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 항쟁, 혁명

[25호 천연덕] 우리는 지금, 항쟁이냐 혁명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

2008년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였다. 명박산성이라 불린 경찰 차벽에 누군가 걸어놓은 밧줄을 열심히 끌고, 차벽을 넘기 위해 스티로폼 박스를 층층이 쌓아 올리는 것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오늘을 어떻게 기록할까?

시위, 항쟁, 혁명. 역사는 이것을 구분한다. 정부나 정부 정책에 반대해서 항의하는 시위를 반정부 시위라고 한다. 거리의 흔한 항의 표시가 시위다. 그러면 항쟁은 시위와 어떻게 다를까? 거친 어감처럼 단순히 시위의 격렬함을 가지고 항쟁이라 이름 붙이지 않는다. 항쟁은 정부의 중요한 정책이나 계획을 국민 대중의 시위로 바꿔낸 일 또는 사건을 의미한다. 항쟁이라 불리는 일도 그렇게 많지는 않다. 1987년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면서 거리로 뛰쳐나왔던, 6월 항쟁이 있다. 공식 명칭은 다르지만, 1980년 5월의 광주를 우리는 ‘광주 민중항쟁’이라 기억한다. 그렇다면 혁명은? 혁명은 통치자를 끌어내릴 때 비로소 시작된다. 우리 현대사에서 단 한 번 존재했던, 이승만을 끌어내린 4.19혁명이 그것이다. 선거로 정권을 바꾼 경우도 이른바 선거혁명이라 표현하듯, 위정자를 끌어내리는 행위가 바로 혁명의 출발이다.

21세기 들어서도 세계 곳곳에서 혁명이 발생했다. 오렌지 혁명(우크라이나, 2004), 튤립 혁명(카자흐스탄, 2005), 핑크타이드 혁명(중남미, 2002년 이후), 재스민 혁명(튀니지, 2010), 코샤리 혁명(이집트, 2011), 그리고 권력교체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에 버금가는 영향을 주었던 우산 혁명(홍콩, 2014)이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은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를 등장시켜 정치 혁명(미국, 2016)의 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역사는 ‘실패한 혁명’ 투성이다. 4.19혁명은 곧바로 5.16쿠데타로 이어져 박정희 군사독재가 이뤄졌고, 최근 아랍과 북아프리카 혁명에서 보듯 독재자를 무너뜨린 후 새로운 독재 권력이 등장하는 경우도 숱하게 존재한다. 선거 혁명이라는 김대중, 노무현의 집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진보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체제가 들어섰고, 비정규직이 새로 생겨났으며, 공기업이 팔려나갔다. 그래서 위정자를 바꾸는 혁명에서 더 나아가 구체제, 구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와 체제를 만들어 내는 것, 한 나라를 넘어서 혁명 이념이 여러 나라에 퍼진 것을 ‘대혁명’이라고 부른다. 프랑스 대혁명, 러시아 대혁명 같은 것 말이다.

그렇게 보면 2008년 촛불시위는 촛불항쟁으로 불러야 한다. 2007년 대선에서 기록적인 차이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됐을 때, 우리 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저버리고 싶었을 때, 입시제도와 교육 불평등 속에 희생되어 간 학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학생들 스스로 촛불을 밝혔다. 그렇게 모인 촛불들은 어느덧 교육 불평등이 경제 불평등에 기인한다는 데까지 나아갔고, 결국엔 이 차이가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한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미친 소 광우병 논란, 민영화 논란은 불평등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매개에 불과했다. 2007년 말 시작된 학생들의 촛불은 진화를 거듭해 2008년 5월, 10대 여학생들의 손에 다시 쥐어졌고, 그 해에 촛불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이 촛불항쟁으로 이명박 정부의 노골적인 민영화 정책에 브레이크를 걸었고,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한동안) 중단시켰으며,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4대강 사업으로 축소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대통령을 끌어내리지 못했고, 더 중요한 우리 삶의 실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우리는 연애, 출산, 결혼, 취업, 주택, 인간관계와 희망까지 다 포기하고 사는 다포세대로 ‘헬조선’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국민 대다수가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바라는 것은 단지 대통령과 측근의 국정농단과 개인 비리 때문만은 아니다. 죽기 살기로 노력해도 얻기 힘든 것을 부모 잘 만난 덕에 놀며 학교 다녀도 성취했다는 박탈감, 흙수저는 계속 흙수저로 살아야 하는 변하지 않는 현실, 재벌-정부-청와대가 한통속으로 놀아난 데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이 작용한 결과다. 거국내각을 하니 마니, 책임총리가 됐니 마니, 조기 대선을 하니 마니, 정치권의 수작은 그저 사태를 수습하고 대통령의 얼굴만 바꾼 채 계속 헬조선에서 살아가라는 소리와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금, 항쟁이냐 혁명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 없이 거국내각, 책임총리를 믿을 사람이 누구던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다면, 역사에서 택할 것은 하나뿐이다. 11월 12일, 역사는 이날을 또 어떻게 기록할까. 바로 우리 손에 달려 있다.(워커스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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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 집회 , 탄핵 , 대통령 , 혁명 , 촛불 , 퇴진 , 항쟁 , 박근혜 , 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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