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같은 안전 교육, 누구를 위한 것?

[워커스 24호/이슈]

  사진 / 정운

‘지진 안전신화’는 무너졌다. 지난달 경북 경주시 남남서쪽 9㎞ 지점에서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했다. 근대적 지진 관측이 시작된 이래 최대 규모라는 뉴스가 퍼졌다. ‘일본이 막아줘 한국은 안전하다’, ‘우리는 원래 지진이 크지 않다.’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지표면 아래서의 움직임을 두고

‘안전하다’고 믿어온 ‘지진 안전신화’가 깨졌다. 규모 5.8을 경험한 그 날 이후에야 한반도에서 일어난 지진 기록이 총 1,664회였고, 1643년 울산 근처에서 규모 6.7의 지진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신화가 무너진 후 우리는 어떻게 변했을까. 울산과 부산, 경주와 제주, 서울 등에서 여진이 발생했지만 지진에 대한 정보는 여전히 더디다. 학생들이 지진을 느껴도 학교에서는 여전히 ‘가만히 있으라’하고, 내진설계가 미약한데도 무조건 ‘책상 밑에 몸을 숨기라’고 한다. 대한민국에 안전은 있을까. 대한민국의 안전교육은 어떤 변천사를 거쳤을까. 《워커스》가 짚어봤다.

“‘빨간 물’들라 정신 차려라”

60년대 말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건 단 하나였다. ‘북한’이다. 지진이나 태풍 등 재난재해에 대비한 안전교육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북괴가 언제, 어떻게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다른 재난을 대비할 틈이 없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군 특수부대 요원 김신조 등이 ‘박정희의 목을 따러왔다’며 청와대를 기습한 이후 안보에 대한 불안이 더 거세졌다. 이후 일반 대학생과 고교생을 대상으로 안보의식을 높이기 위한 교육이 시작됐다. 1969년 ‘교련’ 과목이 탄생했다.

“제일 무서운 시간이었어요. 각 시도에 시범학교를 하나씩 만들어서 이 학교는 실총으로 연습했는데 우리 학교가 시범학교였죠. M1 실총을 갖고 총검술을 배우고 그랬어요. 국군의 날 행사에도 동원되고 사열도 배우고. 다른 수업은 몰라도 교련 수업은 빠질 수 없었어요. 빨간 물들면 안 된다고 혹독하게 배웠습니다.”

당시의 안전과 안보는 모두 교련으로 시작해서 교련으로 끝났다. 서울의 한 남자 공립고교를 다닌 1962년생 A 씨는 고교 3년 내내 교련을 배웠다. 대학 1학년 때는 ‘교련거부 운동’을 하다 군대에서 3개월 연장복무 했다. 그때는 그랬다. 교련이 선택이 아닌 필수과목이었기에 교련을 배우지 않으면 제적이었다. 결국 A 씨는 4학년 때 교련을 재수강하고서야 대학을 졸업했다. 북한 소리만 나오면 토 달지 말고 명령에 복종하는 것. A 씨가 배운 안전, 안보다.

고교 시절 배운 교련 교과서는 군사학문과 다르지 않다. 1979년 3월 1일 초판 발행된 고교(남자용) 교련 교과서를 살펴보면, 1편에는 공산주의의 침략과 북한 공산주의자의 대남 전략에 대해 상세히 적어 놨다. “북한 공산주의자는 6.25 전쟁에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재차 남침 야욕을 버리지 않고 군사력 증강에 광분하고 있다.” 17p에 나온 설명이다. 이후 총검술의 ‘찔러 자세’와 ‘빼는 자세’를 비롯해 조준선과 조준 연습에 대한 사격술로 이어진다. 구급법은 전쟁 시 부상을 당했을 때 응급처치와 일반 응급처치로 나뉜다. 일반 응급처치의 경우 독사에 물렸을 때와 열 소모증, 차갑고 습한 호 속에 오랫동안 있거나 젖은 군화를 오래 신고 있을 때 생기는 ‘참호족’에 대한 예방책을 설명한다.

“교련 시험은 이론도 있긴 했지만 제대로 설명을 듣고 배운 기억은 없어요. 다만 교련 수업 제대로 안 들으면 대학 가서 데모한다고 잘 배우라고만 강조했죠. 시험은 어디서 무엇이 나올지 찍어주고 거기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나왔고요. 중요한 건 집총이나 제식훈련이었어요. 응급처치도 있긴 했지만 제대로 배운 기억은 없죠. 교련은 대부분 운동장에서 사열 맞추며 보내는 시간이었어요.” 지역의 명문 국립고교 출신인 1972년생 B 씨는 당시 교련 수업을 ‘군기’ 잡는 시간으로 기억한다. 전쟁이 언제 날지 모른다며 기합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배웠다. 목소리 크게 열에 맞춰 걸으며 ‘국가의 안전’을 배웠다.

