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적 자본축적론

[주례토론회] 자연과 여성에 대한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수탈과 착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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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가 논의하는 ‘페미니즘적 자본축적론’은 성(性. seong. sex-gender-sexuality)의 생산과 노동을 자연적 과정이 아니라 사회적 과정으로 소환하고 동시에 ‘자연’을 인격화하여 여/성뿐 아니라 자연이 착취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점을 명시화한다. 이를 통해 자본의 축적과정에서 여성과 자연이 자연적인 것으로 대상화된 위치였음을 밝히고, 그동안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나 착취관계에서 논외에 두어졌던 여/성과 자연을 주체로 불러낸다.
필자는 마르크스와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을 확대하여 지금까지 누락되어온 여성의 생산력과 자연의 생산력을 자본주의적 축적구조 속에 놓음으로써 자본축적론을 페미니즘적으로 재설정한다.


2.
필자의 페미니즘적 자본축적론은 페미니즘의 성(sex-gender-sexuality)과 가부장제(patriarchy) 논의들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다.
페미니즘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을 통하여 자본이 생산되고 축적되는 구조 내에서의 노동뿐만 아니라 그 구조 바깥에서도 ‘여성’의 노동과 생산이 완전히 누락되거나 부분적으로밖에 산입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이 부당한 구조와 현실에 맞서왔다.
페미니즘의 가부장제론의 전개의 연장선에서 자본주의 내지 자본주의적 축적과 관련하여 ‘가사노동 논쟁’이 1970년대 초부터 진행되었고, 198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오늘날까지 ‘여성’의 노동과 생산을 가치화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져왔다. 이 과정에서 ‘노동’이라고 간주되지도 않았던 여성의 ‘(집안)일’들이 ‘가사노동’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이 되었고, 그 노동들이 자본주의적 의미에서 가치를 생산하며 심지어 잉여가치를 생산한다는 분석1과 논쟁들2이 이어지면서, 여성의 노동이 가치와 잉여가치를 생산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급노동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또한 여성의 노동이 이렇게 무급노동의 자리에 놓여져 있게 됨으로써, 상품생산과정에서의 여성의 임금노동이 필연적으로 저평가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점도 밝혀졌다.3
페미니즘은, 여성의 노동과 생산에서의 이러한 지위가 ‘남/녀=자연’ 등식4과 ‘1/0’ 논리5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라는 구조 위에 축조된 것임을 규명하면서 동시에, 인간 여성뿐만 아니라 동식물 자연을 포함하는 ‘자연’의 생산과 노동으로까지 논의를 확장하고, ‘식민지’ 나아가 ‘3세계’의 현실과 ‘여성’과 ‘자연’의 문제로 연결시켜, 분석의 범위와 시야를 확장하여 축적론을 전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6


3.
필자는 ‘자본’의 생산과정이 ‘상품 생산과정’을 경유하여 일어난다는 점, 상품생산과정에서의 ‘잉여가치’가 자본의 원천이라는 점, 잉여가치는 상품생산과정에 투입되는 노동력상품에 의하여 생산된다는 점, 상품체 형태로 유통되는 과정을 통해 잉여가치가 실현되고 자본으로서 상품생산과정에 재투입됨으로써 자본의 재생산이 이루어진다는 점, 상품생산 규모의 확대와 함께 그 잉여가치를 실현시키는 상품유통 규모의 확대가 일어날 경우 자본의 축적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상품생산규모의 확대와 상품유통규모의 확대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노동력상품의 세대적 재생산과 확대공급 및 생산수단의 확대공급과 생산된 상품의 판매시장 및 소비시장의 확대라는 점 등, 마르크스와 룩셈부르크에 의하여 정초된 자본축적론의 논지를 따른다.

그러나 필자는 첫째, 자본의 생산과정에서 결정적 지위를 차지하는 ‘노동력상품’을 누가 어떤 노동과 생산을 통해 공급하는가를 마르크스와 룩셈부르크가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다는 점을 우선 문제 삼는다. 마르크스와 룩셈부르크의 축적론 논의에서는 ‘노동력상품’을 생산하는 노동, 즉 ‘인간생산노동’7의 가치가 제외되어 있다. 이 제외과정은 ‘노동력상품’의 가치를 다른 상품들의 가치와 달리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이 아니라 ‘그 노동자의 생활을 위해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로 치환시킴으로써 일어났다. 이를테면 여성의 임신출산양육 노동 및 생산의 가치를 독립변수로서 다루지 않고 익명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대신에 노동자계급의 세대적 재생산을 위한 ‘가족’(단위)의 생활만이 드러나게 되고 여성의 노동과 생산의 흔적은 ‘가족’ 단위에 묻혀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가족임금제’라는 이름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여성에 대한 자본과 남성의 무단 전유가 일어나는 이러한 과정이 기존의 마르크스와 룩셈부르크의 가치론과 축적론 내부에 들어 있는 것이다. 노동자계급(남성)이 생계부양자의 지위로 고정되고 자본주의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자본(인간의 생활과정에서 현실적 모습은 화폐/돈)의 세계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 ‘바깥 냥반’이 유지되며, ‘여성’은 ‘안 사람’이 유지되는 자본주의적 형태의 가부장적 구조가 자본주의적 축적을 굳건하게 현실적으로 보장하는 체계로서 재생산된다. 자본축적과 관련하여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자본가계급이고, 이러한 자본주의적 구조 속에서 일차적이고 기준적인 지위로 확정되는 인종은 남성계급이라고 하는 것이 페미니즘 논의들을 통하여 드러났다.8

또한 필자는 둘째, 로자 룩셈부르크의 논지에 따라 마르크스의 축적론에서 ‘시초축적’이 지니는 의미가 ‘자본의 창세기’에 머물고 있다는 점, 그러나 자본의 축적과정은 항상 지리사회 경제적 개념으로서의 ‘비자본주의 영역’을 (항상적 시초축적의 장으로서) 필요로 한다는 점, 그 과정은 상품판매시장일 때는 평화/평등적 외관을 띠지만 ‘농촌경제’나 ‘자연경제’에 대해서는 폭력적이고 약탈적이며 권모술수로 가득 찬 과정을 동반이라는 점에 따른다.
그런데, 룩셈부르크의 논의에서 ‘비자본주의’ 영역에 핵심적으로 ‘여성’이 빠져 있는 점을 문제 삼는다. 룩셈부르크는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적 관점에서 일국의 범위를 넘어 자본이 ‘비자본주의’ 영역을 노동력/생산수단/시장(두 가지 의미에서)잉여가치 실현과 상품 소비를 위한)의 확대공급이 자본축적의 근본적인 조건이라는 논의를 통하여 군국주의와 식민지 쟁탈전쟁을 규명하는 데까지는 이르렀지만, ‘여성’이 바로 그 ‘비자본주의’ 영역으로서 축조되어 있는 점에 대해서까지 분석할 수 없었다. ‘여성’이 ‘비자본주의’ 영역이 된 과정에 대해서는 페미니즘의 ‘가부장제’ 논의들이 지속적으로 밝혀오고 있는 지점이라고 필자는 본다. 룩셈부르크는 이 ‘여성’ 영역에 대하여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자연화한 채 논의를 전개한 것이다.


