섭 수임 계약을 하고 노조파괴 시나리오를 통해 조합원 950명이던 노조를 70여 명의 소수 노조로 만들었다. 사측은 고의적으로 교섭을 파행시켜 파업과 노사 갈등을 유도했다.

영남대의료원은 2006년 3일간의 부분파업과 노조 간부들에 대한 형사처벌을 이유로 2007년에 10명을 해고하고, 28명을 징계했다. 56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해 노조 조합비와 노조 간부 개인 통장이 가압류되기도 했다. 해고된 조합원 10명 중에 7명은 대법원 부당해고 판결로 복직됐으나 대법원에서 패소한 곽순복·박문진·송영숙 세 명의 노동자는 13년이 되도록 복직하지 못하고 있다.

2012년, 국정감사와 청문회를 통해 영남대의료원, 유성기업, 발레오만도 등 14개 노동조합을 파괴하고 168개 기업에 노조파괴 컨설팅을 해왔던 창조컨설팅의 만행이 드러났다. 심종두 씨의 노무사 등록과 창조컨설팅 설립인가는 취소됐고, 심 씨 등은 최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위반으로 실형 선고를 받았다. 당시 발생했던 일련의 상황이 영남대의료원 측의 기획된 노조 탄압에 의한 것임이 입증되었음에도 영남대의료원은 ‘대법원 판결’만을 언급하며 해고노동자들의 복직을 계속 거부하고 있다. (영남대의료원 투쟁 관련 상세한 내용은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4125 참조바랍니다)

두 사람이 고공농성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배경과 준비과정, 고공농성 상황을 영남대의료원 해고노동자 박문진(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 씨의 목소리를 통해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박문진 씨는 1988년 영남대의료원 분만실 간호사로 입사해 영남대의료원노조 위원장과 보건의료노조 위원장, 민주노총 부위원장 등을 거쳐 다시 영남대의료원 간호사로 복귀해서 근무하다가 해고 됐다. 올해로 영남대의료원에 입사한 지 31년차가 되는 박문진 씨는 현재 정년을 2년 남겨두고 있다.


  대구 영남대의료원 70m 고공에서 농성을 하며 손을 흔들고 있는 영남대의료원 해고노동자 박문진·송영숙 씨 [출처: 연정]

변기에 앉아 있으면 축복 받는 기분이 들어요

7월 3일 저녁, 사흘 째 고공농성 중인 박문진 지도위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구에는 며칠째 30도가 넘는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덥기는 덥네요. 이제 시작이죠. 시간이 지나면 더 심해지겠죠.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선선한데, 낮에 햇볕 있을 때는 텐트 그물막 밑에 가만히 앉아 있어요.”

그나마 더위는 앉아서 견디면 되는데, 바람은 매우 위협적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바람이 불면 현수막 ‘단도리’ 등 할 일도 많다. 옥상 난간이 무릎 아래 정도 위치에 있어 이 또한 두 사람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인 중 하나다.

고공농성을 준비하면서 보안문제로 인한 긴장이 풀려서인지 다행히 지난 며칠 동안 잠은 대체로 잘 잤다고 한다. 밑에서 걱정할 까봐 얘기는 안했는데, 몸이 처지고 붓는 증상이 있다고 했다. 식사는 간부들이 돌아가며 매 끼 올려주고 있는데, 양껏 먹지는 못한다. 운동을 하지 못하니 소화가 되지 않아 두 끼 먹는 걸 고민하고 있다. 이 날은 국수를 먹었다며 박 지도위원이 흐뭇하게 이야기한다. 화장실은 간이화장실을 만들어 이용하고 있다. 박 지도위원은 고공농성장 두 해고노동자의 생활공간을 ‘텐트하우스’라고 불렀다.

“처음엔 어색하고 힘들고 처량했는데, 여기 동서남북 풍광이 좋아요. 산맥도 이어지고 있고... 텐트 변기에 앉아 있으면 축복 받는 기분이 들어요.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화장실이 있을까? 즐겁게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있어요.”

가장 힘든 점을 물으니 더운 날씨에 씻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물 공급이 어렵다보니 물을 무척 아껴 쓰고 있다.

“비 오면 빗물 받으시는 거 아니에요?”

“빗물 받아써야지, 최강 절약하고 있어요.”

2년 전 울산 현대미포조선에서 해고를 당해 고공농성을 하면서 여름에 패트병에 구멍을 뚫어 샤워를 하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떠오른다. 박 지도위원은 아직 머리도 감지 못했는데, 다음날은 머리라도 감아볼까 하는 중이라고 했다. 먹고 싸고 자는 기본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한다.

큰 결단을 내릴 때 지리산에 갔다 와요

“영남대의료원 투쟁 후속 글 쓰신다고 했을 때, 제가 드라마틱한 걸 보게 되실 거라 얘기했던 거 기억나세요?”

