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을 넘은 사랑

한국인 NGO 활동가와 네팔 이주노동자의 결혼

이주노동자 인권 운동을 하는 김나희 활동가와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 아시스 까르끼 씨가 오는 8월 14일 서울 동작구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둘은 네팔에서 대지진을 겪고, 함께 지진 구호 활동을 했다. 그들은 대지진이란 위기 속에서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서로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남달랐고, 특별했다.

두 사람은 네팔 이주노동자와 네팔 대지진 구호 기금 후원자, 이주 인권 활동가를 불러 소규모 파티 형식으로 결혼식을 진행한다. 그들은 청첩장에 “하루하루 후회 없이 살라는 의미로 지진이 우리의 삶에 온 것 같다”고 적었다. 마지막에는 “축의금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김나희 씨는 현재 비영리 단체 ‘사단법인 아시아의 창’에서 활동 중이며 네팔에서 국제 구호 개발 활동을 했다. 아시스 씨는 화성시 의자 공장에서 일하고 있고, 네팔에선 청소년 센터의 영어와 수학 교사였다. 이들의 삶과 꿈을 들어 보았다.

이주 노동 인권 운동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김나희
원래 직업은 광고 홍보 대행사의 광고 기획자였다. 전공도 광고홍보학이다. 대학 시절 광고 공모전에도 많이 참가했다. 하지만 어떤 상품을 광고로 잘 포장해 소비를 촉진하기보다 사람의 인식을 바꾸는 보람이 더 컸다. 그래서 상업 광고보다 공익 광고 공모전에 주로 참여했다. 2013년에 광고 기획자가 됐고 첫 수주도 보건복지부였다. 1년 동안 일하다 보니 공무원이 원하는 대로 포장지를 만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직접 공익 분야에서 활동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마침 지구촌공생회에서 국제 개발 협력으로 마케팅과 교육 프로그램 진행 경력이 있는 네팔 봉사자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NGO 활동을 시작했다.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은 어떠한가

김나희
올해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이 한 달에 1명꼴로 자살했다. 나는 이주노동자들과 관계가 넓어질수록 안타까운 소식을 자주 들었다. 이주노동자에겐 노동 3권 위에 사장이 있다. 사업장을 바꾸고 싶어도 사장이 사인하지 않으면 불가하다. 숙박, 식사 등 법적으로 정해진 것이 없다. 그래서 사장들은 “우리가 편의를 제공하는 건데 이것도 불만이냐”며 성을 낸다. 이주 노동자들은 컨테이너나 비닐하우스에서 산다. 기본적인 생리 욕구와 주거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다. 요구하면 “네팔로 돌아가지 그러냐”라는 질문을 받는다. 이들은 한국에 올 때 200만 원 정도의 빚을 지고 온다. 이를 갚아야 네팔에 돈을 보낼 수 있다. 이를 갚기까지 한국에서 버티기 힘들고, 돌아가기엔 부모에게 죄송하다. 내 예비 신랑인 아시스도 환기가 되지 않는 공장에서 일하다 보니 이마에 고름이 찼다.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나

아시스
네팔에서 같이 봉사 활동을 할 때 그녀는 나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두에 친절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화를 낸 적이 없다. 그 후로 그녀가 하는 모든 것이 궁금해졌고, 그녀는 나에게 사랑이 뭔지 깨닫게 해 줬다. 나는 1년 반 동안 동료로 지내며 그녀를 짝사랑했다. 2014년 11월에 연인이 되어 그녀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됐고, 나의 모든 것을 공유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2016년 8월 우리는 부부가 된다.

김나희 아시스는 네팔 취업 역량 강화 청소년 센터 공부방 교사였다. 이곳에서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힘든 친구들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본인이 가난해 지원받아 공부했기 때문인지 학부모와 아이들 마음을 잘 안다는 점이었다. 아이들 생일 때 기타로 생일 노래 불러 주고, 힘든 아이들과 더 많이 대화하고,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축구공을 꺼내 아이들과 축구를 했다. 또한 너무 가난해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게 본드를 흡입하는 친구들도 많았는데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나무라기보다 우유를 사 줬다.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항상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청년이었다.