4.
따라서 자본주의적 축적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치생산 영역에서 여성과 자연의 생산력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필요하고, 가치실현 영역에서 여성과 자연의 생산력이 지니는 위치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자본축적 논의의 지형과 ‘페미니즘적 자본축적론’

● 마르크스의 자본축적론:
M-C...P...C’-M’(=M+△M)
(1) 상품(C’)의 생산과정(P)에서 상품(C=LP,MP) 중 노동력(LP)에 의한 잉여가치(s) 생산
(2) 상품(C’)의 유통과정을 통해 s의 화폐화(△M)
(3) 화폐화된 잉여가치(△M)의 추가 자본으로의 전환
(4) 확대재생산=축적

●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 (확대재생산에는 추가적 생산수단, 추가적 노동력(과 생활수단), 추가적 상품 판매시장이 필요. 자본축적과정은 ‘비자본주의 영역’으로서 전자본주의적 사회관계와 영토에 대한 상품화, 식민화가 생산수단, 그리고 생활수단이 ‘비자본주의 영역’으로부터의 조달 필요. (3) 추가로 생산되는 상품들이 판매디어 잉여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비자본주의 영역’의 시장 필요.

● 네그리-하트의 ‘정동노동’ ‘비물질노동’에 기초하는 자본축적 논의: 마르크스와 룩셈부르크의 가치론과 축적론 폐기. 포스트 포드주의적 체제 속에서 자본생산의 전환을 주장. 정보화, 금융화 과정에서 사회 전체의 공장화를 의미하는 ‘사회-공장’을 통한 자본의 생산에 착목, ‘노동의 여성화’ 논의‘. ’다중‘의 ’삶정치‘ 제기.

● 피케티의 ‘불평등구조’ 속에서의 자본의 축적: 마르크스와 룩셈부르크의 가치론 및 축적론과 무관. 상속재산과 노동능력에 의한 ‘자본/소득 비율’ 논의를 통해 선발자본주의 8개국 300년간의 성장추세 분석을 통해 자본축적 구조의 불평등성 심화 분석. 자본주의의 위기 대책으로 국가에 의한 ‘글로벌 자본세’ 제안.

● 본 논문의 페미니즘적 자본축적론: 마르크스와 룩셈부르크의 가치론과 자본축적론 유지. (1)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인간생산(임신출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으로 재설정. (2) 임금노동자의 잉여노동으로 한정해온 착취관계를 여성/자연의 생산/노동에 대한 가치전유관계로 확장. (3) 여성의 생산과 노동을 자연화한 기존의 자본축적론에 대한 페미니즘의 축적론 관련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종합. 페미니즘적 자본축적론으로서 ‘가부장체제’의 자본축적론 제시 (4) 기존의 자본축적론이 지닌 자본축적 구조 해명의 부분성과 불충분성 해소. (5) 노동-생태-여성의 상생을 도모하기 위한 해동철학으로서 ‘적녹보라 패러다임’에 입각할 것을 제안.


여기에서 첫째, 왜 여성과 자연의 노동과 생산이 비가치화 되었는가에 대한 논의는 필수적이다. 페미니즘의 관련 논의들이 ‘가부장제’(와 일부일처제와 이성애중심주의와 인간오로지주의와 이분법적 철학과 백인중심주의까지)를, 마르크스엥겔스의 관련 논의들이 ‘사유제산제’(와 관세와 조세와 식민지)를 문제 삼았을 때, 후자와 전자는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후자는 결코 ‘가부장제’나 ‘성적 위계와 지배구조’에 관련하여 문제 삼지 않았다는 점이 극히 문제적임을 지적할 수 있다. 둘째, 페미니즘의 활약에 힘입어 축적구조 속에서 여성의 위치가 동물에까지 확장되고, 동물의 노동과 생산을 여성과 동시에/이전에 이미 자본축적의 ‘자연적 조건’이 되어 있는 점을 문제 삼을 때 인간 남/녀와 동물의 ‘존재적 사슬’에서 ‘피와 오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자본’의 전모와 자본축적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특기할 수 있다.

또한 필자는 자본주의적 축적을 위와 같은 견지에서 논의할 때, 기존 페미니즘의 가부장제 논의와 기존 마르크스주의적 자본주의 논의가 갖는 제한성을 여전히 고수하는 한 자본주의적 축적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가부장체제론’으로의 체제론적 전환이 필요하고, 따라서 가부장체제론적 문제설정 속에서 자본주의적 축적을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가부장체제론은 ‘시대규정을 다시하고, 페미니즘을 재설정하고 운동의 방향을 찾아가자는 제안’과 함께 제기된 것이다.9 고정갑희는 “기존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를 자본주의와 다른 생산-노동으로 정의하거나 가부장제를 자본주의의 일부로 정의했다고 볼 수 있다. 가족적 생산양식, 재생산, 비가치/비노동/비등가교환으로 가부장제를 정의한 것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관계설정”10 해왔다고 분석하고, 기존 페미니즘의 한계를 넘고 그것을 포괄하여 분석할 수 있는 범주로서 ‘가부장체제론’을 제안하고 있다. 고정갑희의 문제설정에 따르면 가부장체제는 ‘계급-성-(인)종 체계’이자 ‘자본-군사-제국주의 체계’이며 ‘지역체계’이기도 하다. 현대 세계를 ‘가부장체제의 (세계화) 시대’로 정의하면서 고정갑희는, 가부장체제가 계급, 성, (인)종 체계에 기반하고 있고, 자본주의-제국주의-군사주의의 성격을 띠며, 세계체제적 성격을 띠며 진행된다고 논의한다.11



가부장체제가 계급체계와 성체계 및 종체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은, 시대를 자본주의체제로 규정할 때 포괄되지 않는 가부장적 노동과 생산 및 계급체계, 가부장적 성체계, 그리고 (인)종체계에 기반하여 움직인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것은 계급모순, 성모순, 종모순이 서로 융합되어 작동하는 시대 규정임과 동시에 성 문제, (인)종 문제, 계급 문제가 서로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고정갑희는 전 지구적인 가부장체제가 자본-군사-제국주의의 면모를 띠고 움직이며, ‘지역체계’로서 각 지역에서 특수한 형태로 성-종-계급 모순이 드러나고 있음을 논의한다.


