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의 교훈

워커스 17호 시평

  사진/ 정운 기자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 투표가 기존의 신자유주의 글로벌 체제에 되돌릴 수 없는 균열을 가져왔다는 것은 제도권 주류 언론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 민주당 신자유주의 정권의 대통령인 오바마조차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이번 투표가 글로벌화가 일으키는 계속되는 변화와 도전들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번 국민 투표에서 브렉시트에 찬성한 다수 유권자는 스코틀랜드 등이 아닌 잉글랜드 사람들, 잉글랜드에서도 런던 이외의 나머지 지역 사람들, 노년 세대, 사회 경제적 중하층 집단이라고 알려져 있다.

스코틀랜드 등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유럽연합 으로부터 혜택을 더 받는 중이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고, 잉글랜드 지역의 브렉시트 찬성자들은 이민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자리와 수입, 그리고 복지 혜택을 빼앗아 간다고 느끼고 있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잉글랜드 브렉시트 찬성자들의 정치사회적 정서는 노스탤지어,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 신자유주의 반대로 요약된다.

노스탤지어란 유럽 연합 가입 이전의 ‘네이션(nation)-스테이트(state)’로서의 영국 시절에 관한 것이다. 네이션-스테이트란 과거에는 ‘민족 국가’ 혹은 ‘국민 국가’란 말로 번역했는데 요즘에는 그냥 ‘네이션-스테이트’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유럽연합은 냉전 체제 해체 이후 유럽 지역에서 성립한 신자유주의 글로벌 체제의 정치적 상부 구조다. 당연한 얘기인데, 유럽연합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각 국가 영역에서 ‘네이션-스테이트’가 해당 영역에 사는 사람의 일자리, 소득, 사회 복지 등을 보장해 왔다. 네이션-스테이트 안에서의 여러 정당은 바로 이러한 보장을 목표로 내걸고 정치적 경쟁을 했다.

어쩌다가 소위 좌파 정권이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실패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네이션-스테이트’ 시스템 아래에서의 이러한 구조적 정치 제약 때문이었다. 일자리, 소득, 사회 복지 등에 관한 국민의 일정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좌파 정당이라고 하더라도, 혁명적이지 않은 한 국가 단위에서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외면할 수 없었고, 바로 이런 한에서 발전의 헤게모니를 쥔 자본가 계급과 타협이 불가피했다.

1990년대 초에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냉전 체제가 해체됨에 따라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글로벌화는 유럽 지역에서 유럽연합이라는 정치적 상부 구조를 성립시키게 되었다. 영국 노동당 출신 국회의원의 대다수는 유럽연합에 동조적이다. 이번 브렉시트 투표 이후에 노동당 당수 코빈은 그동안의 어정쩡한 태도로 인해 노동당 내 반대파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 그런데 노동당의 코빈 세력이나 반대 세력이나 유럽연합에 대해 적극적이고 근본적인 비판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민자 문제는 유럽연합과 직접 관련이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중동 등으로부터 유럽에 유입되는 난민은 법적, 제도적으로 영국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영국으로의 이민 노동자들은 주로 유럽연합의 가입국 중에서도 ‘A8’이라고 불리는 2004년도에 유럽연합에 가입한 동유럽 나라들로부터 유입되었다. 예컨대 그중 30%가 폴란드 출신인데, 이들은 대개 젊고 영어도 잘하고 주로 임금이 싼 3D 업종에 종사해 왔다.

하지만 영국 독립당 등의 우익 포퓰리즘 정치 세력은 이민자 문제를 내세워 영국 유권자를 선동하면서 영국 하층 계층의 제노포비아를 건드리고 이런 정서를 증폭시키는 데 성공했다. 과거의 영국 ‘네이션-스테이트’가 보장해 주었던 일자리, 소득, 사회 복지 등에 관한 다수 유권자의 정치적 노스탤지어는 이렇게 해서 이민 노동자에 대한 제노포비아와 단단히 결합해 표출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렇듯 우익 포퓰리즘 선동에 의해서 이민 노동자 문제에 관한 지극히 왜곡되고 편협한 정치의식이 표출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다른 한편으로 영국의 다수 유권자는 투표를 통해서 유럽연합의 정치적 본질을 일정하게나마 확인했다. 유럽연합이 초국적 독점 자본, 특히 금융 자본의 이해관계를 유럽 지역에서 정치적으로 직접 대변한다는 점을. 그리고 하층 영국민이 지난 20~30년간 겪어 온 경제 사회적 고통, 즉 사회적 양극화에 따른 일자리 부족, 소득 감소와 사회 보장 축소 등은 신자유주의 글로벌 체제가 만들어 낸 것이라는 점을.

한마디로 말해서 브렉시트에 찬성한 다수 영국 유권자는 더 이상 신자유주의 글로벌 체제 아래에서는 못 살겠다는 강력한 정치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문제는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과정에서 진보 세력이 올바르고 효과적인 대안을 만들고 또 이를 유력한 정치적 프레임을 통해서 대중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영국도 마찬가지고 유럽 전체도 마찬가지였다.

내년은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면서 동시에 박정희 탄생 100주년이다. 서로 다른 두 사회 세력이 이념적, 정치적으로 맞붙어 싸우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제대로 결집한 정치 세력, 혹은 정당이 없다. 올바르고 효과적이며 유력한 정치적 대안을 내놓는다는 게 애초에 불가능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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