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의 길을 찾고자 하는 이들의 소박한 고백

[해설] 경제무식자, 불온한 경제학을 만나다(김성구, 2016, 나름북스)

‘경제 무식자’라는 이 책의 제목은 참으로 시사적이다. 정말이지 현대인들은 경제를 알고 싶어서 난리 아닌가? 출판계에서 ‘경제 기사 읽는 법’ 류의 책들은 최소 ‘평타’는 치는 것으로 간주되고, 경제를 알기 쉽게 풀어 준다는 저자들, 나아가 ‘경제(학)’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알려 준다는 《괴짜 경제학》이나 《경제학 콘서트》 같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상이다. 좀 배웠다는 사람들도 ‘경알못’을 자처하고, 포털 사이트나 각종 SNS의 이름난 ‘경제 고수’들의 한마디에 귀를 쫑긋 세운다.

이렇게 현대 사회에서 경제에 관한 지식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된다. 무엇보다 돈벌이에 직접 관련되어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 돈이 전부는 아니라고는 해도, 돈으로 이 세상 거의 모든 것을 살 수 있다는 데 토를 달 사람은 없으리라. 이렇게 돈이 최고인 세상,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 돈의 논리를 알고자 하는 것을 나무랄 필요는 없다. 그 욕구가 ‘돈 좀 벌어 보자’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종류의 것이든, 아니면 ‘이 세상의 이치를 알기 위해’라는 숭고한 정신의 발로이든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경제(학)’에 목말라하면 할수록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연구하는 나 같은 이들은 마음이 착잡해진다. 그간 마르크스주의가 얼마나 ‘경제 환원주의’라고 욕을 먹어 왔느냐는 말이다. 물론 이 비난의 빌미(?)는 다름 아닌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들에 의해 직접 주어졌다.

“인간은 그들 삶의 사회적 생산에서 그들의 물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수준에 조응하는 일정한, 필연적인, 그들의 의사와는 무관한 관계들, 즉 생산관계를 맺는다. 이 생산관계 전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현실적 토대를 이루며, 이 위에 법적이고 정치적인 상부 구조가 세워지고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 그 토대에 조응한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 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체를 조건 짓는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859 서문 중에서).

흔히 역사 유물론, 또는 토대-상부 구조론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의 단순성과 우둔함을 증명할 때 단골 소재로 쓰였다. 그러한 비난들이 마르크스의 생각을 악의적으로 단순화하고 왜곡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위 인용문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생각의 승인 여부를 두고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도 첨예한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경제적 토대의 결정력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의 기본 입장이 구소련에서 ‘스탈린주의’라는 교조로 확립됨에 따라, ‘공식’ 또는 ‘제도권’ 마르크스주의를 ‘경제 환원주의’라고 비난하는 습관은 마르크스주의 내부에 서조차 확립되기에 이른다. 저 ‘경제 환원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칭송받을 일로 여겨졌고, 그 결과 20세기 ‘서구 마르 크스주의’에서는 철학적, 문화적, 심리학적 정향의 다양한 마르크스주의‘들’이 꽃을 피웠다.

나는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에 씌워진 ‘경제 환원주의’라는 굴레가 부당하다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물론 그것은 부당하다. 그 부당성에 대해서는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이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황정아 옮김, 길, 2012)의 5장(‘마르크스주의는 만사를 경제로 환원한다?’)에서 잘 서술해 놓았다. 그보다 내가 하려는 얘기는 오늘날 마르크스주의라는 이 름을 달았거나 그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이러저러한 논설이나 정책 제안 등에서 ‘경제’가 오히려 사라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당신이 떠올릴 수 있는 (국내적으로든 세계적으로든)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 경제학자가 있는가? 마르크스주의가 하나의 ‘입장’으로서 확립된 분야들을 꼽아 보라. 아마도 성, 인종, 지역, 문화 비평, (사회학의 주제로서) 노동 등이 떠오를 것이지만, 딱히 ‘경제’ 분야에 서는 무엇을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이라고 해야 할지 당혹스러울 것이다. 〈진보평론〉, 〈문화과학〉, 〈뉴 레프트 리뷰〉, 〈자코뱅〉 등 국내외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잡지들을 펼쳐 보라. 딱히 경제 분석이라고 할 만한 글이 몇이 나 되는가? ‘맑스 코뮤날레’나 ‘역사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 연 례 학술대회’ 같은 국내외 마르크스주의 학술 축제의 프로그램들을 살펴보라. 과연 마르크스주의를 ‘경제 환원주의’ 라고 할 만한 조그마한 근거라도 찾을 수 있는가?

마르크스주의의 ‘탈경제학화’라고 불러도 좋을 이러한 현상은 경제학자인 나 같은 사람이 그저 아쉬워하고 말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앞서 소개한 책에서 이글턴이 지적했듯 정말로 경제 환원주의적인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이 자본주의 세상이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것이 점점 더 노골화되고 있음을 우리는 매일의 현실에서 목격할 수 있다. 모든 현상의 배후에 경제적 동기가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그러니 오늘날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세상과 완전히 거꾸로 가는 게 아닌가.

