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 수돗물 한잔 드릴까요?

사회 보장비 삭감이 만든 수돗물 재앙

딸아이와 조카와 함께 사는 41세의 지나 러스터. 그의 가정은 매일 0.5리터짜리 생수병 151개를 사용한다. 36개는 요리, 또 다른 36개는 머리를 감는 데, 27개는 식수로, 24개는 설거지에, 나머지는 얼굴과 이를 닦는 데 쓴다. 손을 씻을 때는 수돗물을, 샤워와 빨래는 1~2주에 한 번씩 근처 어머니 집에 찾아가 해결한다. 러스터의 가구는 미국 평균과 비교하면 1명당 생수 700통을 덜 사용하는 셈이다. 미국 1인당 1일 물 사용량은 약 375리터이다.

[출처: 데모크라시 나우]

수돗물 납 오염 사건이 수면으로 부상한 지 수개월이 지났지만 지역 주민들은 아직도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기후 변화로 물 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아프리카 이야기가 아니다. 러스터가 사는 곳은, 한때는 미국 자동차 산업을 이끌었던 미시건 주 플린트 시다. 1908년 제너럴모터스(GM)가 출범한 플린트 시는 자동차 산업과 함께 성장한 부자 도시였다. 1936~1937년에는 이곳 노동자들이 대대적인 점거 파업을 벌여 전미자동차노조(UAW) 설립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대 말 GM이 이곳 공장을 멕시코 등지의 해외로 하나둘씩 이전하면서 그 여파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급기야 2000년대 중반에는 미국에서 범죄율이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가 됐으며 2008년 미국 금융 위기 뒤 경제는 더욱 악화됐다. 하지만 세계 경제 위기 당시 신자유주의 긴축을 주도했던 미시건 주는 플린트의 재정을 건전화한다며 2011년 비상 재정 관리관을 독단적으로 파견하고 오히려 사회 보장비를 삭감하면서 현재의 사태가 시작됐다.

플린트 시는 원래 인근 디트로이트 휴론호에서 취수한 상수도를 사용했다. 그러나 재정 위기에 빠진 디트로이트 시가 사용료를 올리자 플린트 시는 재정 절감을 위해 2014년 4월 상수원을 지역 내 플린트 강으로 바꾸고 자체 급수를 시작했다. 하지만 플린트 강의 물은 산성과 염분이 강해 수도관을 부식시켰고 중금속이 녹아들어 플린트 내 산업 시설을 고장 내는 한편 사람들 몸속에서 각종 질병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당국은 시민들의 항의와 전문가들의 소견을 무시했고 긴축을 이유로 부식 방지도 소홀히 했다. 결국 6천에서 1만 2천 명 사이의 어린이들이 오염된 물에 노출됐고 약 3천 명의 어린이가 다양한 형태의 질병을 호소하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치달았다. 레지오넬라증에 감염돼 최근 사망한 10명도 오염된 수도 때문인 것으로 추정될 만큼 상황은 심각했다. 단 500만 달러(약 60억 원)를 아끼려다 10만 명이 사는 도시 전체를 재앙에 빠트린 셈이다. 플린트 시에는 1월 중순 연방비상사태령이 내려졌다.

러스터도 자궁에 물혹이 생겨 수술을 받았고 장기간의 병가로 일자리마저 잃었다. 머리카락이 한 줌씩 빠지고 가려움증에 피부를 피가 나도록 긁는 딸아이를 보면 러스터의 가슴에도 피가 맺힌다. 그녀는 “하층 중에서도 최하층이라고 느껴요. 자존감이 정말 형편없습니다”라고 에 토로했다. 흐느끼는 러스터 뒤에선 네슬레 같은 생수 업체들이 기증한 플라스틱 통들이 반짝였다.