5.
필자는 페미니즘과 가부장체제론의 논지에 따라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인간생산에 대한 여성의 생산력/출산력까지 확장하고 이어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을 식민지뿐 아니라 여성과 자연의 영역으로 확대하여 ‘자본의 시초축적’의 지속과 ‘비자본주의 영역’에서 여전히 온존하고 있는 무급 자본관계의 구조와 자본축적 구조를 규명한다.
이를 통해 기존의 자본축적론이 해명할 수 없었던 자본의 축적구조를 새로이 규명하고 노동-생태-여성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적녹보라 패러다임(The RedGreenPurple Paradigm)에 입각한 사회운동을 통해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부장체제론으로 자본주의와 자본축적을 분석하는 접근법이 지니는 의미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가부장체제론으로 자본축적과 확대재생산을 규명하는 작업은 그동안 페미니즘의 자본주의 분석들에서 진행된, 자본주의가 여성과 자연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것 없이 성립 불가능하다는 논의들을 확장하여 자본축적과정에서 체계로서의 성(性)을 전면화한다.
둘째, 가부장체제로 사회를 볼 때 전체로서의 총체적으로 사회와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지금까지 세계체제를 자본주의체제로 보는 논의는 체계로서의 성이 부분적으로 다루어지거나 체계적으로 배제되거나 누락되어 있다. 기존의 자본주의론에서는 체계로서의 성(性)을 ‘사회’나 ‘역사’로서가 아니라 ‘자연’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자본주의론으로 체계로서의 성(性)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존의 가부장제론이 문제설정한 성(性)에 체계로서의 성적 구조를 포괄할 때, 체제로서 가부장체제가 성립하며, 그런 한 자본주의는 가부장체제의 일부분임을 밝힐 수 있다.
셋째, 기존의 자본주의론이 핵심 문제로 설정한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구조화하여 은폐하거나 이용하고 있는 성 체계(sex-gender-sexuality system)12를 기본적 문제 틀로 설정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모든 사회운동들이 기존의 자본주의론에 의거한다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성(性)을 체계로서 문제설정하는 일, 그리고 자본주의가 성(性)을 어떻게 구조화하여 체계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력으로 전유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규명하는 일 없이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것은 자본주의 내부에서 자본주의를 강화시키는 데 봉사하는 점을 의미한다. 근대 자본주의가 지배적 생산력으로 성립된 이래 지금까지의 역사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넷째, 오늘날의 가부장체제는 지구지역체계로서의 세계체제라는 성격을 지닌다. ‘세계화’는 자본에 의해 전개되었다는 점은 기존의 자본주의론에서도 충분히 논의된 바 있다. 다만 기존의 자본주의론에서는 ‘체계로서의 성(性)’을 체계적으로 누락시키고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구적 차원의 지역, 지역적 차원의 지구라는 역동성을 내포한 지구지역적 체계와 그 속에서의 현실과 주체들에 의한 운동에서 결정적 한계를 지닌다. ‘지구지역’도 중요한 분석적 개념으로 사용하는 가부장체제론으로 자본주의를 본다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체제의 역동성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생산력에 의한 세계적 수준에서의 착취와 전유체계를 탈환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바로 기존의 자본주의론에서 확장된 개념으로서 제국주의론이 지닌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다섯째, 가부장체제로 세계로 본다는 것, 즉 자본주의를 가부장체제의 일부로 본다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항해야 할 지점들이 단지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관계를 축으로 하여 자본이 은폐하고 있는 그늘 속의 자본관계와 자본생산력들, 특히 ‘체계로서의 성(性)’ 지배관계에 폭넓게 걸쳐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여섯째, 동시에 기존의 자본주의론에 의하여 자본주의에 대항할 세력들로 협소한 ‘자본주의적 계급관계 내의 노동자’로 설정된 주체들뿐만 아니라 ‘여성’이라는 인간 종, 그리고 ‘자연’이라 불려온 것, 즉 자본에게 일방적으로 전유되고 있는 생산력들이 자본주의에 대항할 세력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곱째, 가부장체제론은 성(性)체계가 정치경제 체계와 구조적으로 융합되어 움직인다는 점과 함께 그것이 지구지역(glocal)체계적으로 융합되어 작동한다고 본다. 따라서 가부장체제는 ‘세계체제’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규명은 지금까지의 세계를 보는 철학이나 이에 대항할 운동의 전환이 필수적임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6.
가부장체제론의 견지에서 페미니즘적 자본축적론에서는 기존의 자본주의적 상품생산과정을 가부장체제적 생산과정으로 재설정한다.
가부장체제적 생산과정은 첫째, 인간을 생산하는 여성의 출산력을 위시한 여성의 생산과 생산력, 여성의 노동력과 노동을 명시하는 생산과정으로서 생산의 총 과정을 상정한다. 둘째, 자연의 노동과 생산이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통해 자본가계급에게 독점적이고 배타적으로 전유되는 점을 자본의 생산과정에 명시화함으로써 여성과 함께 대타자(Other)로 거듭나게 된 자연의 생산력을 상정한다. 셋째, 자연의 노동과 생산을 자본이 전유하는 데는, 인간 종 전체의 공모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 상정된다. 자본은 인간 남성-여성 관계를 경유하여 자연의 노동과 생산을 전유한다. 자연과의 관계는 인간중심주의적 자연관과 사유재산제도, 그리고 인간사회 내 위계적 성체계를 이용하여 대타자 자연의 생산력 전유를 인간 사회의 규범적 윤리로 확립하고 정치경제 원리로서 정착시킨 가부장체제적 관계이다. 넷째, 전 지구를 무대로 한 세계적 수준에서 구체적인 지구지역적 수준에서, 그리고 국가적으로, 가부장체제적 생산이 진행되고 있음을 상정한다. 가부장체제적 자본의 총과정은 <그림10>과 같이 상정될 수 있다.

<그림1>은 인간생산과정과 상품/자본의 생산과정 및 유통과정을 포괄하여 가부장체제적 자본의 총과정을 보여준다.
<그림1>의 (가)는 인간생산과 유통의 총과정이고, (나)는 상품생산과 유통의 총과정이다.13
(나)의 과정은 (가)의 과정 없이 진행될 수 없다. (나)에서 M(화폐)과 C(노동력, 생산수단)가 교환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미리 상품으로서 사회적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난제는 이른바 시초축적(원시적 축적)이라 명명된 과정이 담당하여 해결해주었다.

<그림1> 가부장체제적 자본의 총과정



시초축적은 여성과 자연의 생산력을 자본주의적으로 몰수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고, 자본주의 초기 난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자본의 축적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나)의 C(노동력, 생산수단)를 공급하는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초축적은 자본의 시초적 계기임과 동시에 계속적 축적의 계기이기도 하다.

<그림1>의 (가)는 자본주의적으로 축조된 인간생산과정이다. 이것은 (나)의 과정이 선도하여 주조해낸 오늘날의 현실을 더욱 잘 반영하고 있다. (가)를 은폐시키면서 (나)의 과정의 일부로 자본의 총과정을 정식화한 마르크스주의 자본주의론은 자본의 총과정을 공고화하는 데 일조한 것으로 볼 여지는 없는가. <그림10>으로 돌아가 살펴보자. 첫 번째로 인간생산은 자본 생산의 출발점이다.

<그림1-가> 인간생산과정



여성이 자본의 생산과정에 투입될 노동력을 생산한다. 인간생산과정은 난자와 정자의 합체과정으로서 교접노동과정, 여성 신체에의 착상과 임신노동과정, 출산노동과정, 그리고 육아/보육 노동과정을 통과한다. 인간생산 기간은 <그림1>의 (가)에서 F로 표시되어 있다(그림 1-가). 남녀간 교접에서부터 새로운 인간 개체의 생산인 출산을 거쳐 유소기14를 경과하여 취업에 성공할 때까지의 기간이 인간생산기간이 된다. 이 기간 동안 인간생산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노동과 그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력이 있을 것이다. 이 인간생산기간 동안 투입되는 노동력은 사용가치와 가치를 지닌다. 인간생산에 투입되는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인간생산을 위해 필요한 다양한 종류의 구체적인 노동들에 의하여 규정된다. 섹스행위에서부터 임신, 출산, 보육, 가사, 돌봄 같은 노동들이 그것이다. 인간생산에 투입되는 노동력의 가치는 인간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상품생산은 자본의 신체 생산이다. 이미 여성에 의해 생산되어 상품으로 시장에 나온 노동력과 자연에 의해 생산되어 인간을 매개로 채취/가공되어 시장에 나온 생산수단(노동수단 및 생산설비와 원료)을 구매한 자본가(화폐소유자)가 새로운 상품의 생산과정을 개시한다. 상품생산기간은 <그림1>의 (나)에서 P로 표시되어 있다.