마르크스주의의 탈경제학화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변혁하는 데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증명한다. 물론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 감소가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원인은 ‘자본’과의 관계에서 ‘노동’이 계속해서 패배하고 있는 현실이다. 한때 이 지구의 절반을 뒤덮었던 20세기 초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력이 한 세기도 못 가서 아쉬운 종말을 고했다는 게 가장 뼈아프다. 주요 선진국들에서 합법적으로 정권을 획득하면서 ‘사회주의로의 무혈입성’의 가능성까지 열었던 노동자 기반 정당들은 1980년대 이후 변질되거나 선거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거뒀다. 전통적인 노조가 점차 파괴되었고, 비정규직 신세로 분열된 노동자들은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겨운 지경이 되었다. 더구나 최근에는 세계 경제의 공황에 뒤이은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현실적 입지는 점차 줄어드는 모양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돌이켜 보면 마르크스주의란 마치 비 오는 날 대목을 맞는 우산 장수처럼 대표적인 ‘불황 산업’이 아니던가? 1970년대 초중반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르네상스’의 배후에는 전후 자본주의 황금기를 끝장낸 일련의 위기들이 있었다. 우리의 경우에도 1997년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다양한 진보 경제학들이 짧게나마 중흥을 맞기도 했다. 그렇다면 세계 경제를 강타한 2007/08년 공황은 마르크스주의, 특히 그 경제학에 새로운 기회여야 했지 않은가?

이 공황 뒤 십년 가까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당시의 공황이 전혀 그런 기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유가 뭘까?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러한 기회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난데없이 뉴욕의 서점가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품귀 현상을 빚고, 대학가에서 《자본론》 읽기 모임이 성행했던 것이 그 증거다.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였다. 과연 마르크스주의는 세상의 요구에 부응해 그 ‘창시자’의 140년 전 대작 이외에 무엇을 내놓았는가? 물론 때마침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의 저작과 강연이 큰 인기를 누렸지만 그래 봐야 그것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해설하는 정도였다. 내 기억에, 당시 세계 경제 위기와 관련해 그나마 인기를 얻었던 마르크스주의 저작은 지젝(Slavoj Zizek)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정도였다. 당시 (그리고 어느 정도는 지금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대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이 책의 저자가 철학자였다는 것은 우연일까?

경제학자들의 지적 개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코스타스 라파비차스(Costas Lapavitsas)나 벤 파인(Ben Fine)은 현대 경제에 서 금융(화)의 의미를 밝히고자 꾸준히 노력한 결과 각각 결은 다르지만 의미 있는 결론들에 이르렀고, 앤드루 클라이먼(Andrew Kliman)이나 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 같은 저자들은 2007/08년 공황이 자본주의 경제의 발달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라는 주장을 독서 대중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단행본 형태로 내놓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김수행이나 정성진, 그리고 이 책 《경제 무식자 불온한 경제학을 만나다》의 저자인 김성구 등이 중요한 기여를 했다.1)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안팎의 반향은 일관되게 실망스러웠다.

이렇게 된 것에 대해 마르크스주의만을 탓할 수는 없다. 그것은 경제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점점 폐쇄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반영하기도 할 테니 말이다.2)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미국의 연례 경제학 콘퍼런스에 모처럼 초청되어 발표 기회를 가졌던 (제도권 경제학자도 아닌) 마이클 로버츠가 거의 완전히 무시되었다는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경제학이 경제학자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지금 제기하는 문제는,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단순히 하나의 분과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이 주변화되고 있다는 게 아니다. 그 창시자들부터 마르크스주의의 중심 알맹이로 벼려졌던 어떤 성격, 곧 현실의 사태를 그것을 구성하는 인간관계들의 물적 조건으로부터 파악한다는 원칙이 변질되고 퇴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아주 참담하다. 허황된 요구들이 지 금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으로 제시되고 있다. 기본소득론이 대표적이다. 《경제 무식자 불온한 경제학을 만나다》에서 김성구 교수가 정확히 지적하고 있듯이 언젠가부터 우리나라 진보 진영의 주요 세력으로 자리 잡은 기본소득론자들에게는 현대 자본주의의 발달 맥락에 대한 고려가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1960년대 말 이후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이 발전시켜 놓은 국가 그 자체와 국가의 조세·재정 활동에 대한 논의 성과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오늘 마르크스주의는 애초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신들의 입장을 차별화하면서 부정한 ‘안티 테제’들, 곧 리카도 사회주의, 공상적 사회주의(프루동주의, 오언주의), 휴머니즘적 세태 비판 등으로 퇴행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한 퇴행은 마르크스주의의 탈경제학화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더욱 강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점점 더 그 ‘경제 환원주의’를 노골화하는 이 자본주의 세상은 그 자체로 경멸의 대상일 뿐이고, 따라서 그 안에 살면서 경제를 알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은 그 세상의 노예일 뿐 이다. 무지가 미덕이 되고, 맹목이 이상이 된다! 그러나 그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 마르크스주의의 탈경제학화의 결과는 마르크스주의의 ‘왜곡’이라기보다는 ‘소멸’에 가깝다. 생산관계의 역사적 형태 분석에 입각한 그 변혁 전망에 대한 논의 없는 분배 개선론을 마르크스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한 현실 개선이 우리에게 어떤 해방을 가져다 줄 것인가?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시각의 소멸은, 미국 흑인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에 넋 놓고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도입을 반대할 수 있는 ‘포용력’은 주었을지언정 이 둘이 어떻게 양립 가능한지, 또는 가능하지 않은지에 대한 ‘분별력’은 앗아갔다. 다양한 미디어를 통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세계 민중의 삶을 더 잘 알게 되었지만, 혹시 우리는 그 과정에서 그들을 더욱 타자화하고 그들의 처지를 ‘나’와는 상관없는 어떤 힘에 의한 소외된 불행으로 치부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삶이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지면서 보통 사람들도 대중문화, 스포츠, 첨단 정보 통신 기기 등이 제공하는 달콤함을 좀 더 ‘주체적으로’ 즐길 줄 알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요즘 세태를 보면, 바로 그러한 고양된 주체성 그 자체를 ‘진보’로 여길 뿐, 대중문화나 올림픽 등에 대한 물질적 분석은 그저 ‘진지병 환자’의 편벽으로 치부되곤 한다.