필자는 지난 5월 영남대의료원 투쟁 취재를 할 때, 박문진 지도위원으로부터 이후 ‘선도투’에 대한 암시를 받았다. 박문진 지도위원은 그즈음 지리산에 다녀왔다.

“올해 13년째기 때문에 조만간 우리도 선도투에 대한 결단을 내려야 될 거 같아요. 그게 뭐냐는 얘기를 지금 하기는 좀 어렵고... 3천배 투쟁할 때도 지리산에 갔고, 뭔가 큰 결단을 내릴 때 저는 반드시 지리산에 갔다 와요. 운동하는 사람들한테는 지리산이 갖고 있는 의미가 있잖아요. 지리산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 산은 그냥 갔다 오는 산이 아니잖아요. 그 의미는 시간이 지나면 연정 동지도 ‘아, 그게 무슨 이야기였구나’ 라는 걸 알게 되지 싶어요.”

“지리산 왔어요~ 산 디게 조아해요”

소녀처럼 신이 나서 문자메시지로 소식을 전해주던 지도위원의 모습이 생각난다. 두 해고노동자가 고공농성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을 지도 모를 그즈음, 박 지도위원은 각별한 건강관리도 하고 있었다. 매일 2시간 가까이 걸어 다니고, 짬이 나는 대로 산에 갔다. ‘일찍 자는 게 보약이고, 먹는 것보다 좋다’는 신조 하에 밤 11시 이전에 취침해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생활습관도 체력 관리에 도움이 됐다.

2012년 대선 시기 삼성동 박근혜 자택 앞에서 매일 3천 배씩 57일 간 총 17만 배를 한 후에 몸과 마음이 많이 아팠다. 당시 치료를 도와주었던 지인의 표현으로 ‘오장육부가 많이 망가져 항암치료 받는 수준의 몸’을 회복하기 위해 계속 산에 다니고 걸었다. 채식을 하는 지도위원은 평소 먹지 않던 해산물까지 먹어가며 건강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두 가지 큰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영남대의료원 간호사로 복직하기 위한 것이다. 또 하나는 나이팅게일이 되고자 했던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꿈을 이루기 위해 해외 봉사활동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박 지도위원은 고공농성 등 ‘선도투’에 대한 고민을 오래 전부터 해왔다. 친한 사람들에게 “나도 굴뚝 올라 가야겠다”고 했더니 “대구에 굴뚝이 없다”고 해서 “하나 지어야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굴뚝을 만들어서라도 올라가고 싶을 만큼 절박했다.

고공농성을 결정하고 답사를 다니고 장소를 확정했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고공농성을 했던 여성 노동자를 만나 필요한 물품 준비 노하우를 전수받는 등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갔다.

하루하루 피가 말랐어요

5월에 지도위원이 얘기한 ‘선도투’가 고공농성일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지만, 정년을 2년 남겨두고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상반기가 지나기 전에 무엇인가 시작할 것이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영남대의료원에서 삼천 배 투쟁을 다시 할지도 모른다고,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6월 한 달이 필자에게는 ‘뭐가 잘 안되나?’하는 걱정과 기다림, 그리고 동시에 무소식이 주는 안도감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3천배는 언론이나 사람들 마음 모으기가 힘들더라고요. 고공농성을 서울에서 할까 고민도 많이 했는데, 영남대의료원을 직접적으로 압박하고 직원들도 부담감과 책임을 느끼게 하기 위해 여기를 선택했어요. 서울에서 하면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장기전으로 갈 때, 동지들이 대구 서울 오가면서 짜증이 날 수도 있거든요.”

두 해고자가 고공농성을 결의하고 실행에 옮기려 했을 때, 예상하지 못했던 내부의 벽에 부딪혔다.

“오래전부터 고민한 걸 제안한 건데, 이걸 공론화 했을 때 다 반대했어요. 반대하는 심정은 이해하는데, 구체적인 마음을 먹고 몇 차례 설득했는데도 아니라고 해서 화도 냈어요.”

지난 13년 간 투쟁을 안 한 것도 아니었고, 영남대의료원 측의 태도는 여전히 잔인하리만치 냉혹했다. 수 년 간 교섭을 통해 풀고자 했으나 풀리지 않았고, 연대투쟁도 쉽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깃발 꼽고 사측과 영남학원재단을 압박해야 한다고 설득했어요. 선도투를 해야 지역과 보건의료 동지들을 모아낼 수 있다고도 이야기 했고요.”

논의하는 과정이 길어지면서 ‘선도투’가 지체되자 박문진 지도위원은 피가 마르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가 마지막 투쟁이라 생각해서 보안문제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준비과정에서 새 나갈까봐 하루하루 피가 말랐어요.”