이 기간 동안에 투입되는 노동력에 의한 노동과정이 시작된다. 이 노동과정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과 노동수단 및 생산설비와 원료를 소비함으로써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낸다. 자본가는 상품의 생산을 조직하는 조직자이고 노동을 감독하고 지휘한다. 노동자는 자본가의 감독과 지휘 아래 상품을 직접 생산한다. 이 생산과정에 투입된 노동력은 사용가치와 가치를 가지며, 그 사용가치는 갖가지 질적으로 다른 상품들에 체현되는 구체적인 노동들에 의해 규정되고, 그 가치는 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그림1-나> 가부장체제적 상품생산과정



상품생산 요소로 투입되는 노동력과 생산수단(노동수단, 설비, 원료)을 공급하는 원천이 인간생산이라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생산수단의 경우에도 이미 상품노동력에 의해 생산된 상품이므로 인간생산과정이 생산수단 공급의 원천적인 규정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본의 생산에서 (가)인간생산과 (나)상품생산의 과정은 서로 얽혀 있다. 이 얽힘을 분리해온 장치들로서 M/W=N 철학, 전쟁과 노예화, 일부일처제와 사유재산제도, 과학기술, 그리고 국가가 있다.

얽혀 있는 지점은 첫째, 노동력 가치 측면이다. 인간생산에 투입된 노동력의 가치가 상품생산과정에 투입된 노동력의 가치와 연결되게 되고 동시에 생산수단의 가치와도 연결되게 된다. 둘째, 자연으로서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얽힘이다. 노동력과 생산수단으로의 양분화는 여성과 자연을 분리한 결과 자연은 생산수단화되고 인간/여성은 노동력화되었다(<그림2> 참조). 그 결과 모든 것의 생산의 배후에 노동자가 아니라 여성이 있게 되었다.

<그림2> 인간생산과 상품생산의 연결: 장치와 회로



상품생산과 유통을 축으로 한 세계의 축조는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이 밝혀온 바대로 살육과 약탈에 기초한 체계이다. 이 세계는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피와 오물을 뒤집어쓰고 나온 자본주의’라기 보다는 차라리 ‘지옥의 아가리’15
이다. 상품세계의 ‘평등한 등가 교환’의 이면의 불평등과 억압은 자본에 의해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그것을 숨길 수 없이 드러내는 것은 상품 그 자체이다.
상품생산 영역에서의 상품 가치 분석에서 마르크스가 통찰한 바를 인간생산의 영역에 적용함으로써 상품의 가치를 분석하는 것이 분석의 출발점이다.

생산된 상품의 가치16는 생산수단의 가치(불변자본c)와 노동력의 가치(가변자본v), 그리고 잉여가치(c)로 구성되어 있다. 노동력은 인간생산과정의 생산물이다. 그렇다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는 <그림3>와 같이 설정할 수 있다.

<그림3> 노동력 상품의 가치 재설정



본 논문이 제기하는 <그림3>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를 ‘노동력 재생산비’가 아니라 다른 상품들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생산수단(c)과 노동력(v) 그리고 잉여가치(s)의 합으로 정의하여 설정한 것이다. 모든 상품들의 생산이 이미 만들어진 상품들(노동수단, 설비, 원료, 노동력)에 의한 것임과 마찬가지로 노동력 상품도 역시 이미 만들어진 상품들에 의해 생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생산과정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인간생산에 필요한 정자와 난자, 생활공간, 생활 물자들, 그리고 여성의 노동력이 모두 상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17

지금까지 여전히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노동력 재생산비’ 혹은 ‘노동자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생활물자의 가치’로 마르크스처럼 설정할 경우, 노동력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력과 그 노동이 사장되어 버린다.18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노동력 재생산비’로 설정하는 것은 또한 노동력의 생산 자체를 가치정식에서 배제시키고 자연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력의 가치는 대폭적으로 그 가치 이하로 산정되게 되고, 심지어 무가치화된 것이다.

<그림3>는 노동력 상품의 가치가 일반 상품의 가치에 비해 투입가치(c+v)는 2배, 잉여가치는 3배에 달하는 가치임을 보여준다. 일반상품의 가치 정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노동력 재생산비’ 수준에서 ‘노동자 생활비’ 명목으로 거래되는 노동력 상품에 대한 이와 같은 불공정 거래가 ‘평등한 등가교환’이라는 이름 아래 오늘날까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한편 <그림3>에서 보이는 노동력 상품의 가치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상품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은 어떤 사회에서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평균 노동시간을 의미한다. 일반상품생산에 투입되는 노동력이건 인간생산에 투입되는 노동력이건 그 노동력의 가치는 마찬가지로 측정되어야 하고 측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생산과정에 투입되는 노동력 가치는 인간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될 것이다. 오늘날은 모태생식의 시대이므로 임신에서 출산까지 9개월을 인간생산기간이라고 볼 때, 그 기간 중에 수행되는 노동에는 임신과 출산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노동들이 포함될 것이다.

그런데 일반상품 생산과정을 들여다보면 작업장에서 어떤 한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공정마다 노동자들이 작업을 분담하고 있다. 작업장에서의 이런 노동 분업은 품목의 완성을 목표로 한 협업의 과정이다. 이와 달리 인간생산과정에서 분업은 없다. 작업자는 인간생산과정에서 필요한 의식주 생활의 모든 노동을 전담한다. 인간생산과정에서는 작업의 각 계기들과 분야별로 다른 노동과정과 다른 노동들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의 노동과정을 통틀어 노동력의 사용가치가 총체적으로 소비된다. 일반상품생산과정에서는 ‘구상과 실행의 분리’라거나 ‘노동의 파편화와 분절’(H. 브레이버만)이 문제되는 동안 인간생산과정에서는 ‘집에서 밥이나 하는 주제에 ......’ 라거나 ‘애 제대로 안 키우고 뭐 했어!’ 라는 식으로 문제되었다. 일반상품 생산과정은 이윤생산이라는 뚜렷한 목적 아래 사회적 조직화 과정을 통한 엄격한 분업과 협업으로 ‘임금노예’(K. 마르크스)적 노동이 진행되는 동안 인간생산과정은 사랑이라는 명목 아래 끊임없는 헌신이 요구되는 노예적 노동이 진행된다.19 이것은 ‘19세기에 탄생한 전업주부’(S. 페데리치)와 21세기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식민화와 가정주부화’(M. 미즈)가 여성을 인간생산 영역에 전적으로 묶어두고 전담하게 한 결과물이다. 이것은 또한 ‘비자본주의 영역’(R. 룩셈부르크)에 여성을 가두어두고 ‘임금노예’가 아닌 그냥 노예로 거래 대상화한 역사(Histoy)의 결과이다. 자본주의적 의미에서 최대의 황금알인 잉여가치를 낳는 상품으로 노동력 상품이 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노동력 가치가 <그림3>의 [A]라고 할 때 노동력 가치를 초과하는 가치(s/v)인 잉여가치는 <그림4>과 같이 된다. 노동자 1인의 노동력을 구매하는 데 필요한 가변자본 v는 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에 의해 측정된다. 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은 인간생산기간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이고, 인간생산기간 동안에 소요되는 모든 생활물자의 가치로 환산될 수 있다. 이때 본 논문에서 노동력 생산은 인간자체생산(출산)을 의미하는 것이지, 기존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노동력 재생산(하루생활)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식은 다음과 같이 될 수 있다.