대지진을 직접 겪었다. 어떤 상황이었나

아시스
2015년 4월 25일 그녀는 우리(봉사 장소)에게 오는 길에 지진을 겪었다. 지진이 난 후 연락이 닿질 않았다. 나는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여진으로 건물이 계속 무너지고 있었지만 그녀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도착했을 때 그녀는 살아 있었고, 내 인생에 가장 큰 행운을 만났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었고 나는 그녀를 안아 주었다. 그다음 그녀를 바로 우리 가족에게 데려갔다.

  2015년 4월 네팔 지진구호활동 당시 아시스 까르끼(안경 쓰고 밤색 옷)

김나희 지진 발생 당시 템포(삼륜구동차)를 운전해 아시스 동네로 가고 있었다. 비포장도로라 차가 잘 흔들려 그게 지진이었는지도 몰랐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그에게 가고 있다고 문자했다. 그러다 템포가 멈추었다. 배터리가 다 된 줄 알고 기다렸다. 이어폰을 빼니 비명이 들렸다. 주변엔 먼지가 짙게 깔리고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아시스는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바로 달려왔다. 아시스의 부모님도 말리지 않고 “너와 친한 사람이고 좋은 일 하는 친구인데 네가 가 봐야 하지 않겠냐. 나희가 어디 있는지 너만 알고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지진 구호 활동도 했나

아시스
여진은 첫 강진 후 5~6일 동안 계속됐다. 나와 나희는 여진에도 지진 구호 활동을 했다. 지진 후 네팔은 전쟁터였다. 내가 가는 곳마다 펼쳐진 장면은 비극이었다. 집이 없어진 건 괜찮은 정도였다. 당장 식량난부터 해결해야 했다. 주민들은 식량 구호물자 차량을 막을 정도였다. 나는 구호 활동을 하며 처음으로 시체 냄새를 맡았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부인을 잃고, 어떤 사람은 자식을 잃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족 모두를 잃었다. 내가 피해자들을 물질적으로 도울 수는 없었지만 내 시간을 그들에게 쓸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그렇게 나는 내 감정을 공유하며 구호물자를 분배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갔다.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사심 없이 피해자를 도울 수 있다는 것에 축복을 느꼈다.

김나희 나는 활동 임기가 끝나고 여행하려고 체류하던 상태였다. 네팔의 한국인 활동가들은 지진으로 강제 귀국 조치됐다. 단체로 구호 기금은 계속 들어왔다. 쌀과 물이 동나고 물자가 필요한 곳은 늘었다. 나는 활동 임기가 끝나 강제 귀국 대상이 아니니 단체에 남아 구호 활동을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지진 후에 아시스와 함께 두 달 동안 긴급 구호 식량과 천막, 스티로폼 깔개를 전달했다. 매우 위험한 곳은 아시스 혼자 가기도 했다. 그는 계산이 빨라 물자 운반, 회계를 맡았다. 그는 구호 활동 내내 피해자들과 얘기하면서도 여진과 정신적 피해로부터 나를 보호했다.

  2015년 4월 네팔 지진구호활동 당시 김나희 활동가(중앙 흰색 가디건)

결혼은 어떻게 결심하게 됐나

김나희
아시스가 나를 구해 주러 온 다음부터 ‘이 친구가 체구는 작지만, 곁에 있으면 안전하겠다’라는 평온함이 생겼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나랑 닮았다. 돈에 대한 생각,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도 같았다. 내가 다음에 다른 빈곤 국가로 봉사를 간다면 같이 갈 수 있는 친구다. 네팔은 가난하지만 행복 지수가 높은 나라다. 아시스의 가족도 풍족하지 않지만 ‘오늘 하루 아프지 않고 밥을 먹었으니 다행’이란 생각으로 만족하며 산다. 그러다 그는 이전부터 꿈꿔 왔던 ‘코리안 드림’을 이루려 한국에 왔다. 나는 비자 만료로 한국에 귀국했다.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어 한국에 왔다. 그는 5월 22일 수원에서 서툰 한국어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번역기를 동원해 사랑스러운 프러포즈를 준비했다. 나는 당연히 “Yes, of course(네, 당연하죠)”라고 답했다.

