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와 '평화 프레임'

[기자의 눈] 꽃 스티커 붙이는 시민, 떼는 시민

19일 오후 7시 광화문 차벽이 꽃 스티커로 도배됐다. 이강훈 작가의 ‘차벽을 꽃벽으로’ 퍼포먼스에 호응해 지나가는 시민들이 차벽에 꽃 스티커를 붙였다. 하지만 2~3시간이 지나자 100여 명의 시민이 “이건 너무하다”며 스티커를 일제히 떼기 시작했다. 스티커를 떼는 시민을 보고 한 시민은 “남의 정치적 표현을 왜 멋대로 제거 하는가”라고 비판했다. 온라인에서는 한바탕 ‘꽃 스티커’ 논쟁이 벌어졌다.

이 작가는 마크 리부의 ‘꽃을 든 여인’ 사진을 보고 ‘꽃벽 퍼포먼스’를 기획했다고 했다. 이 사진은 1967년 미국 반전 평화 시위에서 한 여성이 시민에 총을 겨누는 군인에게 꽃을 건네는 모습을 담았다. 그는 “광화문 집회에서 경찰을 비난하는 구호 대신 평화를 상징하는 이미지들로 스티커를 만들어 차벽과 방패 등에 붙이는 퍼포먼스를 진행한다”고 전했다.

[출처: 정운 기자]

꽃 스티커를 떼는 시민들을 만나봤다. 시민 10여 명을 만나 대화를 나눴으나 이 스티커가 퍼포먼스였다는 것을 알고 있던 시민은 두 명에 불과했다. 시민들은 목마를 타고, 사비를 들여 위생장갑을 끼고, 잘 떼지도록 스프레이까지 뿌려가며 스티커를 제거했다.

스티커를 떼는 시민들을 만나봤다. 대부분 반응은 비슷했다. “의경들이 무슨 죄예요.”

시민 A씨는 “의경도 다 우리 또래일 거 아녜요. 경찰에 항의한다 해도 띠는 건 밑(의경)에 애들이 하잖아요. 이해가 안 돼요. 이걸 준비했으면 본인이 뗐어야죠”라고 했다. 그는 기자가 “이를 붙였던 시민들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을 땐 정색을 내며 “그만 물어봐라”고 했다.

시민 B씨는 운전면허증으로 스티커를 제거하다 면허증이 깨졌다. 그는 “잘못한 게(스티커를 붙이는 것) 우리한테 화살이 날아온다”고 전했다. 그는 보수 언론의 공격을 우려했다. 그는 스티커를 붙인 시민을 두고 “순수한 마음으로 붙였겠지만 상대에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고, 의경에 피해만 줬다”고 전했다.

시민 C씨는 “(퍼포먼스가) 그분(작가)의 행위 예술이면 우리도 (떼는 행위가) 예술이다. (스티커를 붙이는) 행동하기 전에, 같이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 나는 백남기 열사 시민지킴이도 했다. 그때는 단체가 리드했는데 지금은 없지 않냐. 각자 머리가 아닌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경찰이 고맙다고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꽃벽 퍼포먼스를 정확히 알고 있는 시민 한 명을 만났다. 시민 D씨는 크라우드 펀딩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그는 “작가가 이렇게까지 도배됐을 거라 생각하진 못했을 거다. 이 정도까지 붙이면 경찰이 운전하는 데 방해가 되고 안전이 우려된다. 그래도 붙이는 사람도 떼는 사람도 다 좋은 취지로 했다”고 전했다.

한편 “어르신들이 부적이라며 3만 원 받고 붙여놓은 걸로 알고 있다”는 시민도 있었다.

[출처: 김한주 기자]

시위와 평화 프레임의 경계

시위는 의사표현의 수단이다. 평화시위냐 아니냐 하는 것도 시위 방식에 대한 문제다. ‘평화 시위’가 목적이 되는 집회나 시위는 없다.

최근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 과정에서 모든 행위가 소위 ‘평화 시위’라는 이름으로 의사 표현을 스스로 제한한다. 언론도 ‘성숙한 시민의식’이라면서 나서서 이런 분위기를 부추겨 왔다. 이 때문인지 집회 현장에서는 작은 선 하나 넘는 행위를 마치 엄청난 폭력이라도 행사 한 것인 양 다른 시민을 매도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이번 스티커를 붙이는 사람을 프락치로 몰아가기도 했다. 돈을 받고 붙였다던가, 박사모가 스티커를 붙였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은 노동자와 농민 집회 때마다 쓰레기 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이들이 집회가 끝나고 난 뒤, 청소 노동자들이 얼마나 고생할지 우려해서 쓰레기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든 안다. 집회의 본래 목적인, 정부의 반노동자적인 정책을 비판한 것에 시비를 걸기 위해 쓰레기 문제를 거론해 왔다. 또한 지난 촛불집회에서 밧줄로 차벽을 끄는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한 것은 시민의 안전이 아니라 공권력이 짓밟힐 것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보수언론은 경찰에 공권력을 지키기 위해 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 결과 경찰 물대포에 의해 백남기 농민이 희생되기도 했다.

이처럼 평화 시위라는 이름으로 시위의 형태와 행위를 규정하는 것을 ‘평화 프레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언론이 ‘평화 프레임’으로 시위를 규제하려는 목적이 시민의 안전이나 시위참가자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님은 명백하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청와대 근처로 가지 못하게 막은 것은 차벽이다. 이 차벽이 이 날 처음 등장한 것도 아니다.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에서는 ‘명박산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차벽이다. 헌법재판소에서는 차벽이 위헌이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박근혜를 지키고 시위대의 의사표현과 행진을 차단할 목적으로 차벽이라는 폭력이 존재했고, 시민들은 저항의 의미로 스티커를 차벽에 붙였다.

백남기 농민의 딸 백도라지 씨는 ‘고생할 의경을 위해 스티커를 제거했다’는 사람들에 대해 “의경 상대하러 집회 나간 것 아니지 않냐. 정부 상대하러 간 거고, 우리는 정부를 ‘의경의 형태’로 만난 것”이라고 자신의 트위터에서 말했다.

‘평화 프레임’과 평화 시위는 구분되어야 한다. 또 집회 시위의 목적과 수단도 구분해야 한다. 이번 집회의 이름은 4차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이다. 5차 범국민행동은 다음 주말에 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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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 집회 , 광화문 , 평화시위 , 차벽 , 꽃스티커 , 스티커 , 꽃벽 , 시민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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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하하

    평화...아름다운 말이다. 하지만 이토록 이율배반적인 단어도 없다. 언제나 먼저 폭력을 자행하는 쪽은 국가다. 노동자, 농민, 학생에 대한 무지막지한 폭거가 있었고 반작용으로 집회와 행진이 있었다. 보수언론-재벌 연대가 짜놓은 평화 프레임에 봉기의 급진성이 겁박당하고 안전한 차벽 뒤에서 21c한일협약과 역사교과서 국정화, 노동법 개악이 밀실 추진되고 있다. 시민들은 애송이가 될 것인가, 투사가 될 것인가. 김수영이 말한대로 자유와 평화는 피를 먹고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