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없이 자본주의 대안을 세울 수 있다고 믿는 거야?

왜 여성만 페미니스트가 돼야 하나

“이런 말 하면 욕먹겠지만, 나 진짜 이해 안 되는 게 있는데 좀 물어봐도 돼?”

2차 와서 내내 졸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 일어났는지 낡은 노조 조끼의 지퍼를 잠그며 자세까지 고쳐 앉는다. 짐작되는 질문들, 아마 함께 활동하는 이들에게 차마 묻지 못한 것들 일 게다. 오래된 지인들 틈이라 약간 더 정직해 질수 있는 시간. 식은 술국을 뒤적이며, 물어보라고 답을 하자마자 말을 쏟는다.

“우리 조직 그 성폭력 사건 있잖아. 솔직히 내 생각에는 운동사회 성폭력 피해자들이 너무 예민한 것 같아. 뭐 성폭력 문제가 사소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저렇게 까지 힘들어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게 이해가 안 돼. 솔직히 피해자 코스프레를 너무 심하게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고.”

당혹스럽다. 이런 이야기는 자꾸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공식 회의에서는 피해자 치유와 복귀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고매하게 만장일치로 동의했던 수많은 이들. 그들 중 마음속에 저런 의구심을 품었던 이가 얼마나 많을까.

“음…. 나는 거리에서 낯모르는 이에 의해 일어나는 성폭력과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은 완전히 다를 수 있다고 봐. 우리의 가치를 향해, 함께 저항을 만들어가던 동지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가해자와 피해자가 개인적으로 얼마큼 친한 동지적 관계였느냐를 떠나서, 자신이 공동체라고 믿던 공간에서 성폭력이 일어났다는 것. 그 자체가 운동에 대한 신념, 동지에 대한 애정,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총체적으로 훼손당하는 경험일 수 있잖아. 그러니까 성폭력 피해 경험이 성적 불쾌감, 모멸감 이외에 더 복합적인 상처와 분노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이야. 누군가는 운동사회 내 성폭력을 친족 성폭력에 비유하기도 하더라.”

“헐…. 완전 반대잖아, 모르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이 더 두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운동사회 성폭력이 더 큰 상처를 남기겠네. 이 당연한 걸 왜 나만 몰랐지. 이제 피해자가 좀 이해된다.”

저 이해가 얼마나 갈까. 시간이 지나면 피해자에 대한 또 다른 의구심이 고개를 들겠지. 나는 많은 이들이 피해자의 어려움을 몰라서가 아니라, 피해자를 이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모르게 된다고 본다. 피해자 유발론은 여전히 성행하고, ‘성폭력을 사소하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이라는 말 밑에 사소하다는 믿음이 깔린 경우를 많이 봤다.

“이렇게 찬찬히 설명해 주니까 얼마나 좋아. 야, 너 안 본 사이 많이 변했다. 페미니스트들이 다 좀 이렇게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 줘야지. 요즘 우리 노조 분위기는 뒤풀이에서 조차 말 한마디 하기가 무서워. 메갈리아나 운동사회 성폭력 같은 말 하다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아휴…. 여성들이 얼마나 차별받는지 아느냐면서 공격한다니까. 뒤풀이 하다 보면 이런저런 얘기 편하게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요즘 너무 불편해졌어.”

저 말을 듣고 나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말하는 문장마다 한 시간짜리 이야기 감이다. 모든 페미니스트가 친절히 설명해줘야 한다는 저 믿음. 술자리에서 성희롱하는 사람보다, 성희롱에 문제제기 한 사람에게 분위기 깬다는 눈빛이 돌아가고.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성폭력 피해를 말해야 한다고 주문하는 사회. 소수자들의 차별 피해는 언제나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센스 있게’, ‘현명하게’ 말해야 한다.

“야, 한숨 나온다. 이 무자비한 차별 현실에 대해, 이제야 좀 더 많은 여성이 적극적으로 말하기 시작한 거야. 더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보통 여성들은 뒤풀이 자리에서, 너처럼 편안하기만 했던 이가 드물걸. 그러니까 많은 여성은 성희롱적 발언이 농담이랍시고 술자리에 흘러다닐 때, 못 들은 척할까, 한 마디 맞짱 뜰까 갈등해. 매번 말하자니 쌈닭이 되는 것 같고, 침묵하자니 비겁해지는 것 같아서. 그리고 혹시나 모를 성추행에 대비해서, 아무리 취해도 약간의 긴장은 버리지 못하지. 너는 뒤풀이 끝나고 택시를 타고 꾸벅꾸벅 졸 때, 여성들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기를 바라며 술 취한 상태에서도 택시에서 잠들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써. 왜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야? 이런 이야기는 SNS에 차고 넘치는 데. 너는 그 불편함과 긴장감을 늘 안고 사는 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말했겠지. 그래서 그들은 여성차별 현실에 대해 정확히 말해줬을 테고. 그런 정당한 목소리를 듣는 게, 불편하다고 징징대는 거야?”

