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같이 재밌게 놀라고 하는거니까”

[워커스 22호 고급진] 단편선, 사이를 듣다

  사진/ 정운

오래 봐왔고 연배 차이도 있지만, 사이 씨를 만나면 ‘형’이라 부르기보다는 ‘씨’라 부르고 싶어진다. 그가 형다운 행동을 못 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서로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 그와 어울리는 관계 맺기 방식이라 생각해서다. 사이는 ‘유기농 펑크 포크’라는 장르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며, 2000년대 초·중반부터 오랫동안 한국의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활동하고 노래했다. 2007년 첫 앨범 〈아방가르드〉부터 2015년의 〈화전민의 노래〉까지 총 3장의 앨범을 낸 음악가이며, 자신이 귀농했던 충청북도 괴산에서 “괴산 페스티벌”이라는 축제를 만들어낸 공연기획자이기도 하다. 최근 귀농 생활을 마치고, 잠시 서울에서 거주하던 그를 만났다.


단편선(단) 제5회 괴산 페스티벌이 저번 주말에 열렸는데요, 축제 이후론 어떻게 지내나요?
사이(사) 늘 하듯이 빈둥거립니다. 요새는 갑자기 바람이 들어서 ‘시’ 공부를 하고 있어요. 집에 있을 때는 거의 시를 쓰거나, 고치거나 하고 또 복싱도 시작해서 체육관도 다녀오고,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지덕체네요? 시가 지, 복싱이 체, 음악이 덕이니까. (웃음) 지난 괴산 페스티벌에서는 간만에 펑크록 같은 무대라 좋았어요. 이번에는 메인 디렉터가 아니었죠?
뮤지션 섭외하고, 페이스북에서 홍보하는 역할 등을 담당했어요.

일종의 프로그래머?
그렇죠.

원래 괴산 페스티벌은 동네에서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집 앞 텃밭에서 잔치를 해보자면서 시작한 걸로 알고 있어요.
20대 초반의 친구들이 괴산에서 모여 살았는데, 일본식 집이었고, 꽤 넓었고, 앞에 텃밭도 있었어요. 텃밭에서 조그맣게 채소 같은 걸 기르려고 했는데 제대로 못 기르니까 엉망진창이라서. (웃음) 포크레인 하는 아는 형님 불러서 갈아엎고 거기서 시작했어요.
그냥 시작한 거네요.
오십 명 한정으로 시작했죠. 지금 총괄하고 있는 형님은 서울에서 “도깨비스톰” 같은 유명한 공연을 만든 분인데, 목수 하려고 시골 내려왔다 나랑 괴산에서 술 먹다 친해졌어요. 처음에는 두세 식구가 모여 작게 시작한 거예요.

사람들 교통비도 들고 밥도 줘야 했을 텐데?
첫 회는 그래서 형편없었고. (웃음) 포크뮤지션인 김목인 씨, 신나는 섬, 그리고 소리하시는 권재은 명창 같은 분들을 불러놓고 돈도 얼마 못 드리고. 하지만 잘 놀았습니다.

괴산에서 이렇게 오래 무언가를 하게 될 줄 본인도 모르셨을 것 같은데.
처음 귀농했을 때는 경남 산청에서 살았어요. 근본주의자 시절이었습니다. 3년 못 되게 살았는데, 근본주의를 버리면서 나왔습니다. 3년 지내며 주변의 다른 근본주의자들을 보니 거의 종교 같아지더라고.

원래 사이 씨는 부산 출신이신데요.
부산 살다 서울 올라왔습니다.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연주하고 (농성하는 곳마다 가서 함께 밥을 짓고 나누는) ‘투쟁과 밥’ 같은 활동도 같이 했습니다. 명동성당에서 이주노동자들 농성할 때도 모이고, 병역 거부하는 친구들과도 모이고, 대추리도, 새만금도, 천성산도.
그때 만난 친구들로부터 ‘남들처럼 살지 않아도 되는 구나’ 하면서 시골에 가게 된 용기를 배웠어요.

사이 씨의 옛 인터뷰를 보면 세탁기나 에어컨을 쓰지 않는, 소위 근본주의적인 모습이 많이 부각됐습니다.
내가 2006년에 처음 내려갔는데, 그때 엄청 그랬죠. 심지어는 2007년 처음 낸 음반 제목이 〈아방가르드〉인데, ‘이 시대의 아방가르드가 무엇인지 내가 보여주겠다!’ 싶어서 만들었어요.

지금은 근본주의를 버렸다고 하시는데.
원래는 자급자족을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오일피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고, 현대 석유 문명에 대해 생각하다 이 시스템으로부터 독립해야겠다 싶어 시골로 갔어요. 마침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멋있고 그랬습니다. 너무 완벽한 세계 같았죠. 그런데 사실 인간에게 완벽한 자급이라는 건 불가능해요. 원래 생명이라는 게 혼자 못 자라고, 어쩔 수 없이 같이 어울려야 하잖아요. 그리고 그 시골에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 사람들이 싫고 미웠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인간의 문제였어요. 나도 외로우면 저렇게 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시골이란 보통 가지고 있는 이미지처럼 낭만적인 곳이 아니라 야생에 가까운 영역이기도 해요. 조금이라도 자신을 침범하면 낫으로 찍고. 그러면서 인간이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괴산에 가셨고요.
괴산으로 옮기고 나서는 되레 산청에서의 생활이 많은 도움이 됐어요. 한 번 그렇게 살아봤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고, 가난해도 두려움이 없고. 나는 그때 살았던 에너지로 버티고 있는 거죠. 그리고 괴산 가서는 냉장고, 세탁기 다 쓰고. 와이파이도 쓰고. (웃음)

괴산 페스티벌을 4회까지 총괄하며, 축제 자체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은데요.
음식을 팔게 되었다는 것을 제외하곤 다른 게 별로 없습니다. 규모가 조금 커지긴 했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했고요.