‘너만 알아’ 하면서 얘기가 새 나갈 수도 있기 때문에 논의하고 준비하는 시간 내내 긴장의 연속이었다. 박문진 지도위원은 올해 반드시 복직해서 간호사 가운 입고 병원을 다니고 싶다고 했었다. 고공농성은 마지막일 수밖에 없는, 마지막이어야 하는 투쟁이었다.

  지난 6월 10일, 영남대의료원 해고노동자 원직복직 등을 위한 108배를 진행하고 있는 박문진 지도위원 [출처: 연정]

새롭게 투쟁할 수 있는 길이 열려 기분 좋았어요

“올라오기 전에 기도 많이 했어요. 여기 안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매일 기도 했어요. 내가 투쟁 잘 할 수 있으니까 탈이 나지 않게 해달라고 제발 길을 열어 달라고... 먹다가도 길 걷다가도 계속 기도했어요.”

올라오기 전에 한 달 넘게 절 투쟁을 할 때, “1배, 2배...” 읊조리며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절 하던 지도위원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그런 기도를 했었겠구나.

“오히려 여기 텐트 치고 안착하면서 기분이 너무 좋고 신이 났어요. 제대로 된 투쟁이 이제 시작된다는 것에 안도와 자부심이 들었죠. 새롭게 투쟁할 수 있는 길이 열려 기분 좋았어요. 오랫동안 진지하게 마음 다져온 투쟁이었으니까요. 이제 정착해서 잘 견디면 되는 거죠.”

올라와서 텐트 설치를 어지간히 하고나서 간단한 다과를 준비해 무탈하게 승리해서 현장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삼배도 올렸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과 지성이면 감천(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 그 말 이외 다른 부연 설명이 더 필요할까?

말은 못하고 이별 준비하며 주변을 정리 했어요

함께 사는 어머니에게는 캄보디아에 의료봉사 간다고 이야기를 하고 어머니 몰래 물건을 재빠르게 정리하고 짐을 쌌다. 어머니가 ‘캄보디아 가는데 두꺼운 옷은 왜 싸냐?’고 해서 다른 사람 줄 거라고 둘러대기도 했다.

“날 잡아놓고 집과 사무실에서 말은 못하고 밥 사달라고 이별 준비하며 주변을 정리했어요. 유서 쓸 때는 어찌나 눈물이 나든지... 올라오기 전 마지막 주말에는 비가 세차게 내리는 해인사에 다녀왔어요. 부처님께 고하고, 해고자 삶을 끝낼 수 있게 해달라고... 엄마랑 같이 안 가던 목욕탕 가서 엄마 등도 밀어드리고 엄마 좋아하는 음식 사드릴 때도 괜시리 속울음이 나서... 엄마한테 잘 할 걸... 엄마 용돈 드리지 못했는데, 짧은 편지와 함께 용돈을 드리고 왔어요. 먼 길 떠나 못 돌아오는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어요. 특히, 암에 걸려 아픈 사람들...”

고공농성을 앞두고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사람 일이기에 유서를 썼다. 건조하게 쓰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쓰다 보니 눈물이 쏟아졌다.

“많은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면서 띄엄띄엄이긴 하지만 내 삶을 돌아보았고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 인생 가장 많은 세월 동안 노동운동 한 거에 대한 자부심도 들고 행복했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더라고요.”

장기전을 각오하며 옷도 계절 별로 준비했다. 혹시 겨울옷을 준비했냐고 물으니 그렇다며 겨울 파카도 준비 했다고 한다.

투쟁과 관련된 영화들을 보며 한 번 더 마음을 다잡고, 힘을 받기도 했다. 고공농성 일주일 전에 함께 고공에 오를 송영숙 씨와 함께 2부작 총 4시간짜리 영화 <체게바라>를 봤다. 또, 영국으로부터 아일랜드의 독립을 요구하다 수감되어 아일랜드 독립과 정치범 지위 인정을 요구하며 66일 동안 단식투쟁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보비 샌즈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헝거>를 혼자 보기도 했다. 많은 감정이입이 되는 영화들이었다.

“<헝거> 주인공이 28살에 교도소에서 단식을 66일간 하고 죽는 과정을 봤어요. 체게바라도 비슷한 삶을 살다 죽었고요. 살아서 투쟁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겠다. 우리는 투쟁을 만들 수 있고 장기전도 자신 있다.”

