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이주민이 아니라 초국적 자본

자본의 세계화에 납치된 민주주의

"제발 저 쓰레기들 좀 치워 주세요. 홈리스들이 부동산 개발 때문에 쫓겨났다는 건 알고 있죠. 그렇지만 우리는 자유로운 시장경제 사회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다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야 합니다. 도대체 내가 왜 출근길에 홈리스들의 고통이나 절망을 봐야 합니까?"

미국 샌프란시스코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한 정보 통신 기술자가 최근 시 당국에 보낸 항의 내용이다. 21세기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페이스북, 애플 등 다수의 글로벌 정보 통신 업체들이 들어선 실리콘밸리. 이곳에는 약 7000명이 거리에서 산다. 이들 때문에 시청에 종종 항의 편지가 오지만 이처럼 뻔뻔한 내용은 처음이었다고 가디언이 최근 보도했다. 기사에는 맨땅에 널브러져 있는 홈리스 3명의 모습이 함께 실렸다.

공화당의 유력한 대선 예비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에 열광하는 이들은 이 기술자같이 부유한 화이트칼라가 아니다. 대부분은 최악으로 치달은 경제 불평등 속에서 더욱더 불안한 삶을 사는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공화당 주류에 등을 돌리고 불법 체류자를 추방하고 무슬림 입국을 제한하며 멕시코 국경과 사회 보장 제도를 강화하겠다는 아웃사이더에게 열광하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미치광이라고 불리던 트럼프는 이제 공화당의 경선 선두주자로서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많은 이들은 그의 인종주의적 선동을 주목하며 아돌프 히틀러와 비교한다. 그러나 이 사실 외에도 비슷한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히틀러가 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독일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렸던 연합국을 비판하며 대중의 분노를 모은 것처럼 트럼프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야기한 문제를 비판하며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일례로 그는 “FTA(자유무역협정)는 재앙”이라며 “(FTA가 국내법을 무력화해) 자국의 법이 없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심지어 “FTA가 아니라 공정 무역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FTA와 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전 세계 민중의 삶이 더 비참해졌다는 것을 트럼프가 알았기 때문일까?

‘세계화 반대’ 구호와 함께 부흥하는 인종주의

트럼프의 말대로 한 나라의 법이 법이 아니게 된 것은 IMF(국제통화기금) 등 초국적 금융 권력이 각국 경제 정책에 개입하면서 시작됐다. 고삐 풀린 거대 독점 자본과 금융 자본은 노동 시장을 자유화했고 공공 기관 민영화와 함께 임금과 복지를 축소하면서 노동자 민중은 점점 거리로 밀려났다. 1999년 미국 시애틀에서 벌어진 WTO(세계무역기구) 반대 투쟁에서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구호가 터져 나왔지만 근본적인 변혁은 유예된 채 자본주의는 더 깊고 넓게 세계를 잠식해 갔다. 서구에서는 줄어든 임금을 부채로 메워 소비를 유지하면서 막대한 부채가 쌓였고, 아시아와 동유럽 등 후발국에서는 초국적 금융 자본이 시장화를 주도했다. 또 중동과 아프리카는 2001년 9.11 테러 후 미국이 강행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략 전쟁을 시작으로 전쟁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2007년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발하고 각국 경제가 동반 몰락하자 자본주의의 한계는 자명해졌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금융 자본의 거품이 꺼지며 은행들이 줄줄이 위기에 처하자 각국 정부는 그 비용을 민중에게 전가했고 위기는 세계로 확산됐다. 결국 각국 경제 위기에 전 세계 민중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고 세계화한 현 체제에 맞서 점점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러한 세계화를 비단 좌판 진영만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극우 세력도 세계화를 비판한다. 다만, 극우 세력은 인종주의와 국수주의를 기반으로 세계화를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이민자 척결과 자국 중심의 신고립주의를 주장한다는 점이 다르다. 트럼프는 중국이나 한국과 같은 다른 국가들과 무슬림, 미국 내 이민자들을 미국 경제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유럽의 극우파 정당들도 반이민-반EU(EU 탈퇴) 정책을 앞세워 득세하고 있다. 프랑스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은 더 직접적으로 “세계화는 야만적이며, 오늘의 세계는 초국적 기업에 손에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 정치 체제의 위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위기로 굳건했던 서구 국가들의 양당 체제도 균열을 보이고 있다. 기득권층을 비판하며 새로운 정치를 말하는 세력이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다. 똑같이 세계화를 비판하지만 전혀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좌파와 극우파, 두 세력에게로 대중의 지지가 나뉘고 있다. 미국에서는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으로 민주당과 공화당의 당내 분열이 심각하다. 트럼프는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공화당 주류를 향해 탈당하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한다. 영국에서도 노동당 내 좌파 제레미 코빈이 당 대표로 선출되는 이변이 나타났을 뿐 아니라 우파는 영국독립당 등 극우의 도전을 받고 있다. 독일이나 프랑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 스페인, 아일랜드, 포르투갈 모두 우파와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했던 양당 체제는 몰락했으며 이는 서구 정치 체제의 위기를 웅변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선 독재의 몰락으로 나타났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에서 몰락한 독재자들도 지난 수십 년 동안 서구의 신자유주의 체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영국 언론인 로버트 피스크가 지난해 인디펜던트에서 “아랍에서 ‘(서구의) 민주주의’는 표현과 선거의 자유가 아니라 그들을 억압하는 잔혹한 독재자를 지원하는 ‘민주적’ 서구를 의미할 뿐이었다”고 표현한 것처럼 말이다.

다른 세계화를 위한 준비는

그러면 과연 이제 다시 어떤 세계화여야 할까? 신자유주의에 맞서 지난 10년 동안 일자리 등 계급적 생존과 기후 변화 등 지구적 생존의 문제가 대중운동의 전면에 부각되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력은 대륙 간 FTA 등 자유 시장 경제를 더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극우는 세계화를 비판하지만 러시아나 중국 또는 무슬림을 겨냥해 인종주의·국수주의적 혐오를 선동한다. 좌파는 다시 사회주의를 얘기하지만 어떠한 세계화인가에 대한 논의는 지체되고 있다. 특히 계속되는 경제 위기 속에서 국가 개입으로 자본주의를 유지하려는 케인스주의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임금, 복지, 금융 자본 통제 등 분배에 대한 문제 제기는 있되 초국적 자본의 손에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되찾아 올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드물다. 한편에선 그리스 시리자의 사례처럼 노동자 민중의 힘으로 세운 좌파 정부도 국제 금융 권력을 강제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결국 신자유주의 경제와 정치 체제에 대한 불신이 확산하고 있지만 이를 대체할 뚜렷한 대안이 보이진 않는다. 긴축의 시대에 요구를 관철하는 유일한 방법은 직접적인 시위 행동뿐이라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연구 결과는 말한다. 국경을 넘어 저항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더욱 주목되는 현실이다. [워커스 1호-INTERNATI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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