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

[연정의 바보같은사랑](116)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과 쾌유를 위한 오체투지 행진 이야기②

우린 어디서부터 갈라진 걸까요?

86년 최루탄이 소낙비처럼 퍼붓던 거리에도 우린 함께 있었고, 91년 박창수 위원장의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라는 대오에도 우린 함께였고,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자리에도 같이 있었던 우린, 어디서부터 갈라져 서로 다른 자리에 서게 된 걸까요?

한 사람은 열사라는 낯선 이름을 묘비에 새긴 채 무덤 속에, 또 한 사람은 35년을 여전한 해고노동자로, 또 한 사람은 대통령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된 건. 운명이었을까요? 세월이었을까요?

연애편지 한 통 써보지 못하고 저의 20대는 갔고, 대공분실에서, 경찰서 강력계에서, 감옥의 징벌방에서, 짓이겨진 몸뚱아리를 붙잡고 울어줄 사람 하나 없는 청춘이 가고. 항소이유서와 최후진술서, 어제 저녁을 함께 먹었던 사람의 추모사를 쓰며 세월이 다 갔습니다.

-‘김진숙 복직촉구 각계각층 원로선언 기자회견’ 김진숙 지도위원 발언 중에서(2020.10.20. <오마이뉴스> 영상 참고>


  12월 18일 오후, 경복궁역 인근에서 오체투지 중인 참가자들 [출처: 연정]

정조대왕 능행차보다 더 귀중한 행렬

“둥~”
“둥~”
“두둥~”

12월 18일 오후 4시, 경복궁역 인근.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과 쾌유를 위한 오체투지 두 번째 날. 서울 중구 정동길 민주노총 앞에서 청와대 까지 가는 마지막 코스의 오체투지가 진행되고 있다. 이제 잠시 후면 목적지인 청와대 앞에 도착한다. 청와대 가는 길은 햇볕이 들지 않아 더 춥게 느껴진다. 아침에 내린 눈이 얼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한선주 전 공공운수노조 교육실장·서영섭 신부(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소속)·김진억 전 희망연대노조 나눔연대국장이 전날에 이어 오체투지를 하고, 두 번째 날에는 김호규 금속노조 위원장도 함께 하고 있다.

길을 가던 시민들은 간혹 오체투지를 하는 이유를 묻기도 하고, 추운데 어쩌냐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물론, 뭐하는 거냐며 비난하는 이도 있다. 더러는 김진숙 지도위원을 텔레비전에서 봤다고 반가워하며 사진을 찍기도 한다.

오체투지 참가자들은 날씨가 어떻든,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저 묵묵히 땅에 엎드려 절을 하고 행진을 한다. 세상에 오직 이 일만 있다는 듯이.

김호규 위원장은 금속노조 위원장으로서의 의무감뿐 아니라 금속노조 조합원의 한사람으로서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을 위해 함께 하고 싶었는데, 그 길을 만들어준 서영섭 신부에게 고맙다고 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평생 동지였던 박문진 지도위원도 많이 힘드셨을 텐데, 오직 김진숙 지도위원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오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들에게 희망의 길을 안내한 서영섭 신부님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동수 시사만화가가 그린 <노동자 김진숙 복직 촉구 오체투지도> [출처: 연정]

어김없이 한경아 씨(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네트워크 집행위원)가 대열 맨 앞에서 길을 내고, 꿀잠 활동가 김경봉 씨가 북소리로 오체투지 참가자들을 인도한다. 이틀째 함께 걷고 있는 박행난 씨(꿀잠 활동가)는 현수막을 들거나 물품 챙기는 일 등 불시에 필요한 일들을 하고, ‘여성영상집단 움’과 경렬달군은 영상과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다. 이동수 시사만화가는 이틀째 오체투지 행진에 함께 하며 참가자 한 명 한 명의 모습을 스케치북에 담고 있다. 첫째 날에는 노동사목위원회 박신안 씨와 시민 한분이 시작을 함께 했다.

이동수 만화가가 이날 전체 참가자들의 모습과 이름을 적은 그림 <노동자 김진숙 복직 촉구 오체투지도>를 보여준다. 한경아 씨가 “정조대왕 능행차인줄 알았다”고 하자 이동수 만화가는 “그보다 더 귀중한 행렬”이라고 응수한다.