<그림4> 인간생산과정-상품생산과정의 잉여가치



만일 가변자본 v가 1이라면 잉여가치율이 100%라고 할 때 1.5의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상품생산과정에서도 1의 가치를 가진 노동력은 노동함으로써 자신의 노동력을 소비하고 생산수단을 소비하면서 자신의 가치 1뿐만 아니라 잉여가치 1.5를 생산한다. 상품생산과정에서 노동자가 생산하는 ‘가치생산물’은 총 2.5이다.20
<상품의 가치(C) = 생산수단의 가치(c) + 노동력의 가치(v) + 잉여가치(s)>이므로, 생산수단의 가치 c가 3이라면 상품의 총 가치는 3+1+2.5=6.5가 된다.
자본가는 상품 불변자본c에 3, 가변자본v에 1을 투입하여 6.5의 가치를 생산하고 이를 전부 자신의 소유로 전유하는 계급이다. 당초 생산수단과 노동력 구매에 투입된 화폐를 소유하고 있던 이 계급은 노동자에게 1을 임금으로 지불하고 ‘본전’인 3을 챙긴 다음 2.5의 새로운 가치를 취득하게 된다. 이것이 자본의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다.21

<그림5>는 이 과정을 상품생산의 총과정으로 보인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상품생산 원료 생산이 생산1, 생산2이고, 상인자본에 의한 약탈과 몰수를 기초로 한 원료의 <판매1> 및 인간에 의한 인간생산과정의 산물인 노동력의 <판매2>, <판매1,2>의 <구매1,2>를 통해 일반상품 생산과정을 시작하는 산업자본가에 의한 최종 <판매3>을 통해 초기 투입화폐 M보다 ▲M 만큼 더 많은 양의 M을 취득하는 과정이다. ‘판매를 위해 구매’하는 자본의 상품구매 원칙과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생산과정에서 소비함으로써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주어진 조건’은 상인자본에 의한 약탈과 인간생산에 대한 자연화이다. 그 바탕 위에서 외관상 ‘평등한 등가교환’이 성립한 것이고, 따라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은 부등가교환에 기초한 등가교환이라는 모순을 본질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림5> 페미니즘적 자본축적의 총 과정



그리하여, <그림5>의 구조에 기초하여 자본생산과정으로서 잉여가치 생산이 이루어지는 메커니즘을 살펴보면 <그림6>와 같다. 자본의 생산은 인간생산과정과 자연생산과정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며, 인간 노동력의 공급과 자연의 생산물 공급을 필수요건으로 한다. 따라서 확대된 규모에서의 자본의 생산, 즉 축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인간생산력과 자연생산력의 증대와 확대된 공급이 필수적이다. 자본에게 노동력은 자연생산물과 마찬가지로 상품생산의 원료에 불과하며, 가급적 원료비가 적게 들어가는 것이 최소비용으로 최대이윤을 획득하는 길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극도의 최소비용 방법은 원료를 무상으로 취득하는 것이다. 자연에게서 원료를 무상으로 취득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사유재산제가 자본주의적 생산에 반드시 필요한 이유였고, 인간에게서 원료를 무상으로 취득하기 위한 방법이 인간생산 자체를 자연화하는 것이었음은 이로써 명백해졌다.

<그림6> 페미니즘적 자본축적론에서 잉여가치 생산의 메커니즘



여성은 인간이되 고대 노예제 이후 인간생산을 제외한 생산의 일반적 구조 속에서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노예가 인간이 아니었듯이 마르크스에게서도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 자연의 생산을 분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성의 언어로 여성의 생산을 분석할 수 없었던 듯이 마르크스는 자본의 생산과정에서 여성의 노동을 노동이라 볼 수 없었고 따라서 잉여가치 생산 역시 자연화된 여성의 잉여가치 생산을 제외한 채 분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본생산 메커니즘을 그 내부에서 모순이라고 인식한 것이 룩셈부르크이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의 자본생산 메커니즘 내부에서만 그 사실을 인지했다. 룩셈부르크가 그 모순을 해결한 방식은 ‘비자본주의 영역’을 설정함으로써 이다. 룩셈부르크의 ‘비자본주의 영역’은 룩셈부르크가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자연과 여성을 포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룩셈부르크는 식민지라는 영역을 자본에 의한 상품생산 원료 취득지로서 명시한 데 그쳤다. 영토적 의미와 정치경제적 의미를 모두 포괄하는 의미에서 여성을 ‘비자본주의 영역’으로 설정할 수 없었던 것은 룩셈부르크의 불행이자 자본 생산의 구조 분석이 불충분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자본의 생산과 실현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고찰할 차례이다.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이 인간의 생활수단과 상품의 생산수단의 생산부문으로 구분된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자연생산물의 가치(이것은 화폐화되기 이전에 자연으로부터 약탈의 결과물이므로 부르는 것이 값인 상품으로서 노동대상이 된 것의 가치) + 생산수단 생산부문에서 형성된 가치(c+v+s)>이다. 생활수단의 가치 역시 생산수단의 가치와 마찬가지의 가치를 가진다. 생산수단이나 생활수단이나 모두 이미 생산되어 상품으로 출시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자본을 직접 생산하는 노동력의 가치는 <인간생산물의 가치(이것도 역시 자연과 마찬가지로 화폐화되기 이전에 여성으로부터 약탈의 결과물) + 생활수단 생산부문에서 형성된 가치>로 구성된다.
생산수단과 생활수단 양쪽의 생산과정에서 투입되고 생산되는 가치들은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다.
c: 생산수단의 가치= 기계/설비, 원료의 가치. 상품의 가치에 이전되는 부분
v: 노동력의 가치= 인간생산노동력의 가치 + 개인노동력을 유지재생산할 수 있는 생활물자들의 가치
s: 잉여가치= 상품의 총가치-노동력가치

기존의 상품생산 정식에서 v와 s로만 표기됨으로써 빠져 있던 자연과 인간의 생산 과정이 포함될 때, 가변자본에 할당되는 자본부분과 생산되는 잉여가치는 다음과 같이 3 부분으로 구성된다.
v1, s1: 노동대상들(자연물)의 가치와 잉여가치
v2, s2: 인간생산노동(임신, 출산)의 가치와 잉여가치
v3, s3: 상품생산노동의 가치와 잉여가치

