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곳’은 없었다

[워커스 24호] 현장에서

  사진/ 정운 기자

나는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동자 중 한 명이다. 노조에서는 노래패를 만들어 노래하고 있다. “동양시멘트지부 노래패 민패입니다!” 곧바로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민폐’로 알아들은 사람들 웃음에 무대 위에 서 있는 우리도 조금은 긴장이 풀린다.

민패는 주로 노동가요를 부른다. 그런데 최근에는 대중가요를 한두 곡 부르기도 한다. 그 중 한 곡은 나비를 주제로 담고 있다. 노조를 결성하고 해고되자, 전국 각지에서 투쟁하는 여러 노동자를 많이 만나게 됐다. 그들과 함께하다 보니 처음에 내가 가졌던 목표를 넘어 그전까지와는 ‘다른 삶, 다른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 불현듯 떠올랐고, 나는 나비 노래를 할 때면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다.

책 속 주인공은 작은 애벌레다. 열심히 먹고 자라던 줄무늬 애벌레는 ‘그저 먹고 사는 것만이 삶 전부는 아닐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무언가를 찾아 떠난다. 다른 애벌레들을 만나서 반가웠지만, 그들은 먹는 일에 바빠서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줄무늬 애벌레는 거대한 기둥을 발견한다.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애벌레들로 이뤄진 기둥이다. ‘그래, 내가 찾으려고 하는 것이 저곳이 있을 거야’라고 믿는다. 하지만 줄무늬 애벌레는 기둥을 오르며 사방에서 떠밀리고 차이고 밟힌다. 그 더미 속에서 친구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을 발판 삼아 올라가야 한다. 밟느냐 밟히느냐, ‘오로지 남을 딛고 올라서야 하는 기둥’이었다. ‘꼭대기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으며, 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의문이 들었을 때 그곳에서 만난 노랑 애벌레는 “그걸 알아낼 도리가 없어서 해서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단정해버렸어”라고 말한다. 줄무늬 애벌레는 방금 이야기를 나눈 노랑 애벌레를 밟고 올라가려는 자신이 미워졌고 ‘저 위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런 짓을 하면서까지 올라갈 가치는 없어’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둘은 함께 기둥에서 내려온다. 둘은 서로 사랑하면서 평온한 날을 보내지만, 줄무늬 애벌레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 다시 기둥에 오른다. 그전보다 더 치열하게. 혼자 남은 노랑 애벌레는 외로웠고 어딘가 있을 것 같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 방황한다. 그러던 중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늙은 애벌레를 만난다. 노랑 애벌레는 그가 변을 당했다고 생각했지만 늙은 애벌레는 말한다. “변을 당한 게 아니란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이럴 수밖에 없단다.” “나비는 아름다운 날개로 하늘을 날며 꽃이 필 수 있도록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사랑의 씨앗을 날라준단다. 따라서 나비가 없어지면 꽃도 자취를 감추게 되지.” 그 말에 노랑 애벌레는 가슴이 뛰었다. 어떻게 나비가 될 수 있냐는 노랑 애벌레의 질문에 늙은 애벌레는 답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간절히 날기를 소원해야 한다.” 이후 노랑 애벌레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 나비가 된다. 그리고 줄무늬 애벌레에게 우리 모두 나비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고 함께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오른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애벌레 기둥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다들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대다수 사람은 밟히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살아가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기둥의 밑바닥에 있는 나를 보았다. 힘없는 사람은 버티기 힘든 기둥의 밑바닥! 생존경쟁에 매몰되어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사람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나비가 되어보지도 못하고 그저 벌레인 채로 살다 죽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나비가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치열한 경쟁의 무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다른 삶’을 살 방법이 어딘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 뿐이었다. 그나마 그런 생각도 기둥의 밑바닥에서 금방 짓눌려졌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을 읽었을 때의 감동 또한 잠시뿐이었고, 이런 종류의 동화 같은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됐다. ‘성공하는 법’ 같은 제목이 붙은 책 또한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됐든 나는 열심히 일했다. 돈은 좋다 싫다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먹고 살기 위해 일했다. 이왕이면 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곳’을 찾아다녔다. 때로는 돈벌이와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직업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친구들에게 역마살이 끼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런 내 삶은 항상 힘겨웠다. 본격적으로 현장 노동자의 길로 접어들었을 때, 나는 어렵사리 인천에 있는 컨테이너 터미널에 장비 기사로 입사했다. 수출입 컨테이너 물량을 배에 실어주고 내려주고 하는 곳이었다. 지역에서는 다들 부러워하는 직장이었다. 그런데 사실 내가 소속된 곳은 하청업체였다. 사고 없이 일만 잘하면 원청으로 발령을 내준다고 했지만, 막상 발령받는 이들은 경력과는 무관하게 줄 있고, 빽 있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정규직이 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곳을 찾았다. 부평에 있는 자동차 생산 공장에서 수출 차를 운송하는 일. 사람들은 임금이 높은 회사라 들어가기 힘들 거라고 했지만 난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하청회사에서 도급제로 일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참고 일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배차가 중단된 적이 있었다.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누군가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고 이를 개선해 달라는 편지를 업체 사장에게 썼기 때문이다. 사장은 편지 쓴 사람을 색출하라고 지시했고, 그 전까지는 배차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여서 웅성웅성하더니 다 같이 누군가를 지목했고, 지목당한 사람은 회사에서 잘려 나갔다. 난 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다시 ‘다른 곳’을 찾고 또 찾았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다른 곳’은 없었다.