산업은행으로 넘어갔으니 정부가 책임져야

우리가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
그때엔 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보며 함께 했지
인간이 인간으로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그런 세상을 향해 함께 했지
허나 젊음만으로 어쩔 수 없는 분노하는 것만으론 어쩔 수 없는
생각했던 것보단 더 단단하고 복잡한 세상 앞에서 우린 무너졌지
- <당부>, 꽃다지 4집 《노래의 꿈》수록


방송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경복궁역을 지나는데, 갑자기 두툼한 겨울 파카를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 현수막을 든다. 조선업종노조연대에 가입돼있는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노동자들이다. 어느 순간 보니 권수정 금속노조 부위원장도 ‘김진숙을 조선소로’ 라는 손 피켓을 들고 걷고 있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과 쾌유를 위한 오체투지 장면 [출처: 연정]

  청와대 앞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오체투지 중인 참가자들 [출처: 연정]

“우리 노동자들이 이렇게까지 해야 된다는 게 좀 서글프죠. 잘 아시겠지만 민주화보상심의위에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부당해고이니 복직을 시키라 했는데, 악랄한 한진 자본이 계속 복직을 안 시켜준 거잖아요. 이젠 산업은행으로 넘어갔으니 정부가 책임져야죠. 해고는 살인이라 했는데, 김진숙 동지는 끝까지 자기 복직은 외면해도 동료들 복직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반드시 복직을 해서 이걸 계기로 해고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안되겠습니까.”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조윤성 부지부장)

조선업종노조연대는 지난주부터 3~4일 씩 노조 별로 돌아가며 서울 청와대 앞 등에서 천막농성과 기자회견을 포함한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을 촉구하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조선업종노조연대는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 현대삼호중공업, 성동조선소, STX조선해양 등 조선소 노동조합의 연대 조직이다.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다는 동지를 사흘 앞둔 날. 어느새 해가 지고 찬 공기가 짙어지기 시작할 즈음, 청운효자동주민센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와대 앞에 도착한다.

오체투지 참가자들에게 사진 찍을 공간을 마련해 주겠다며 호들갑을 떨던 경찰은 개인 휴대폰으로 촬영을 하다가 오체투지 참가자들에게 한바탕 혼이 나기도 했다.

그 평화를 위해 기어서 왔습니다

“1박 2일 12km 입니다. 12km를 이렇게 기어서 왔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김진숙의 복직을 위해서입니다. 김진숙의 복직이 평화이기 때문에 그 평화를 위해 이렇게 기어서 왔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 복직과 쾌유를 위한 한경아 씨의 오체투지 마지막 절 멘트가 이어진다.

“마무리로 다섯 번의 절을 하겠습니다.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기원하며 첫 번째 절을 합니다. 차별 없는 세상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원하며 두 번째 절을 합니다. 해고는 살인입니다. 해고 없는 세상을 원하며 세 번째 절을 합니다. 일하다 죽지 않게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하여 네 번째 절을 합니다. 김진숙의 복직이 평화입니다. 그 평화를 위하여 다섯 번째 절을 합니다.”

  청와대 앞에서 마지막 5배를 올리는 오체투지 참가자들 [출처: 연정]

  오체투지를 마치고 인사 나누는 참가자들 [출처: 연정]

“수고하셨습니다.”

모든 참가자가 둥글게 서서 인사를 나누며 이틀간의 오체투지를 마무리한다. 서영섭 신부가 서품을 받은 지 10년이 되는 이 날, 오체투지 참가자들은 조촐하게 축하의 마음을 전했다.

고통스런 이야기를 마음으로 들어주길

오체투지를 마친 서영섭 신부가 청와대 김제남 시민사회수석 면담 요청서를 전달하기 위해 경찰차를 타고 청와대 연풍문으로 이동한다. 연풍문 건물 안에 들어가 경찰이 연락을 취하자 시민사회수석실 고영호 행정관이 내려왔다. 이날 김제남 시민사회수석과의 면담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2층 회의실에서 고영호 행정관과 20분가량 면담을 진행했다.