7월 1일 새벽, 한 발 한 발 고공에 오르면서 박 지도위원은 체게바라를 생각했다고 했다. 저 멀리 태양이 떠오르는 시간, 체게바라와 그가 못 다 이룬 혁명을 생각하며 무거운 배낭을 메고 70미터 고공을 향해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 박문진·송영숙 두 해고노동자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7월 1일, 고공농성 첫 날 영남대의료원에서 투쟁문화제에 참여하고 있는 대구지역 노동자와 시민들 [출처: 연정]

동지들 보면 짠하고 고마워요

고공농성 며칠 전부터 잠을 자지 못했다. 함께 올라간 송영숙 씨 역시 전날 밤을 꼬박 새웠다. 7월 1일 고공농성에 돌입한 직후, 경찰들이 왔다. “들어오면 뛰어 내리겠다”고 하자 물러났다.

“텐트 다 치고 배가 고파 둘이 컵라면을 먹었어요. 그러고 의자에 기대 1시간을 잤어요.”

고공농성장에서의 하루는 생각보다 빨리 간다. 그리고 바쁘다. 햇볕이 뜨거워 새벽 5시에는 눈이 저절로 떠진다. 세수하고 화장실 갔다 와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밑에서 하는 아침선전전에 손을 흔들면서 함께 하고, 책 읽고 아침 먹고 나면 밑에서 기자회견을 한다. 기자회견에 멀리서나마 함께 하고, 점심밥을 먹고 나면 오후에는 더워서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낸다. 책을 보거나 휴대폰으로 기사를 보고, 안부를 묻는 전화통화와 답장을 한다. 그리고 저녁 투쟁문화제에 참여하고, 저녁식사 하고 나면 해가 진다. 해가 지고나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까지 했어야 했나. 내가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구나.’ 생각도 들지만, 지역 동지들 연대투쟁 하는 거 보면 짠하고 고마워요. 지역 동지들이 우리 일로 움직이는 거에 기운 받으면서 분노와 울분은 가능한 안하려고 해요.”

13년 복직 투쟁을 함께 한 송영숙 씨와 전생에 어떤 관계였을 거라 생각하는지 물었다. 2011~2012년 ‘박근혜 그림자투쟁’을 할 때도 강남에 지하 셋방을 얻어 함께 생활했던 두 사람은 이번 고공 끝장투쟁에서도 룸메이트로 함께 하고 있다.

“전생에 도반 아니었을까? 김진경 지부장하고도 그렇고 오랜 기간 부딪히며 다듬어졌으니까. 눈빛만 봐도 마음을 알아요.”

처음 며칠은 전화 받고 가져온 물품 찾고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다가 적응이 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노조탄압과 부당해고에 대한 영남대의료원 사측의 책임을 묻고, 그리운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한 투쟁의 공간 ‘텐트 하우스’ 세팅이 거의 완료됐다. 이제 정말 시작이다.

“영남학원재단과 영남대의료원이 노조파괴자를 고용해서 노조파괴 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자본주의사회에서 노조파괴 하고 노동자를 해고한 건 살인이죠. 태아의 탯줄을 자른 거나 다름없어요. 악마와 다름없는 행위를 한 겁니다. 노조파괴하고 인권유린과 해고 한 게 단죄 되었으면 해요. 그런 사측은 이 땅에서 사라져야죠. 영남학원재단과 영남대의료원은 빨리 결단하는 게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끈질기게 유쾌하게 싸울 거예요.”

덧붙이는 말

‘연정의 바보같은사랑’ 100번째 글을 씁니다. 1~2년 전부터 100번 째 글 제목을 ‘시작’으로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 소망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영남대의료원 해고노동자들이 해고되었던 2007년 2월은 제가 <참세상>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때입니다. 13년 만에 이루어진 만남이 무척 애틋하고 뜻 깊게 다가옵니다.

현장 취재를 하면서 매번 글 쓸 곳을 찾던 제가 <참세상>에 글을 연재할 수 있도록 연결고리가 되어준 작가 박수정 선배님과 흔쾌히 연재를 수락하고 서툰 글을 많이 아껴주고 따뜻한 격려를 해준 유영주 당시 편집장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사측의 통제가 심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현장 취재 안전하게 잘 다녀오라고 유영주 편집장님이 서식에도 없던 취재확인서를 만들어주셨던 기억도 납니다. 그 따뜻한 응원이 저에게는 힘들 때나 좌절할 때 꺼내보면 용기가 나는 오래된 편지 같은 것이었고, 100번 째 글을 쓸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누군가 내가 하는 일의 과정을 기억하고 응원해준다는 것은 참 든든하고 힘이 나는 일입니다. ‘연정의 바보같은사랑’도 그런 공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분들의 격려와 배려가 있어 느린 걸음으로나마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현장에 다녀와 쓰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에 대해 송구한 마음도 전합니다.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늘 성심껏 편집해주고 격려해준 참세상 편집부, 드문드문 올라오는 글을 읽고 기억해준 독자들, 부족한 필자를 믿고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어준 많은 현장 노동자와 인터뷰이 여러분, 고맙습니다.

- 연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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