2014년 5월 17일. 일을 마친 동료들이 계속해서 모여들었다. 마을에 있는 문화예술회관의 어두침침한 공연장에서 우리는 무언가에 쫓기듯 노동조합 가입원서에 서명했다. 동양시멘트에서 하청업체로는 처음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한 것이다. 밤낮없이 하루 16시간 노동을 수시로 하면서도 정규직의 절반도 되지 않는 임금을 받으며, 인격적으로도 무시당하던 노동자들이, ‘먹고 사느라 바빠서 말도 하지 않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 것이다. 가슴이 뛰었다. 노랑 애벌레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전원 해고되었다. 고용노동부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입사 일부터 동양시멘트의 정규직이라고 판정했지만, 회사는 도급계약 해지를 핑계로 101명을 집단 해고 했다. 이후 동양시멘트는 삼표 자본에 인수되었고 삼표 자본 또한 해고노동자들을 탄압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이 떠나갔다. 가정불화와 생활고를 겪는 것은 기본이고, 7명의 노동자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으며, 악랄하게도 회사는 50억 원이 넘는 손해배상청구소송으로 우리를 압박했다. 부당하게 해고된 지 600일이 지났다. 무더위에서, 빌딩 숲 사이로 부는 차디찬 칼바람 속에서 서울 삼표 본사 앞 노숙투쟁을 한 지도 500일이 되어간다. ‘다른 곳’을 찾는 것이 더 나았을까? 노랑 애벌레를 뒤로하고 다시 기둥을 올라간 줄무늬 애벌레는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방에 온통 애벌레 기둥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오른 기둥은 수많은 기둥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는 민패에서 함께 부르는 노래를 통해 사람들에게 꼭 말하고 싶었다. 애벌레 기둥에서 내려온 노동자들이 곧 나비이고 꽃들에 희망을 주는 존재라고 말이다. 민패가 부르는 이 노래는 경쾌하지만 끝부분이 좀 밋밋하다. 그래서 이런 말로 마무리한다.

“저항하지 않고 맞서 싸우지 않으면,
투쟁하지 않으면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이 땅의 현실입니다. 여러분이 곧 나비입니다.
노동자의 행복이라는 꽃이 만발할 때까지 함께
나아갑시다.”
덧붙이는 말

김진영_해고노동자,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동조합 동양시멘트지부 선전부장이자, 지부 노래패 <민패>의 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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