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움직이는 '포스트잇' 미디어의 정치

[워커스 24호] 기술문화비평

  사진 정운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바꾸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해 우리 감정은 세상의 일에 그리 쉽게 반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감정은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갑자기 숭고함으로 고양되기도 한다. 우리 생각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텔레비전에서 온종일 비추던 세월호 침몰 현장을 마주하고도 아득하게 먼 사건으로 받아들이던 사람도, 추모 현장에 붙은 짧은 편지의 한 구절에 세계관이 바뀌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올해 들어 발생한 여러 사건과 사고, 특히 강남역 살인 사건과 구의역 지하철 사고의 추모 현장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우리에게 이 시대 사람들의 감정과 소통 그리고 미디어의 본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 추모와 애도의 장소를 둘러싼 우리의 기억 속에는 아마도 ‘포스트잇’(Post-it)이라는 물건이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저것은 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나의 눈과 마음을 찌르는가?

'포스트잇'이라는 미디어

온 세상이 디지털 데이터로 표현되고, 우리 삶이 소프트웨어와 알고리즘에 의해 조절되고, 네트워크가 모든 것의 터전이 되어버린 시대에 조그만 사각형 종잇조각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누구의 책상 위에나 한 묶음 쌓여있기 마련인 흔한 물건. 뒷면에 약한 접착제 성분이 있어 미국인들은 포스트잇이라는 상표명 대신에 종종 스티키 노트(sticky note)라고 부른다. 끈적거려서 쉽게 붙지만, 또 금방 떼어버릴 수도 있고 저절로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이것의 주 용도는 무언가 짧은 내용을 ‘기억’하려고 혹은 잊지 않으려고 메모하여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두기 위한 것이다. 혹은 다른 이들에게 어떤 것을 잊지 말라고 짧은 메시지를 붙여두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한 연구에 따르면, 설문조사를 부탁하는 문서에 ‘답변 후 돌려달라’는 포스트잇을 붙이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설문조사 응답률을 보였다고 한다. 무엇이 응답률을 두 배로 올렸을까? 완성 후 돌려달라는 손 글씨가 씌어있는 포스트잇을 무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손 글씨로 전달된 메시지를 받는 사람은 마치 그것을 개인적인 부탁처럼 느끼곤 한다. 포스트잇의 글자들이 끈적하게 우리에게 들러붙어 있어서일까? 나아가 그것은 받은 이 스스로가 매우 특별한 요청을 받은 중요한 사람처럼 느끼게 한다. 말하자면 포스트잇은 그것을 전달하는 과정에 매우 사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포스트잇을 하나의 미디어로 볼 수 있을까? 미디어 혹은 매체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나 환경이라고 한다면, 포스트잇은 아주 원시적인 최소한의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 안에서 실시간으로 엄청난 분량의 정보와 데이터를 교환하는 초연결 사회에서, 빅 데이터와 인공지능이 우리를 조절하고 가상현실과 로봇의 기술이 미래를 조형해내는 속칭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포스트잇을 미디어라고 부른다면 너무나 과도한 평가가 아닐까?

최근 우리 사회에서 발생한 사건 사고의 현장에 추모의 목적으로 붙여진 포스트잇을 보아 왔다면, 그것은 단순한 미디어가 아니라 엄청난 역량을 지닌 미디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강남역 10번 출구의 캐노피를 가득 덮었던 화려한 형형색색의 포스트잇과 구의역 9-4번 승강장에 붙었던 크고 작은 종이에 쓰인 손편지들은 단순한 추모의 의미, 그것을 통한 위안과 애도라는 것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사람들을 그 현장으로 불러내고 직접 몸으로 사회에 항의하며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즉각적인 감정과 목소리를 표현하도록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우연히 지나가다 현장에 들렀던 사람들도, 포스트잇을 붙여야 한다는 생각에 현장에 나갔던 사람들도, 포스트잇에 몇 마디 끄적이고 붙이는 행위에 불가항력으로 이끌렸을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는 아마도 추모 행위, 사회의 불의에 대한 항의, 포스트잇을 붙이는 행위가 결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소셜미디어의 시대, 포스트잇의 정치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익히 알고 사용해왔던 것(사무용품)과는 달리 포스트잇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 1980~90년대의 시위 현장과 담벼락에 붙였던 대자보와 2000년대 이후 촛불 집회에서 경험한 손팻말(피켓)을 거쳐, 2010년대 중반 우리는 드디어 포스트잇에 도달했다. 대자보-손팻말-포스트잇을 거치는 동안 매체의 크기는 급격하게 줄었고 휴대가 간편해졌으며 동시에 의견을 표출하는 주체의 단위도, 전달하는 이야기의 크기도 작아졌다.