90년대 말 교련은 희미해졌다. 서울의 남자공립고교를 다닌 1979년생 C 씨는 교련 수업이 수명을 다해 학생 중 누구도 집중하지 않는 시간으로 기억했다. 제식훈련은 있었지만 모형 총을 들어본 기억은 없다. 고무총은 구령대 밑에 처박혀 있었다. 안전에는 무지했고 북한에는 관심 없던 시절이다. “2학년 담임이 교련 선생님이었어요. 선생님을 보며 놀고먹는 직업을 가졌다고 생각했죠. ‘우리의 주적은 누구인가’와 같은 문제가 필기 시험문제로 나왔어요. 답은 당연히 ‘북한’이죠. 1학년 때 3학년 선배들이 교련복 입은 걸 봤지만, 우리 학년은 입지 않았어요. 얼마 후에 교련이 없어질 거라는 소문도 들었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과목이었어요.”

교련은 몸집을 줄인 채 생명력을 이어갔다. 1992년, 제6차 교육과정을 통해 교련의 총검술, 제식훈련, 구급법 등 실습이 삭제됐다. 교과서 중심의 이론공부만 남았다. 97년에는 필수과목이었지만 제7차 교육과정을 통해 이마저도 선택과목으로 변경됐다. 이때부터 각 학교에서는 교련을 자율에 맡겨 가르칠 수 있도록 했다.

D 씨가 2001년도에 입학한 서울의 사립 여자고교는 ‘교련’을 선택해 가르쳤다. D 씨가 배운 교과서의 앞쪽에는 제식훈련, 총기훈련 사진이 실려 있었지만 선생님은 뒷부분만 가르쳤다. 붕대 감기와 심폐소생술을 배웠지만, 실습은 한 적 없다. 외워서 시험을 봤을 뿐이다. 2000년대 교련 교과서에도 북한의 흔적은 남아있다. 혈연 중심의 독재 체제로 유지하며 평양의 주체탑, 주석궁 등 전시용 사업에 과다한 비용을 지출하는 국가라고 설명한다.

교련은 2011년이 되어서야 공식 명칭이 사라지고 ‘안전과 건강’으로 대체됐다. 40년 역사를 지닌 유일한 안보 과목. 전쟁에 대비한 안전·안보교육이었으며 주적은 명확했고 훈련은 계속됐다. 가장 오래 교과과정에서 안전, 안보를 차지했던 교련은 처음도 끝도 ‘북한’을 경계한 채 사라져갔다.

매뉴얼은 완벽하다

교련이 사라진 후 안전과 안보는 ‘사고가 나면 챙기는’ 식이다. 초중고교의 안전교육은 어떤 사고가 났느냐에 따라 그해 안전교육의 비중이 달라진다. 교육부의 공문은 빠르고 단호하게 학교현장의 안전교육을 강조하지만, 학내에서는 이를 시행하기 만만치 않다. 안전교육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은 이론과 실무의 괴리를 호소한다. 실제 사고가 났을 때 대피가 가능한 수준까지 가르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안전의 종류도 다양하다. 재난재해에 대비한 안전이 있는가 하면, 과학실습, 체육 등 교과과정 중에 발생할 사고에 대비한 안전교육이 있다. 수학여행이나 소풍에 대비한 안전교육도 있고, 학교폭력이나 성폭력 관련 교육도 있다. 관련 법령도 많다. 학교 안전사고 예방 및 보상에 관한 법률, 학교보건법, 아동복지법, 소방기본법,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등 학교 안전교육 관련 법령은 여러 가지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교육 내용과 실시주기, 시간이 규정돼 있는 것은 아동복지법 시행령뿐이다.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서도 내용 및 횟수를 제시하고 있으나, 전반적인 안전에 관한 교육이 아니라 학교폭력, 성매매, 성폭력 등의 일부 내용에 한정된다.

학교에서는 쪼개져 있는 안전교육을 어떻게든 배치하고 시행해야 한다. 학생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했는지보다 맞춰진 시수대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목표다.

“생각해보세요. 안전은 무조건 실전연습이에요. 말이 중요하지 않고 한 번이라도 연습하며 준비한 것을 몸이 기억하는 게 중요합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택하는 건 시청각 교육 정도입니다. 며칠 전에도 아이들에게 태풍대비, 재난대비에 관한 동영상을 보여주며 비상시에는 어디로 대피하고 비상 물품은 무엇인지, 비상 가방을 마련해 두라고 설명했죠. 그뿐입니다. 확인할 수 없고 아이 중 몇 명이나 이 얘기를 귀담아들었는지 모르죠.”