<그림7> 페미니즘적 자본축적론에서 잉여생산물의 전유와 잉여가치 생산의 구조



<그림7>은 잉여가치 s1,s2,s3를 투입노동력의 가치에 포함하여 보인 것이다. 수렵과 채집이 자연으로부터 인간(남,녀)에 의해 무상 약탈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본원적으로 인간의 생존을 위해 자연을 무상약탈한 것을 인간 사회로까지 확장하여 여성을 자연으로 간주하고 여성의 생산물을 남성이 무상 약탈하는 것을 자연적 과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지는 인간 역사(History)가 증명했고, 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페미니즘이 증명한다. 페미니즘은 일단 자연과 인간을 History와 마찬가지로 구분하고 차별했다. 그러나 곧 그것이 부당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남성은 자연에 대한 약탈을 여성에 대한 약탈과 동일시함으로써 부당함을 정당화해 왔고, 거기에 기초하여 창조한 세계가 자본주의 세계이다. 이것을 원점으로 돌릴 필요는 이미 없어졌다. 이제는 이미 모든 것이 상품으로 거래되고 상품으로 생산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상품에 의한 상품생산 시대에는 이미 무상취득이라는 약탈이 필요불가결한 요소는 아니다. 약탈은 부차적으로 필요할 뿐이다. 상품생산에 의한 상품생산의 원천이 고갈되었을 때가 바로 약탈이 다시금 창궐하게 되는 그때이다. 자본을 위한 자본 생산, 축적을 위한 생산은 이미 화폐의 독재와 전제가 시작된 때였다. 화폐로 모든 것을 취할 수 있는 화폐 만능의 시대에 독재자는 화폐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화폐는 노동한 결과물의 상징일 뿐이다. 노동하는 존재 없이 화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자연생산과정과 인간생산과정을 전제로 하여 자본이 생산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축적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자본가에 의한 ‘생산적 소비’에 의해 이루어진다. 자본가에 의한 ‘개인적 소비’는 자본가 계급의 생활수단 구매이다. 물론 이 생활수단의 직접 생산자는 임금노동자이다. 자본가의 ‘생산적 소비’는 자본생산과정을 다시금 전개하는 것이다. 자본의 재생산과정의 시작이 자본가의 ‘생산적 소비’의 시작이다. 그런데 자본가의 개인적 소비는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와 같은 맥락에 있다. 자본가건 노동자건 생활수단의 소비는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생활수단 생산부문은 자본가와 노동자 양쪽의 소비행위에 의해 부흥한다. 생활수단 생산부문의 부흥은 생산수단 생산부문의 부흥을 가져온다. 생활수단을 생산하기 위한 생산수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룩셈부르크의 통찰처럼 시장이 충분히 전제되어야 확대된 규모에서의 생산은 지속될 수 있다. 생산수단과 노동력과 시장이 지속적으로 확대된 규모에서 존재한다는 조건하에서 자본(주의)의 확대재생산이 가능하다. 이것은 노동력의 생산 즉 인간생산과 자연의 생산이 자본의 필요에 걸맞게 지속적으로 확대재생산될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자원 고갈’이 문제되고 ‘재활용’이 유행하게 된 이유와 ‘저출산’이 문제시되는 근원이 이러한 축적의 조건 문제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3D 프린터와 복제기술이 인간생산의 조건에 도전하고 있는 것과 자본 축적의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22 자본축적의 조건을 조성할 때 자본은 폭력과 식민화/노예화의 길을 걸어왔다. 주된 방법은 ‘자연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 못하는 ‘자연’에 여성을 포함시켜 지배하는 도구가 여성에 대한 교육의 문을 잠근 것도 우연한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 초기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중요하다.23 오늘날 여성의 교육기회를 포함하여 자유주의적 권리가 확대되고 재산분할도 가능하게 된 것은 약 4세기에 걸친 여성들의 투쟁의 결과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자연은 여전히 폭력과 식민화의 대상에 그대로 묶여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논리에서 자연은 더 이상 ‘인간생존의 신진대사’라기보다는 이제는 이윤 생산을 위한 신진대사를 하고 있을 뿐이다.
자본의 축적은 ‘잉여가치를 자본으로 사용하는 것, 즉 잉여가치를 자본으로 재전환시키는 것’이다. 24

<그림8>은 생산된 잉여가치의 실현과 축적을 보여준다. 상품생산과정에서는 노동력에 의해 자연 및 여성의 생산물들의 가치가 상품에 이전되고 또한 투입된 노동력에 의해 잉여가치 생산이 이루어져 상품체의 형태로 있는 상태이다. 시장에서 상품의 판매를 통해 화폐로 전환에 성공했을 경우는 잉여가치가 화폐로 실현된다. 이렇게 생산되어 실현된 잉여가치(▲M)는 확대재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 생산과정에 재투입될 자본과 자본가계급의 소득 혹은 수입으로 분할된다. 확대된 규모의 생산을 위해 자본으로 투입되는 부분은 생산수단(mp)과 노동력(lp)의 구입 부분이 되며, 자본가의 수입(소득)은 자본가의 개인적 소비와 자본가계급 내부의 소득으로 분할된다.25 토지 소유자에게 지대가, 금리생활자에게 이자가, 그리고 기업가에게 이윤이 배분된다.

<그림8> 실현된 잉여가치의 분할과 자본의 축적



‘확대된 규모에서의 자본의 재생산’인 축적과정에서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형태로 추가되는 추가자본은 ‘자본화된 잉여가치’이다. 해당 생산과정에 투입된 노동력에 의해 생산되고 이전된 것일 뿐만 아니라 자연과 여성의 생산력으로부터 약탈한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이 설령 등가교환의 외양을 띤다고 하더라도 ‘피정복자로부터 약탈한 화폐로써 피정복자 자신의 상품을 구매26하는 방식의 등가교환일 뿐이다.
그런데, 자본의 확대재생산은 한편으로는 자본과 임금노동의 확대재생산임과 동시에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확대재생산이라고 마르크스는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외양에 불과하다. 자본의 확대재생산은 자연생산력의 끊임없는 약탈과 여성생산력의 부단한 억압 속에서의 부당한 전유를 확대재생산한다. 이러한 축적관계에서 명백한 것은 자본가가 몰수해서 전유하고 있는 여성과 자연의 생산력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채 자본에 의하여 전유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과 여성의 생산력을 전유하는 정복자적 과정을 상품과 자본 분석과정에서 제외한 마르크스는 축적과정에서 ‘상품생산의 소유법칙이 자본주의적 취득법칙으로 전환’한다고 규정하였다. ‘상품생산의 소유법칙’은 상품소유자들이 각기 자신의 상품 소유자로서 등가교환하는 관계인데, 축적과정에서 추가되는 자본은 상품등가교환에 따른 소유법칙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취득되는 잉여가치에 의한 것이라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취득법칙’이라고 부른 것은 축적의 재원인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의 생산물이 자본-임노동 관계와 메커니즘에 의해 자본가계급이 무상으로 취득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노동’은 마르크스에게서 임금노동자의 노동을 의미할 뿐이고 ‘타인노동의 일부를 아무런 등가물도 지불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취득하고, 그것을 보다 많은 양의 살아 있는 타인노동과 교환’하며, 상품교환의 소유법칙 속에서는 ‘소유권이 한 인간의 노동력에 기초한 것처럼’ 보였으나 이제는 자본가가 ‘타인의 부불노동 또는 그 생산물을 취득하는 권리’가 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취득법칙’에서 ‘타인의 부불노동 전유’의 가장 큰 덩어리를 제외한 채 분석한 것,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타인의 생산물’에 대한 전유는 상품생산과정의 반복적인 지속과 확대과정에서가 아니라 이미 여성의 노동과 생산력에 대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임을 자연적 과정으로 둔 채 방치한 것,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자본생산과정에 투입되는 임금노동력의 가치를 생활수단의 가치로 치환한 것이 마르크스적 의미의 축적론이다.
그러나 ‘타인의 부불노동’에 대한 전유과정은 여성의 생산력에 대한 자본주의적 취득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식민지 정복전쟁을 통하여 자연-여성-인종을 식민화하여 축적을 위한 자원으로 만든 과정이 축적론에서 사장된 문제는, 룩셈부르크가 ‘비자본주의 영역’을 설정함으로써 자본이 축적을 위해 식민지를 통하여 노동력-생산수단-시장을 확보한 것을 분석함으로써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여성의 생산력을 통제하고 전유하는 데 대한 분석의 공백 때문이다.
여성/자연의 생산력을 자본주의적으로 전유하는 것을 통하여 축적을 계속해온 오늘날 자본은 그 기반으로 삼아온 ‘성(性)’을 좀 더 확실하게 자본축적의 근간으로 올려놓고 있다. 인간 사회에서 ‘성’을 통한 위계와 부계 중심의 소유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구축해온 역사(History)는 자본의 축적에 최적의 조건으로서 지속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식민지’가 공간적 개념일 뿐 아니라 정치적인 개념으로 진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성’의 지배구조 역시 여성이라는 신체적 특성으로 구조화되는 공간적 개념을 넘어 ‘성’이라는 정치적 개념으로 진화하여 자본에게 노동력-생산수단-시장뿐 아니라 감정과 정서를 포함하는 인간생활의 모든 축적요소를 아우르고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축적의 구조는 인간생산관계(그리고 자연생산관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관계에 내재되어 있는 이러한 무상노동의 토대를 모두 포괄할 때, 가부장체제적 경제 구조 속에서 그 일부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경제가 구축되어 굴러가고 있음이 명백해진다. 자본주의 경제는 성체계와 지구지역체계 속에서, 가족과 국가를 통해 여성과 자연의 생산력을 전유하고 있고, 가족과 국가, 그리고 가족과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일체의 제도들과 관습 및 전통들이 자본주의적 정치경제를 뒷받침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그리고 ‘자연’에 대한 자연화(익명화)와 평가절하는 자본축적에 핵심적이고 사활적인 요인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본축적의 필수관건인 ‘임금노예제’를 유지하고 재생산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무상노동의 기반이 되는 자원들에 대한 지배를 안전하게 보장하는 최대의 요인이기 때문이다.