며칠 전, 시민사회수석실은 이미 ‘70민노회’ 등과의 면담에서 입장을 전달했기 때문에 이번 면담이 어렵다고 답변해 오체투지 참가자들의 마음이 상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대해 고영호 행정관은 시민사회수석의 회의 일정으로 시간이 안 맞았고, 해고기간에 대한 금전 보상에 대해 서로 주장이 엇갈리는 상태에서 정부가 개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시민사회수석의 역할은 가슴에 한 맺힌 사람들이 울부짖는 고통스런 이야기를 귀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바쁘더라도 절박한 사람들의 눈물어린 고통의 소리를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들었는데 뭘 더 듣냐고 얘기하는데, 같은 얘기가 반복된다는 것은 그만큼 절박함을 갖고 이야기하는 거라는 걸 더 헤아려줬으면 좋겠어요.” (서영섭 신부)

서영섭 신부는 한진중공업 사측이 김 지도위원의 부당해고 기간 임금 지급과 관련해 ‘업무상 배임’을 운운하며 복직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 정부가 단호하게 이야기해 경영진이 책임질 수 있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현재, 김진숙 지도위원 복직과 관련해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문성현 위원장이 노사 의견 조율을 하고 있으나 한진중공업 사측이 부당해고 기간에 대한 임금과 퇴직금 지급이 ‘업무상 배임’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지난 12월 11일, ‘노동인권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등은 산업은행 앞에서 ‘한진중공업 김진숙 해고자 복직촉구 노동법률단체 기자회견’을 마친 후 한진중공업의 주 채권단인 산업은행 측에 법률검토 의견서를 전달했다.

“사회적 요구와 노사 간의 교섭을 통한 합의에 근거하여 민주화보상법상 의무이행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김진숙 지도위원에 대한 온전한 의미의 복직, 이것이 업무상 배임죄가 될 리 만무하다. 지금까지 많은 투쟁 사업장에서 이와 동일한 방식의 복직이 이루어졌지만 배임죄로 수사를 받거나 기소되기는커녕 논란이 된 선례조차 없다.” (2020.12.11. 노동법률단체 기자회견문 중에서)

  청와대 연풍문 앞에서 김제남 시민사회수석 긴급면담요청서’를 전달하는 서영섭 신부(오른쪽) [출처: 연정]

생에 가장 아름다운 성탄 선물

“35년이라는 시간은 단순히 한 개인이 살아온 시간이 아니라 과거 우리의 불행한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온 시간 입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쩌면 행정관님도 저도 그분의 희생어린 삶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조금이나마 나은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과정을 자꾸 돈과 연관 시켜서 당사자에게 모욕적인 언사로 대응하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이 말은 꼭 전해주면 좋겠습니다. 김진숙 해고노동자가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을 옛 동지라고 이야기 했거든요. 이번에 해결되지 않는다면 평생을 살아가면서 마음에 많이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지의 그런 마음들을 잘 헤아려서 명예회복을 해줘야 되지 않을까요?”

면담을 마치고 사진 촬영이 가능한 연풍문 밖으로 나와 서영섭 신부가 고영호 행정권에게 ‘긴급면담요청서’를 전달했다. 김제남 청와대 시민사회수석과의 면담은 12월 23일로 잡혔다. 고영호 행정관도 서영섭 신부도 문제가 잘 해결되어 예정된 면담을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했다. 연풍문 앞에서 서한을 전달하며 서영섭 신부가 마지막으로 이야기한다.

“제 생에 가장 아름다운 기쁜 성탄 선물을 받고 싶습니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면 가장 많은 피를 뿌린 건 노동자들인데,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어디서 자라고 있는 걸까요? 그 나무의 열매는 누가 따먹고, 그 나무의 그늘에선 누가 쉬고 있는 걸까요?

그저께는 세월호 유족들이 저의 복직을 응원하겠다고 오셨습니다. 우린 언제까지 약자들끼리 서로를 응원하고, 슬픔이 슬픔을 위로해야 합니까.

그 옛날 저의 해고가 부당하다고 말씀하셨던 문재인 대통령님.

저의 해고는 여전히 부당합니까?

옛 동지가 간절하게 묻습니다.

-‘김진숙 복직촉구 각계각층 원로선언 기자회견’ 김진숙 지도위원 발언 중에서(2020.10.20. <오마이뉴스> 영상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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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세상 독자


    무난하게 마쳐서 다행입니다.

  • 문경락

    “35년이라는 시간은 단순히 한 개인이 살아온 시간이 아니라 과거 우리의 불행한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온 시간 입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쩌면 행정관님도 저도 그분의 희생어린 삶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조금이나마 나은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과정을 자꾸 돈과 연관 시켜서 당사자에게 모욕적인 언사로 대응하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이 말은 꼭 전해주면 좋겠습니다. 김진숙 해고노동자가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을 옛 동지라고 이야기 했거든요. 이번에 해결되지 않는다면 평생을 살아가면서 마음에 많이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지의 그런 마음들을 잘 헤아려서 명예회복을 해줘야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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