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와 실천의 간극에 빠진 기업과 인권

유엔 기업과 인권 실무팀 방한 활동 총평

‘유엔 기업과 인권 실무 그룹(UN Working Group on Business and Human Rights, 실무 그룹)’이 5월 23일부터 6월 1일까지 열흘간의 국가 방문을 마치고 돌아갔다. 실무 그룹은 <유엔 기업과 인권 이행 원칙(UN Guiding Principles on Business and Human Rights, 이행 원칙)>의 확산과 이행 증진을 목표로 하는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산하 특별 절차의 하나로 2011년 설립되었다. 국가는 기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인권 침해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법적인 의무가 있고, 기업은 자신들의 활동으로 인해 부정적인 인권 영향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업 활동 전반에 걸쳐 인권 실사(due diligence)를 실시할 인권 ‘존중’의 책임이 있으며, 국가와 기업은 인권 침해 피해자들에 적절한 ‘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보호, 존중, 구제’의 틀을 천명한 것이 <이행 원칙>이다. 실무 그룹은 <이행 원칙>에 대한 정부, 기업, 시민 사회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해설 자료를 발간하고 기업과 인권 포럼을 개최해 왔다. 또 공식 국가 방문을 통해 국가 차원의 <이행 원칙> 준수 상황을 검토해 왔다. 한국 국가 방문은 몽골, 미국, 가나, 아제르바이잔, 브라질에 이어 여섯 번째로, 단테 페스케(Dante Pesce) 의장과 마이클 아도(Michael K. Addo) 위원이 한국을 찾았다.

  유엔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이 방한 활동에 대한 보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실무 그룹의 방한에 앞서 한국 시민 사회는 ‘유엔 기업과 인권 실무 그룹 방한 대응 한국 NGO 모임(NGO 모임)’을 구성해 공동 대응 했다. 솔직히 실무 그룹 방한 직전까지 한국 시민 사회는 기대보다 우려가 컸다. <이행 원칙>의 어떤 부분을 보기 위해 한국에 오는 걸까. 한국 방문을 통해 실무 그룹이 얻고자 하는 성과는 무엇일까.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혹시 기업과 인권이라는 주제와 관련해 한국을 ‘모범 사례’로 들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이행 원칙>은 반기문 사무총장 시대의 유엔에서 탄생한 대표적인 성과 중 하나인 데다가 한국은 국가인권위원회를 중심으로 기업과 인권 관련 논의에서 (최소한 아시아에서) 선두 주자를 자처하고 있다. 방한 전 다른 자리에서 만나 넌지시 의견을 물었을 때 실무 그룹도 올해 안에 한국에서 기업과 인권에 관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tional Action Plan)이 아시아 최초로 마련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면서 한국 정부와 국가인권위원회가 이야기하는 선진적인 제도와 입장을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한국 정부와 국가인권위원회가 겉으로 보이는 만큼, 문서나 말로 국제 사회에 홍보하는 만큼 인권을 존중하고, 고려하고, 책임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현실을 어떻게 잘 전달할 것인가. “역시 한국! 기업과 인권 분야에 있어서 아시아(또는 세계) 선두 주자였더라” 하는 보고서가 나오는 일만큼은 막아야 할 텐데. 절박한 심정으로 실무 그룹 방한 시에 제시할 내용을 준비했다.

NGO 모임은 <이행 원칙>에서 말하는 원칙이 국내에서 실현될 수 없는 제도적, 법적 한계 등 한국의 ‘말’과 ‘행동’ 사이 간극을 잘 보여 줄 수 있는 사례에 주목했다. 현대자동차 협력 업체인 유성기업 민주 노조 파괴 사건, 삼성과 LG 스마트폰 제조 공정상 3차 협력 업체 하청 노동자들의 메탄올 중독과 실명 사건, 현대중공업 사내 하청 노동자 산재 사건에 대해서는 실무 그룹 방한에 맞춰서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행 원칙>은 기업이 자신의 활동으로 인한 부정적 인권 영향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않았더라도 기업의 사업 관계(business relationships)에 따른 활동, 재화와 용역과 관련된 인권 침해도 예방하고 완화할 책임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이행 원칙> 13). 한국 시민 사회는 이를 기업의 인권 존중 책임이 모든 공급망(supply chain)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이해했고, 이번 방한과 진정서 제출을 통해 이에 대한 실무 그룹의 유권 해석을 받고자 했다.

유성기업에서 한 노동자의 자살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 민주 노조 파괴 공작은 유성기업의 원청인 현대자동차가 유성기업 경영진과 정례 회의를 갖는 등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그러나 현대자동차는 이러한 개입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유성기업과 고용 관계, 지분 관계 등 국내법에서 책임을 이야기할 만한 관계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자신과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삼성과 LG는 3차 협력 업체에서 발생한 메탄올 중독 사고와 관련, 시민 사회의 질의에 자신들의 책임은 1차 협력 업체에 한한다고 선을 그어 버렸다. 현대중공업 조선소에서는 올해에만 7명의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이 중 5명이 사내 하청 노동자로 현대중공업의 업무 지시에 따라 현대중공업 일을 했음에도 현대중공업에 고용된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삼성과 LG, 현대중공업의 책임을 강제할 수 있는 국내의 법적, 제도적 틀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기업과 인권 실무 그룹에 이들 원청 대기업의 책임을 <이행 원칙>에 비추어 명확히 해 줄 것을 요청하고자 세 건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한 것이다.