19세기 후반 이후의 근현대사에서 위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가장 치열한 고찰과 행동화를 이끌었던 것이 마르크스주의였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때 마르크스주의를 다른 어떤 진보적 담론보다 도드라지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세상만사에 깃든 물적 조건, 곧 경제적 측면에 대한 실질적이고 면밀한 관심이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이 세상에 없어도 좋은 것이 결코 아니며, 현재의 약세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주체적 과제는 바로 그 ‘(정치)경제학’을 복원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경제 무식자 불온한 경제학을 만나다》라는 이 책의 제목은 다소 작위적으로 보여도3) 오늘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의 길을 찾고자 하는 이들의 소박한 고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는 ‘경제를 이해하는 게 중요한 것은 알겠지만, 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어야 하는가’라 고 물을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이 대목에서 이러한 질문까지 끌어냈다면, 지금까지 이 글은 대성공이다. 왜냐하면 이 책 《경제 무식자 불온한 경제학을 만나다》 자체가 이 질문에 대한 좋은 답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은 이 책을 읽으면 된다!
이 책의 저자인 김성구 교수는 지난 30년간 그런 의문을 품은 이들에게 가장 훌륭한 교사였다. 아마 이 책은 지금껏 그가 쓴 책이나 논문 중에서 가장 쉬운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 만큼 이 책을 통해 그의 작은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으면 한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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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Costas Lapavitsas, 《Profiting without Producing: How Finance Exploits Us All》, Verso, 2013 Ben Fine, “Financialization from a Marxist Perspective”, 〈International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Volume 42, Issue 4, 2013, pp. 47-66 앤드루 클라이먼, 《The Failure of Capitalist Production: Underlying Causes of the Great Recession》, London: Pluto Press, 2012 [국역: 정성진, 하태규 옮김, 《자본주의 생산의 실패: 세계 대침체의 원인》, 한울아카데미, 2012]; Michael Roberts, 《The Great Recession》, Lulu, 2009 《The Long Depression: How It Happened, Why It Happened, and What Happens Next》, Haymarket Books, 2016 김수행, 《세계 대공황: 자본주의의 종말과 새로운 사회의 사이》, 돌베개, 2011 정성진, 《마르크스와 세계 경제》, 책갈피, 2015 김성구(편저), 《현대 자본주의와 장기 불황: 국가 독점 자본주의론의 시각》, 그린비, 2011 김성구, 《신자유주의와 공모자들: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에 지배당하게 되었나》, 나름북스, 2014.

2) 이에 대해서는 벤 파인의 ‘경제학 제국주의’ 논의를 참조할 만하다. 예컨대 Ben Fine and Dimitris Milonakis, 《From Economics Imperialism to Freakonomics: The Shifting Boundaries between Economics and Other Social Sciences》, Routledge, 2009.

3) 나는 〈워커스〉 지면에서 이 연재 기사를 읽으면서 과연 질문자가 진짜로 ‘경제 무식자’일까 하는 의심(?)을 떨쳐낼 수 없었다. 때때로 너무나도 좋은 질문들이 제기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확인한 결과, 그들은 진짜(!) ‘경제 무식자들’이었고, 그 좋은 질문들은 정말로 경제를 알고자 하는 욕구의 발로였다.
덧붙이는 말

이 글은 <경제무식자, 불온한 경제학을 만나다> 에 실려 있는 책의 해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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