7.
본 논문에서 수행한 페미니즘적 자본축적론 연구는 여성과 자연의 생산력에 대한 자본주의적 전유 없이 자본축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논점으로 한다. 이것은 마르크스와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에 대한 검토와 페미니즘의 여성 및 자연에 대한 노동과 생산 개념의 재설정을 기반으로 한다. 본 논문은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인해 발생한다고 간주되는 사회적 모순들과 사회적 불평등이 기실 상품생산과정에서의 노동착취에 기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상품생산과정에 투입되는 임금노동자를 생산하는 여성의 생산과 노동에 대한 전유에 기반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더불어 같은 맥락에서 자연의 생산력을 생산수단으로서 약탈적으로 자원화 하는 것에서 여성의 생산과 노동에 대한 자본주의적 전유과정도 정당화되어 온 점을 살펴보았다. 본 논문은 자본주의적 축적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약탈과 인간에 의한 자연의 약탈과정에 다름 아닌 불편부당한 구조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이러한 부당한 구조에 대항하는 사회운동들은 상품생산과정에서의 노동문제뿐만 아니라 여성의 역사(History)적 축조과정과 여성생산력에 대한 착취 메커니즘, 그리고 ‘생태위기’의 근본원인으로서의 자본축적 문제를 모두 고려하는 운동으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는 논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사회운동들이 직면하고 있는 과제들이 이제까지의 마르크스주의(적-노동운동), 생태주의(녹-생태환경운동), 페미니즘(보라-여성운동) 각각의 패러다임으로는 투쟁이나 조직 그리고 주체의 측면에서도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갈 전망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현실인식에 따른 것이다. 또한 1990년대 초반부터 한국에서는 노동운동의 ‘위기논쟁’이 반복적으로 지속되어 왔고, ‘운동의 위기’ 진단이나 몇 가지 사후적인 대증 처방으로는 ‘위기’가 반복되면서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과 2010년대 들어서는 논쟁 자체도 이미 실종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상황의 심각성이 있다.
본 논문은 마르크스의 가치분석이 여성의 인간생산능력(출산력)을 포함한 여성의 생산력을 제외함으로써 자본축적구조를 해명하는 데 극히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고 논하였다. 또한 본 논문은 지금까지의 자본축적론이 자연을 자연화한 바탕위에서 여성의 노동을 자연화 함으로써 자연생산력과 여성생산력에 대한 자본과 남성(Man)의 전유를 정당화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페미니즘의 논의들을 검토하면서 주장하고 마르크스와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을 수정하여 ‘페미니즘적 자본축적론’을 제시하였다.
본 논문의 한계는 첫째, 자연의 생산력에 대한 가치분석의 어려움에 있다. 이를 위해서 현재로서는 세계적 수준의 자본축적과 생태파괴의 인과관계를 규명하거나, 더 우회하여 세계적 수준에서 산업생산에 투입된 자연생산량의 규모와 정도에 대한 역사적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둘째, 여성의 생산력과 자본의 축적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수행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들은 이후의 연구를 통하여 수행되어야 하는 과제이다.



*주

1. 일례로 레오뽈디나 포르뚜나띠(Leopoldina Fortunati, 1981)는 가사노동의 잉여가치 생산 구조를 노동력 상품을 거래하는 가변자본과 가사노동의 교환과 가변자본과 매춘노동의 교환을 축으로 하여 분석하면서, 자본주의적 남성/여성 관계는 개인적 관계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이며 남성에 의해 매개되는 여성과 자본 간의 교환임을 밝히고 있다(레오뽈디나 포르뚜나띠, <재생산의 비밀>, 박종철출판사, 1997).

2. 페미니즘의 역사는, 성과 노동, 성과 계급, 성과 가치,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같은 범주들을 둘러싼 발견과 재설정과 논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고정갑희, <페미니즘의 역사: 발견, 재설정, 논쟁의 성정치>(한국프랑스학회 발표문, 2007)를 참조.


3. 이 논의와 관련해서는 실비아 월비(Sylvia Walby)의 <가부장제이론>(Theorizing Patriarchy, 1990) (유희정 옮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6)를 대표적으로 참조할 수 있다.

4. ‘M/W=N’이라고 쓰고 ‘남성이 여성을 자연화하여 지배한다’고 읽는다. 서양의 이분법적 철학전통과 유럽중심 자본주의의 지배전략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등식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호주의 생태주의자이며 에코페미니스트인 Ariel Salleh(1997)의 논의를 대표적으로 참조할 수 있다(Ariel Salleh, , Zed Books Ltd., London & New York, 1997).

5. ‘모 아니면 도’라고 읽을 수 있는 디지털 과학기술의 ‘1/0 논리’를 남성과 여성에 적용하여 세계에 적용하는 남성중심적 패러다임의 대표적인 플렛폼이라고 할 수 있다.

6. 이와 관련해서는 마리아 미즈(Maria Mies),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Patriarchy and Accumulation on a World Scale, 1986/1998), 최재인 옮김, 도서출판 갈무리, 서울, 2014를 대표적으로 참조할 수 있다.

7. 노동과 생산의 개념 확장과 관련해서 기존의 페미니즘에서 제기된 논의들을 뛰어 넘어 ‘성노동’ 개념을 통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 논의는 고정갑희의 <성이론>(도서출판 여이연, 2011)이다. 고정갑희는 노동을 ‘인간생산노동’ ‘쾌락생산노동’ ‘가사노동’ ‘상품생산노동’ 등 네 가지로 범주화한다.

8. 이 점에 대해서는 하이디 하트만(Heidi Hartmann, 1981)을 참조(H. 하트만,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론의 불행한 결혼: 보다 발전적인 결합을 위하여>, [여성해방이론의 쟁점 - 사회주의 여성해방론과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 하이디 하트만 / 린다 번햄 외, 김혜경 / 김애령 옮김, 도서출판 태암, 서울, 1989).