“야, 징징대다니. 그냥 좀 불편했다는 걸 말해본 거야. 그런데 사실 여자들이 차별을 약간 받는 건 맞지만, 요즘은 너무 과하게 말하잖아. 강남역 사건 때,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말도 그 심정은 알겠는데, 과해. 한국이 이슬람 쪽처럼 명예살인인가 뭐 그런 게 있는 것도 아니고.”

“흠…. 명예살인. 어떤 여성을 다른 사람이 죽이면 살인죄를 적용받지만, 남성 가족(아버지, 오빠, 아들)이 죽이면 명예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라고 봐. 그래서 별도의 규정을 적용받고, 가볍게 처벌받는 경우가 많은 거지. 그런데 한국에서 가정폭력으로 남편이 아내를 죽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남편에게 과실치사죄를 적용해, 반면 아내가 남편에게 맞아 죽지 않기 위해 그를 죽이면 살인죄로 처벌 받는 경우가 많아. 형량이 과실치사는 최대 3년인데, 살인은 최소 5년에서 무기징역이야. 알겠어? 한국도 그리 나은 현실은 아니라는 거야.”

“가정폭력으로 살인까지 가고 그런 건, 극소수 얘기잖아. 너무 극단적 얘기다.”

“후…. 그래? 그럼 다른 예를 들어 볼까. 요즘 고령화 시대인데, 한국 여성 노인 빈곤율이 OECD 1위야. 한국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임금이 116만 원, 남성 정규직 노동자 327만 원이라고 해. 여성의 빈곤화가 이렇게 뚜렷한데, 여성이 차별 받는다는 얘기가 과장 됐다고?

또 다른 얘기를 해볼까. 김포공항 청소노동자들이 빈번한 성추행 고통은 토로한 기사 봤지. 그중 한 노동자가 모멸감에 자살 기도를 했었다는 이야기에, 그런 일터를 왜 그만두지 않았는지 의구심을 갖는 이들이 있더라. 현대 남성노동자에게는 그 높은 산재율에도 왜 일터를 그만 두지 않았냐고 의구심을 갖지 않잖아.”

“어…. 글쎄…. 모르겠네. 여성들도 차별을 받긴 하지. 소주나 더 시킬까?”

이 녀석과의 대화에서 뭘 기대한 것도 아닌데, 답답하다. 지난 몇 달간 메갈리아를 둘러싼 진보정당, 야당 성향 남성이니 하는 이들의 공격과 분노. 그 기저에 흐르는 것 중 하나는 여성은 그다지 차별받지 않는다는 믿음인 것 같다. 지독히도 찌질한 현실.

“자본주의 사회 노동과 빈곤문제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훨씬 차별적 위치에 놓인다는 것을 설명했는데도 부족하다면, 뭘 더 설명해야 하는 걸까. 셀 수 없이 많은 여성이 일터에서 성추행이라는 ‘산재’를 입고 있는데, 뭘 더 입증해야 하는 거지? 이놈의 사회는 좌우상하 다들, 왜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여성이 차별 받는다는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걸까?”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여성이 차별 받는다는 걸 인정하면 골치 아픈 페미니즘도 공부해야 하잖아.” 녀석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이 토론은 다음에 하자며 꽁지를 뺀다. 저런 녀석들의 전형적 태도. 녀석이 일어난 빈 의자에 대고 혼자 말한다.

“생각해봐. 사회에서 돈을 주고 물건을 산다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자연스러운 게 아닐 수 있다는 걸 알고 나니까 사회가 낯설게 보였던 경험. 그냥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라고 부르니까 당연하다고 여겼던 게 낯설게 보였던 그 순간 말이야. 사회를 ‘가부장제 사회’라고 부르면 ‘자연스럽다’라고 여겼던 수많은 것들이 낯설게 느껴져.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이 자연스럽지 않고, 그 이분법이 낯선 것임을 느끼게 돼. 그리고 그게 다른 세상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얼마나 차단하고 있는지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곤과 노동이 이토록 성별화 되어 있는데, 페미니즘 없이 이 자본주의를 어떻게 뚫고 나갈 수 있을지 대안을 세울 수 있다고 정말 믿는 거야? 어떤 여성학자가 이런 말을 했지.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철학인데, 왜 여성만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가?’ 어떻게 생각해?”(워커스 23호)
덧붙이는 말

반다 : 일상의 사소한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팔레스타인평화연대 등에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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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 운동사회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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