중학교에서 생활건강부장을 맡고 있는 E 씨는 말로 하는 안전 교육의 한계를 설명했다. 이마저도 안전교육의 종류가 너무 많아 하나라도 제대로 시행하기 어렵다고도 말했다.

“성교육만 해도 5가지예요. 성매매, 성폭력, 성희롱 종류가 한둘이 아닌 데, 그걸 다 나눠서 하라는 거죠. 결국 6, 7교시 끝나고 하거나, 다른 수업 시간을 빼서 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요. 보통 창의적 체험활동에 안전교육을 하는데, 창의적 체험활동은 봉사활동, 진로활동 등 할 게 많은 시간입니다. 지진이나 태풍, 이런 재난재해는 정말 할 시간이 없어요. 기껏해야 이번 주에 지진이 발생했다면, 담임선생님이 조회시간에 한 5분 얘기하는 식이죠. 물론 이것도 안전교육을 한 수업시수에 포함됩니다. 그러니 서류상으로는 안전교육이 완벽하게 이뤄졌죠.”

학생 역시 안전교육이 기억에 남을 리 없다. 그나마 성폭력, 학교폭력은 경찰이나 외부 강사가 진행한 수업이라 좀 낫지만, 그 외에는 무지하다. F 씨가 고교 3학년 때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 당시 2학년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다. 이들은 단원고 학생들이 탄 ‘세월호’로 제주도를 갈 계획이었지만 예약이 미뤄졌다. 참사가 나던 날 갑자기 선생님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F 씨의 학교가 세월호를 탔고 사고가 발생했다는 언론사의 오보 때문에 학교로 문의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참사가 내 일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학교에서 안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고는 느끼지 못했다.

“처음에 세월호에 탑승한 학교가 우리 학교라고 나왔어요. 다들 많이 놀랐죠. 하지만 참사 이후 수업시간이나 별도의 시간에 안전 교육을 한 기억은 없어요. 여전히 일 년에 한 번씩 하는 소방대피 훈련만 했을 뿐이에요. 경보음이 울리면 전교생이 반 순서대로 한 줄로 운동장에 나가는 것, 이 정도 교육이요. 그런데 훈련이 아니어도 학교에서는 원래 경보음이 자주 울렸어요. 고장이 났는지 실제 불이 나지 않아도 몇 번씩 울려댔죠. 처음에는 뭐지, 불이 났나 하다가 몇 번 반복되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또 울리네 하고 말았죠.”

서울의 한 고교에서 생활지도 부장을 맡은 G 씨도 매뉴얼은 완벽하지만 실천은 어렵다고 토로한다. 안전 매뉴얼을 마련하고 정규 수업 중 교과별로 주의해야 할 안전, 재난 대응 등을 책자로 만들었지만 구비자료일 뿐, 제대로 교육할 시간은 없다는 설명이다. 일 년에 한 번, 화재 및 지진대피 훈련 때 유인물로 짧게 설명한 뒤 전교생을 운동장으로 모이게 하는 정도다.

초등학교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2015 개정교육과정은 초등 1~2학년에 68시간을 채우는 ‘안전생활’ 교과를 새로 만들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을 강조한 변화다. 문제는 초등교육은 활동이 많고 체험할 내용이 많아 사실상 모든 시간이 다 안전교육 내용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초등학교 현장에서는 이미 1, 2학년 통합교과에는 안전 관련 내용이 많은데, 안전교과가 신설되면 통합교과와 중복되는 내용이 생기고 시간 채우기 시수만 늘어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역의 한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H 씨는 “2015 개정교육과정(안)에서 초등 저학년 수업시수가 늘어난 것은 외국과의 비교연구 결과 시수가 부족하다는 근거로 출발했어요. 학교 현장이나 학부모들은 학습 부담을 늘리지 않고, 놀이 시간이나 쉬는 시간 확보 등을 말해왔습니다. 앉아서 말로 가르치는 안전이 아닌 직접 체험과 활동으로 연결된 안전교육이라야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한 교과가 새로 생기면 관련 연구가 있어야 하지만 2017년부터 정규 편성될 ‘안전생활’은 그런 과정이 생략됐다. “어느 날 교과목이 만들어지기만 한 거죠. 세월호 참사의 책임회피를 위한 정치적인 선택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아요.”

안전교육이 강화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사회적 의식도, 교육도 그에 맞추어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학생들이 안전의식이 부족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지진이 발생해도 ‘가만히 있으라’는 현장에서 세월호 참사를 이유로 교과목을 신설하고 교육을 강화한다고 말한다. 이마저도 교육의 실효성을 따지고 연구 기간을 충분히 갖기보다는 수업 시수를 채우고 교과목을 만들어내는 식이다.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안전 교육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을까. (워커스 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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