결혼식은 어떻게 진행할 예정인가

김나희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몇 명만 불러 아시아의 창 센터에서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도 음식을 준비하는 등 돈이 들었다. 어느 날 사회적 기업 오요리아시아에서 결혼식 비용 전액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봤다. 대상은 비영리 활동가 청년, 고용이 불안정한 청년이었다. 우리의 사연을 적어 신청했는데 대상자로 선정됐다.

결혼식에 네팔 이주노동자들, 네팔 지진 구호 기금을 보내 주신 분, 이주노동자 인권 활동가 등 100명 정도를 초청할 예정이다. 피로연 때도 네팔 결혼식 의상을 입을 예정이다. 결혼식에서 파티 형식으로 같이 춤을 춘다. 모두가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다.

결혼식 날짜도 네팔 이주노동자들을 고려해 날짜를 잡았다.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지방에 있어 서울에 올라오기 힘든데 결혼식 다음 날이 공휴일이라 편하게 결혼식을 보고 서울 구경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네팔 친구들은 서울 시티 투어 버스를 매우 타고 싶어 한다. 남산타워도 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아시스와 신혼여행 대신 네팔 친구들과 함께하는 서울 여행을 기획했다. 하지만 특히 농업 분야 노동자들은 사장이 휴가를 잘 내주지 않아 진행이 될지 모르겠다. 이게 안 되면 이영아 아시아의 창 소장이 ‘김나희 제주도 신혼여행’ 모금을 하겠다고 말했다. 내륙 국가인 네팔에서만 살았던 아시스도 섬을 본 적이 없어 가고 싶어 한다.

결혼 후 어떤 삶을 꿈꾸는가

아시스
그녀와 결혼한 후 4~5년 동안 한국에서 지낼 것이다. 한국에서 경험과 지식을 쌓고 돈을 벌 수 있을 만큼 벌고 네팔로 함께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네팔에서 그녀와 음악 예술학교를 설립할 생각이다. 한국에서 음악 예술 교육 현장을 보고, 음악 이론 교육법도 공부할 예정이다.

김나희 한국에서는 이주노동자 인권 활동을 계속할 예정이다. 이주노동자들은 의사소통 때문에 병원을 가지 못한다. 이들과 병원에 가서 통역하는 것도 활동이 됐다. 전화 통역도 해 줄 수 있지만 그들은 불안감을 안고 살기 때문에 나 같은 활동가를 필요로 한다. 네팔에 가서는 아시스가 계획한 음악 예술학교에 같이 몸담을 것이다. 나도 미술과 아이들을 좋아한다. 그는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활동을 꿈꾼다. 나도 이를 네팔에 가기 전에 최대한 지원할 예정이다. 그가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네팔에서 키우고 싶다. 네팔은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다문화 사회다. 여러 부족과 종교가 평화롭게 어우러진 마을 공동체다. 아이는 다양한 문화,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자랄 수 있다. 한국에서 키우면 아이의 집단은 소수 집단이 될 것이다. 부모가 대안적 교육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아이의 선택이 아닌 부모의 선택이라 아이가 행복할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김나희
이주노동자들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취약 계층이다. 아시스처럼 돈이 아닌 그들의 꿈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생겼으면 좋겠다. 한국 정부가 외국인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하지만 고등학교, 대학교 성적표를 가져오라 한다. 아시스는 집이 가난했고 돈을 벌기 위해 대학을 중퇴했다. 가난한 네팔 친구들은 한국에 오는 걸 절실하게 꿈꿨다. 이곳에서 돈을 벌고 네팔에 있는 부모에게 돈을 보내는데 돈을 버는 이주노동자 당사자는 열악하게 산다.

다문화는 사회적으로 많이 이슈화됐다. 다문화 가정을 대상으로 한 많은 제도와 지원들이 생겼다. 하지만 이주노동자 문제는 관심도 제도도 없다. 지금 이주노동자 활동가 대부분은 40~50대의 중년층이다. 확산력이 높은 SNS 활용도 필요하지만 이를 사용할 줄 아는 중년층이 적다. 많은 사람이 이주노동자 문제에 관심 가져 줬으면 좋겠고, 특히 젊은 활동가가 많아지길 희망한다.(워커스 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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