9. 고정갑희는 “지금까지 체제론으로는 자본주의체제, 독재체제, 세계체제, 분단체제, 냉전체제 등이 있다. 독재체제는 민주화운동을 불러왔고, 자본주의체제는 반자본운동, 계급철폐운동, 노동/노조운동을 불러왔다. 세계체제는 아직 구체적으로 운동을 불러온 상태는 아닌 것으로 보이고, 분단체제는 평화-통일운동을 불러왔고, 냉전체제는 탈식민과 전쟁반대를 불러왔다. 체제론과 관련하여 가부장제가 아니라 가부장체제라는 개념을 사용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운동의 방향성을 복잡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방향을 재설정하기 위함이다”라고 논의하면서 현재를 ‘가부장체제의 (세계화) 시대’라고 정의한다. (고정갑희, <가부장체제적 세계화 시대의 페미니즘과 글로컬 액티비즘>, 한국여성학회 발표자료, 2014, p.3.)

10. 고정갑희, <가부장체제와 적녹보라 패러다임>,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와 좌파의 대안], pp.100-109, 한울, 2013)

11. 고정갑희, <가부장체제적 세계화 시대의 페미니즘과 글로컬 액티비즘>, 한국여성학회 발표자료(2014) 참조.

12. 고정갑희, <성이론>, 도서출판 여이연, 2011.

13. <그림8>에는 자연의 생산과 노동의 과정이 드러나 있지 않다. 자연의 노동과 생산 과정을 다루기 위해서는 별도의 분석방법론이 필요할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자연의 노동과 생산의 결과가 자본에 의해 제도적으로 전유되고 있는 점만을 다룬다.

14. 이 ‘유소기’ 표기는, 성별화에 의한 소년/소녀 때문에 쓰게 되었다. 따라서 이 표기는 소녀와 소년 둘을 다 표기하기 위한 것이다.

15. Domingo de Santo Toma's, , Audiencia de Charcas, Sevilla, p.313(엔리케 두셀, <1492년 타자의 은폐>, p.71에서 인용).

16. 여기에서 가치(value)는 마르크스가 정의한 ‘추상적 인간노동의 응결물’로서, ‘인간노동의 계속시간’으로 측정되므로 ‘어떤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표현된다.

17. 인간생산에 투입되는 여성의 노동력이 상품이라는 사실이 인간생산여성노동력의 직접적 시장-화폐거래가 아니기 때문에 훼손되지 않는다. 여성의 노동력은 인간생산노동과정에 선행되는 결혼시장이나 혼수시장 등에서의 상업적 거래관계에 의하여 상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상거래가 일반화되기 이전에 이미 거래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까지 ‘지참금 살해’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예일 뿐이다. 인간(남성)의 노동력이 상품이 되기 이전에 노예 거래와 ‘여성 거래’(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있었다. 오늘날 노예 거래 형식은 쇠퇴하였으나 여성 거래 형식은 현대화를 거듭하며 계속되고 있다. 여성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전체로 ‘사회적 관계 속에 내재된 방식’으로 거래되고 있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경제는 독립된 영역으로 존재하지 않고 사회적 관계 속에 내재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P. Bourdieu, , trans. R. Ni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77, pp.171-172. 데이비드 그레이버,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서정은 옮김, 그린비, 서울, p.83에서 인용).

18. ‘재생산 노동’의 경우 상품노동시장에서는, 노동력이 상품으로 시장에 나가기까지 키워주는 역할로서의 가사노동만을 문제 삼을 뿐이다. 이것은 그래서 문제이다. 그 노동력을 상품으로 내기 위해서는 그 노동력 소유자인 인간 그 자체를 누가 어떻게 생산하는지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 본 논문의 논지이다.

19. 인간생산노동자의 하루 노동시간은 24시간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직업’이라는 인터뷰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zOQEbDU9e HA이 그 실상을 잘 보여준다.

20. 이러한 계산은 자연의 생산에 대해 침묵하는 한 계속된다. 생산수단에 투입되는 자연의 생산물은 여전히 노동하지 않는 객체의 위치에 두어진다. 이것은 ‘상품’ 생산과 ‘상품’을 둘러싼 가치평가를 계속하는 한 지속될 것이다. ‘상품’은 ‘인간노동의 산물’이라는 제약이 여전히 통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품’은 ‘상품화’ 과정을 통해 ‘여성’을 상품거래 대상으로 삼은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을 상품거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자연’에 대한 ‘상품’ 개념의 제약 역시 이미 소멸한 상태이다.

21. 자본의 상인적 생산과정은 정복, 약탈, 노예화, 강간, 살인 같은 수단이었음은 이른바 시초축적과정이 잘 보여준다. 자본주의적 방법은 상인적 방법으로 노예화하여 자원화시킨 것을 ‘합법’과 ‘합리’로 둔갑시킨 것에 불과하다.

22. 자본주의가 궤도에 올라 대공황을 겪은 시기인 20세기 초반에 올더스 헉슬리(Alduos Leonard Huxley)가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1932)에서 그린 인간생산공장의 디스토피아 세계가 21세기 현재 훨씬 근접한 것처럼 보인다.

23. 메리 애스텔(Mary astell. 1668-1731)이 1694년 익명으로 발표한 <숙녀들에게 하는 중대한 제언>이 남녀 평등교육을 최초로 요구했다고 전해진다. 메리 애스텔은 1700년에 <마자린 공작부부의 결혼에 대한 고찰>에서 남성지배 사회에 대해 계속 썼고, 훗날 가부장제로 이름하게 되는 짜임새를 처음으로 분석한 작가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였다. ‘자유주의 사상을 여성에게까지 확대’한 메리 울스턴 그래프트(1759-1797)가 1792년 <여성권리의 옹호>를 쓰기 1세기 이전에 이미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리사 터틀, <페미니즘사전>(1986), 유혜련+호승희 옮김, 동문선, 서울, 1999, p.63, 437, pp.453-454).

24. 칼 마르크스, <자본론> I (하), p.733.

25.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새벽에는 치부욕과 탐욕이 지배적인 열정으로 된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향락의 세계를 창조할 뿐만 아니라 투기와 신용제도에서 벼락부자가 될 수 있는 많은 원천을 개발한다. ... 자본가의 마음 속에서 향락욕과 치부욕 사이의 불행한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서 1820년 경 맬더스는 다음과 같은 분업을 제창하였다. 즉, 축적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생산에 종사하는 자본가가 담당하고, 낭비하는 일은 잉여가치의 분배에 참여하는 기타 사람들 즉 토지귀족이나 관리와 목사 등등이 담당한다는 것이 그것이다”(칼 마르크스, 같은 책, pp.751-753).

26. “추가자본 ... 이것은 자본화된 잉여가치이다. 거기에는 처음부터 남의 부불노동에 유래하지 않는 가치라고는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추가노동력이 결합되는 생산수단도, 추가노동력이 유지되기 위한 생활수단도, 잉여생산물[즉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에게서 매년 탈취하는 공물(貢物)]의 구성부분에 불과하다. 자본가계급이 이 공물의 일부로 추가노동력을 사들일 경우, 그것이 비록 완전한 가격에 의한 것이고 따라서 등가물과 등가물끼리의 교환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역시 [피정복자에게서 약탈한 화폐로써 피정복자 자신의 상품을 구매하는] 정복자의 낡은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칼 마르크스, 같은 책, p.7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