그런데 사이 씨가 괴산에서 떠났는데도 이 축제가 유지된다는 것이 신기했어요.
처음 괴산 페스티벌 만들 때 쓴 선언문에서 “내가 지금 괴산에 사니까 여기서 한다”는 식으로 썼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니까 마침 이걸 계속 지속하고 싶은 형님이 있었고, 그래서 나도 돕겠다고 했어요. 처음 축제 때는 내가 바람잡이처럼 먼저 춤을 추면 사람들도 조금씩 춤추기 시작하고 그랬는데, 올해는 괴산 사람들이 먼저 나가 춤을 추더라고요.
그 사람들도 이제 몇 번 놀아봤으니까 자연스러운 거죠. 시골에선 평소엔 심심하니까, 좋게 봐주시는 거죠.

‘록 페스티벌’보다는 ‘잔치’에 가까운 느낌인데.
나도 이런저런 록 페스티벌에 가보고, 또 유명한 밴드들도 보고 그랬는데 뮤지션들 입장에서는 페스티벌에 못 나가면 B급 뮤지션이 된 것 같은 패배감을 느끼기도 하더라고요. 그런데 어차피 나는 최고가 될 수 없고, 최고라고 생각도 안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건데, 그러면서도 좋은 음악이 많지 않나 싶었어요. 돈 없어도 한 식구 두 식구 모이면 시골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인지 이번에 괴산 다녀오면서 이 페스티벌은 앞으로도 발전이 없겠구나 혼자 생각해봤어요. (웃음) 일단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고. 그런 게 이 축제의 목표가 아닌 것 같아요.
우리도 처음부터 우리가 힘들면 언제든 그만두자 했어요. (웃음) 다 같이 재밌게 놀라고 하는 거니까. 내가 처음 시작했지만, 괴산 사는 사람들끼리 내가 없어도 계속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요. 마침 계속 이어가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좋았어요. 이제는 괴산 사람끼리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의 십년 만에 도시에서 다시 살고 계신데요, 어떤가요?
다시 월세 내고 사니까 힘듭니다. 도시 올 마음이 없었는데, 당장 살 곳이 없어서. 돈이 있었으면 몰라도 집 구하기도 쉽지 않고. 하지만 또 교통이나 이런 건 좋으니까, 마침 시도 공부해야겠다는 마음도 들었고요.

서울 오니 벌이가 조금 나아지긴 하나요?
전혀 차이가 없고요. (웃음) 서울 쪽으로 오고 나니 이상하게 서울 쪽 공연이 많아지긴 합니다. 그런데 요새 전반적으로 공연 자체가 줄어든 것 같기도 하고요.

작년에 3집이 나왔습니다. 1집부터 지금까지, 비슷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꽤 다른 음악들을 연주해오셨는데요.
1집은 펑크 포크니까, 혼자 다 했어요. 6개월 동안 녹음기 하나 들고 전 과정을 혼자 했습니다. 2집은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상을 타서 만들게 되었는데, 그건 메이저 시스템으로, 10일 만에 모든 걸 끝냈어요. 너무 빨리했죠. 그리고 유통을 메이저와 했는데 내가 들고 다니면서 팔 수도 없고 해서 문제가 있었어요. 그래서 3집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만들고, 200장 정도만 유통사에 맡기고 나머지는 내가 다 팔면서 다녔죠. 다 해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다시 혼자 해볼까 합니다.

오랫동안 ‘펑크’를 강조해오셨습니다. 저도 제가 일종의 펑크록을 연주하고 있다 생각하긴 하지만. (웃음)
펑크는 태도죠. 형식이 아니고. 우리는 다 태도로 펑크를 봅니다. 남들 얘기하는 삶 말고 우리식대로 사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음악을 해오면서 음악가로서 자신이 어떻게 변해왔다 생각하나요?
한동안은 나도 막 잘하는 뮤지션이 되어보려 했어요. 공연도 많이 다니고 그러니까 내가 잘 하나보다 생각도 하고. 그런데 어느 날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내 음악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 태도가 좋아서 사람들이 불렀던 거예요. 어느 순간 나도 사람들을 신경 쓰게 되고….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 입장에선 진지하게 쓴 노래인데 태도가 재미있어 보이니 그렇게 읽히기도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아는 사이가 아닌 다른 스타일로도 해보고 싶어서 3집의 프로듀싱은 다른 사람에게 맡긴 것이기도 하고. 그렇게 다 해보니까 좋더군요. 사람들의 기대에 따르지 않고 외롭게 늙어 죽더라도 원래 음악 할 때부터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싶어요.

참 어려운 일이죠. 음악가로서 사람들이 내게 무언가를 기대했으면 하고,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게 너무 싫기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기도 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주고 싶기도 하고.
나도 그래요. 그 두 마음이 늘 싸웁니다. 나 자신이 나이 들수록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게 되면 어떻게 하지?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이렇게 늙어 외롭게 죽어버리는 건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아직은 잘 살고 있으니까. (웃음)

다시 귀농하실 생각이 있나요?
나는 이제야 내 성향을 안 것 같아요. 갈수록 너그러워지는 게 아니라 더 까칠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술자리에서 사람들 헛소리하는 것도 듣기 싫고, 남 욕하고 안 해도 되는 소리 하는 것도 이상하게 들리고, 더 힘들어지고. 집에 혼자 가만히 있거나 음악 듣거나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니면 뭐 연애라도 하던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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