진정서를 제출한 세 건 외에도 실무 그룹 방한 기간 한국 시민 사회, 인권 단체, 노동조합과 피해자들은 서울, 대전, 울산에서 네 차례에 걸친 면담을 통해 다양한 사안들을 제기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이야기하는 기업과 인권이 어떠한 이유로 공허한지, OECD 다국적 기업 가이드라인에 따라 설치된 국내 연락 사무소(NCP)가 어떻게 지금까지 모든 진정 건을 사전 평가 단계에서 기각해 왔는지, 국민연금, 공공 조달, 공적 원조와 같은 국가 정책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제도적 차원에서 설명했다. 사건 발생 5년 만에야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문제, 삼성전자 등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 문제, 당진 화력 발전소와 제철소 문제, 서울과 부산 지하철 기관사의 정신 건강 문제도 집중적으로 전달했다. 개인 정보 보호 문제,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 재벌을 중심으로 한 한국 재계의 구조적 문제, 해외 진출 한국 기업의 인권 침해 문제에 대해서도 심도 깊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우려와 달리 실무 그룹은 진지하게 시민 사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5월 23일 공식 일정 첫날 진행된 시민 사회 면담은 2시간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저녁 식사도 거른 채 예정 시간을 훨씬 넘겨 끝났다. 첫날이라 시차 등으로 힘들고 허기질 텐데도 실무 그룹은 “문서 몇백 쪽 읽는 것보다 피해자, 이해 관계자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했다. 24일 면담에 이어 26일 대전, 29일 울산에서 이루어진 면담 모두 예정 시간보다 길게 진행되었지만, 실무 그룹은 한결같이 “피해자는 이야기할 권리가 있고, 우리는 이를 들어 주어야 한다”며 진지하게 피해자들을 대해 주었다.

공급망의 1차, 2차, 3차로 내려가면서 협력 업체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는 기업들의 태도에 대해 명백한 <이행 원칙> 위반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오히려 협력 업체를 비롯해 더 큰 영향권과 영향력을 가지는 대기업일수록 그 책임도 커진다고 말했다. 실무 그룹은 대기업 관련 문제에 한국 국민의 여론은 어떤지, 불매 운동이라도 대대적으로 벌이지 왜 가만히 있느냐고 물었다. ‘혈연 관계’ 등으로 복잡하게 얽힌 기업과 언론의 관계 때문에 제대로 보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설명하자 “괜히 ‘삼성 공화국’이라는 별명이 생긴 것이 아니었구나. 거의 ‘왕조’ 수준”이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유엔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과 한국 NGO가 함께 관련 동영상 기록을 보고 있다. [출처: 국제민주연대]

실무 그룹이 6월 1일 출국 기자 회견에서 발표한 예비 보고서는 우려했던 것보다 긍정적으로 나왔다. 다양한 측면에서 제도와 현실의 간극을 보여 주기 위해 모두 애쓴 덕분이다. 예비 보고서에서 실무 그룹은 “공급망의 하부로 갈수록 부정적 인권 영향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지며, 특히 공급망이 해외로 확대될 경우에는 더 심각해진다”고 지적했다. 한국 정부엔 공급망 전체에 걸쳐 부정적 인권 영향을 예방할 수 있도록 현재의 법적, 제도적 틀의 간극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를 촉구했다. 특히 “구체적 인권 정책이 있다고 표방하는 기업들조차 공급망 전체로까지 인권 존중 책임이 확대된다는 인식은 부족한 것 같다”면서 “어떤 기업은 직접 협력 업체를 넘어서 공급망 전체를 감독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기업은 직접 협력 업체에서 벌어진 인권 침해 사례에 대해서조차 자기네 문제가 아니라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기업의 인권 존중 책임이 공급망 전체, 모든 협력 업체에 미친다는 것, 어느 단계, 어떤 관계에 있느냐를 중심으로 할 것이 아니라 부정적 인권 영향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따라서, 그리고 이를 예방 또는 완화하는 데 기업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행사될 수 있는지에 따라 기업의 인권 존중 책임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실무 그룹 방한은 의미 있는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 등 국가 기관과 일부 공기업, 대기업에 대해서는 충분하고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아쉬움도 있다. 예컨대 삼성과 마찬가지로 3차 협력 업체에서의 메탄올 실명 사고와 관련 책임을 부인했던 LG에 대해, LG가 제공한 자료와 해명만을 바탕으로 LG를 공급망 전체에 대한 인권 감독과 보호 정책을 수립한 모범 사례로 언급한 것은 아쉬움을 넘어 피해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기업과 인권 실무 그룹의 공식 보고서는 내년 6월 유엔 인권 이사회에 보고될 것이다. 공식 보고서 발표까지 남은 1년이 <이행 원칙>에 맞춰 법적, 제도적 미비점을 개선하고 현실에서 이행 수준을 높이는 시간이 될지, 또는 말과 행동, 제도와 현실의 간극을 명확하게 전 세계에 드러내는 시간이 될지 아직 모른다. 기업과 인권 분야에서 아시아 선두 주자가 되겠다는 한국 정부에게도, 세계적인 브랜드의 위상을 꿈꾸는 기업에게도, 기업의 인권 존중 책임 이행을 간절히 호소하는 피해자들과 시민 사회에게도 아직 남은 과제가 많다.[워커스 14호, 2016.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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