플린트 시의 수돗물 위기, 미국 전역에서도 우려

미국에서 수돗물 수질 악화로 초래된 재앙은 플린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1800년대에 모습을 갖춘 미국 수도는 대개 지자체가 관리하고 민영 업체에 위탁해 운영했다. 하지만 기업들의 주요 관심은 이윤을 내는 데 있었고 이 때문에 각 지역에선 콜레라가 만연하는 등 오염된 물과 물 부족 문제가 지속됐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20세기에 들어 뉴욕 시 등이 먼저 상수도를 공영화했고 현재는 지자체 90%가 공영으로 수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 속에서 미국 정부의 수도 예산은 줄어들었고 특히 2008년 경제 위기 뒤 급격하게 하락했다. 미연방의회예산국(CBO)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의 1959년 수도 교통비는 GDP의 3.0%였지만 1980년대부터 하향세를 걷다가 1996년 2.4%까지 줄어들었으며 2009년 2.7%로 소폭 늘어났으나 2014년에는 2.4%로 다시 떨어졌다. 지금 미국 수도 인프라 현황은 미국토목학회(ASCE)가 최근 전국 수돗물 수질에 D점을 줄 만큼 심각하다. 보고서는 “미국 수도 인프라의 상당 부분의 수명이 거의 끝났다”고 경고했다. 실제로도 심각한 수질 오염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2001년 워싱턴 D.C. 수돗물에서는 허용치의 20배에 달하는 납이 검출됐으며, 2005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콜럼비아 시, 2006년에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더럼과 그린빌, 작년 7월에는 미시시피 주 잭슨에서, 그리고 지난해 여름 오하이오 주 세브링에서도 다량의 납 성분이 검출됐다.

그럼에도 지난 2월 버락 오바마 정부는 의회에 11%가 삭감된 연방 수도 인프라 예산안을 제출했다. 삭감액 규모도 미국 역사상 가장 큰 폭이었다. 미국 소비자 단체 푸드앤워터워치에 따르면 삭감된 예산은 가장 가난한 지역 사회 수도 인프라를 지원하는 예산이었다. 수도 인프라 예산이 삭감되면 57%가 흑인이고 40%가 빈곤층인 플린트 시에서처럼 가난한 계층이 희생될 가능성이 크다.

한편 사기업들은 수돗물 위기를 내심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 “월스트리트가 플린트의 사례를 주시하고 있다”고 보도했지만 미국 1위의 수도 기업인 아메리칸워터웍스American Water Works와 같은 기업의 주가는 지난 2월 10% 가까이 치솟았다. 1년 전 버지니아 주는 플린트의 사례에서 더 나아가 아예 주민 투표를 봉쇄하고 수도 민영화 추진 법안인 <수도인프라보호법>을 도입했다. 이들은 민영화가 아니면 플린트의 비극이 반복될 것이라고 주민들을 위협한다. 버지니아 수도 민영화 대책팀 5명 중 2명은 수도 산업 관계자였다. 플린트에서는 취수원 교체가 애초 수도 민영화를 위한 수순이었다는 의혹이 뒤늦게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하지만 수도 민영화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응은 냉담하다. 버지니아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이 환경청을 점거해 17명이 연행됐고 캘리포니아 주 소도시 위드에서도 수도 민영화 반대 시위가 한창이다. 플린트 주민들도 릭 스나이더 주지사를 비롯해 수돗물 안전에 책임이 있는 당국자들에 대한 집단 소송과 시위에 나서고 있다.

세계적으로 민영화 대세론은 점차 시들고 있다. 초국적기업연구소(TNI)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14년까지 세계 35개국에서 180건의 수도 재공영화가 이루어졌다. 재공영화의 주요 이유는 기업의 이윤보다 지역 사회의 필요를 우선한 당국자들의 결정이었다. 미국 소비자 단체 푸드앤워터워치는 미국에서도 2007년에서 2014년까지 공영 수도 이용자의 수는 83%에서 87%로 늘어난 반면, 민영 수도 이용자는 7%로 낮아졌다고 밝혔다.

주민들은 안전한 물을 위해 기업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것은 수도뿐만이 아닌 정부 자체라고 말한다. 매일같이 미시건 주 청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한 주민은 “정부는 우리에게서 민주주의를 빼앗고 미시건을 기업처럼 운영하고 있어요. 수도와 함께 정부를 되찾아야 할 때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워커스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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