대자보가 개인이 아닌 단체의 주장을 여러 개인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면, 손팻말은 개인의 의견을 여러 개인에게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반면 포스트잇은 개인의 가장 내밀한 감정과 의지를 각인해낸다. 포스트잇을 붙이는 것은 굳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의지의 표현이자 감정 전달의 행동이다.

포스트잇은 대자보-손팻말의 계보를 잇는 (종이 재료라는 점에서) 원초적, (개인이 직접 손으로 쓴다는 점에서) 아마추어, (디지털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날로그, (뉴미디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구(舊) 미디어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포스트잇은 모바일, 인터넷, 소셜미디어의 시대에 역행하는 듯 보인다. 반면 즉각적이고 빠른 짧은 글쓰기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의 자기표현, 소통, 공유의 형식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시위와 추모의 장소에 등장한 포스트잇을 곧장 소셜네트워크에 익숙한 세대의 당연한 반응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소통이란 짧고 즉각적인 메시지의 교환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포스트잇의 한정된 작은 표면에 익명으로 즉석에서 메시지를 남기고 개개인의 내적인 이야기를 수북하게 겹쳐 증폭, 확산시키는 것이 그것과 닮았다고 보는 것은 일면 자연스럽다. 아무래도 소셜네트워크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의사를 표현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방법도 그 기술과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약자들과 소수자들의 정동 미디어

그렇다고 추모 현장에서 포스트잇을 붙이는 행위를 소셜네트워크에서 익명으로 한두 마디의 문장을 던지고 마는 가벼운 행위로 환원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우리는 앞서 말한 두 사건의 추모 현장에서 포스트잇이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미디어로서 기능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포스트잇이 등장하게 된 국면과 역할을 떼어놓아서도 안 된다.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그 형식은 새롭지 않으나 역할은 새롭다)과 그것의 정치적 국면은 분리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만 할 것이다. 왜 하필이면 여성과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을 추모하는 현장에 포스트잇이 등장했으며, 어째서 그것은 애도의 장소를 공감과 분노를 촉발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는가?

포스트잇이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 미디어로서 포스트잇이 사건 현장에, 바로 그 장소에 붙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장소가 아니라면 절대로 형성할 수 없었을 어떤 장소, 특정적 감각 혹은 정동(affect)이 바로 포스트잇을 통해 표출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매우 세심하게 준비된 선언문 같은 대자보나 목소리를 높여 주장하기 위한 피켓과 달리, 포스트잇에는 바로 그 장소에서 개인의 내면에 즉시 각인되는 정동, 신체적 체험, 나아가 정치적 각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일상적인 여성혐오에 노출되고 성차별과 폭력의 트라우마를 겪은 여성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 그리고 수많은 비정규직 청년들과 공시생들이 직접 현장에서 포스트잇에 자신의 미안함과 분노와 아픔을 손수 적어 붙이는 이유다.

포스트잇은 매우 단순한, 아니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소통 도구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포스트잇의 장점을 과대평가하면서 역시 아날로그 종이의 시대가 좋았다거나 네트워크를 통한 소통이 인간성의 피폐함을 가져올 뿐이라는 식의 결론은 우리 정치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치 손 글씨로 쓴 편지라야 인간의 냄새와 정이 있다는 식으로, 포스트잇이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인간적 시간과 감각을 되돌려 놓는다는 향수에 젖을 필요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한국여성민우회의 최근 시도가 눈길을 끈다. 일상과 공공장소에 각종 성차별과 소수자 혐오, 외모 지적 등을 버젓이 드러내 놓은 광고물과 홍보물에 “고조선이야 뭐야~”, “외모 얘기 그만 좀”, “안 웃겨요” 등의 포스트잇을 붙이는 포스트잇 행동주의. 포스트잇은 우리의 마음을, 아니 우리의 몸과 머리를 움직이게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소통 미디어, 첨단 기술의 미디어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새로운 정치를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다.

포스트잇은 끈적하게 달라붙어 우리를 기억하게 한다. 잊지 말라고 한다.
덧붙이는 말

김상민-문화연구자, 서울대 강사, <문화/과학> 편집위원. 미디어 문화와 기술미학 분야 연구. <속물과 잉여> 공저, <불순한 테크놀로지> 공저, <디지털 자기기록의 문화와 기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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