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20일의 기록

[워커스 26호] 광장의 목소리가 정국을 움직이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10월 29일 3만 명, 11월 5일 20만 명. 11월 12일 민중총궐기에 120만 명이 광장에 쏟아졌다. 아직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 있다.

‘박근혜’, ‘퇴진’, ‘하야’가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지난 10월 26일, 정국은 급변했다. 태블릿 PC가 등장하고 거듭된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줄줄이 소환되는 재벌 총수, 이제는 차움 의원까지 비리가 고구마 줄기처럼 따라 나왔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의 수많은 이슈가 실시간 검색어를 지배했지만 사라지지 않는 검색어가 있다. ‘하야’와 ‘퇴진’이다.

10월 24일, 최순실의 태블릿 PC가 등장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모든 언론은 제도권 정치인만 찾았다. 광장에서 매일 촛불이 타올라도 언론은 클립 영상만 찍고 돌아갈 뿐이었다. 칼바람 부는 그곳에선 수백 명의 시민이 20일 넘게 촛불을 들고 광장 민주주의를 만들었다. <워커스>가 그 촛불을 담았다.

첫 촛불, 청년이 들다

촛불의 시작은 ‘박근혜 하야’가 처음으로 실시간 검색어를 지배했던 10월 26일이다. 24일 저녁, 태블릿 PC 보도가 충격을 몰고 왔고 바로 다음 날 대통령의 사과 담화가 이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하는데 하루가 더 걸렸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비선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확인된 후 허탈감과 분노가 동시에 몰려왔다.

200여 명이 모인 촛불 집회에는 다양한 연령과 계층이 참가했지만 청년층이 도드라졌다. 그래서인지 집회 분위기도 사뭇 달랐다. ‘분노의 버스킹’. 이들은 인쇄물 피켓이 아닌 직접 제작한 피켓을 들었다. 검은 바탕에 형광 글씨로 ‘하야’를 적었다. 아이돌 콘서트에서나 볼 법한 피켓이었다. 영화 ‘히말라야’ 포스터를 ‘하야하라’로 패러디했다. 말 분장은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손 피켓에 ‘하야하는 법, 마음속에 메트로놈 놓고 달그닥, 훅 하면 된다’고 적었다.

청년들이 먼저 든 촛불은 삶의 절망에서 나온 불길이었다. 높은 실업률과 입시, 경쟁에 씨름하는 청년들의 분노는 컸다. 이와 함께 박근혜 지지도는 정유라의 등장만큼이나 극적으로 추락했다. 20대의 10월 말 국정 지지율은 9%였다. 그러나 2주 뒤에는 0%로 추락했다. 모든 지역별 연령별 지지도가 청년을 따라 쫓아가기 시작했다. 광장을 주도한 건 청년이었다.

청년이 달군 광장, 교복부터 정장까지, 노동조합 조끼도 함께

촛불의 힘은 강했다. 광장을 지나던 시민들은 망설임 없이 집회에 참가했다. 평일인 10월 27일, 광장에 100명이 모였다. 청년들이 촛불로 달군 행진은 400명으로 늘었다. 행진 참여자는 일반 시민이 대다수였다. 교복 입은 학생, 정장 입은 직장인, 유모차를 끌고 나온 가족, 그간 집회에서 흔히 볼 수 없던 이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광화문 근처에서 일하는 한 직장인은 촛불 집회에 처음 나왔다고 밝혔다. 사장과 함께였다. 그는 연말 정산과 성과연봉제가 두렵다고 했다. 자영업자도 광장에 나섰다. 전통 노량진수산시장에서 일하는 서현 씨는 집회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내 일이 아니라면 상관없었다. 생선만 팔면 됐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미르재단 이성한 전 사무총장이 노량진수산시장 현대화 사업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개입했다. 수산시장에 용역들이 쏟아졌고 상인들만 잡혀갔다”며 울분을 토했다.

11월 2일 촛불집회에 참가한 편의점 아르바이트 노동자는 ‘아르바이트노동자 시국선언’을 제안했다. 그는 “지금 대부분 내 또래들은 노조나 시민단체에 가입되지 않은 청년들이다. 이런 사람과 함께할 방법을 고민하다 시국선언을 제안했다”고 전했다. 같은 날 한 14세 청소년은 무대에 나와 “투쟁”으로 인사했다. 이 청소년은 사람들 앞에서 한국사회 병폐를 모두 짚었다. 그는 “나는 청소년이지만 청소년도 시민의 주체”라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성 소수자, 세월호 유가족,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 장애인, 청소년 여러분, 서로 손잡고 더러운 사회를 균열 내자. 오늘을 그리며 내일을 살아가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최고의 호응을 얻었다.

11월 1일부터는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매일 촛불 집회를 주최했다. 자발적으로 모인 광장에 조끼를 입은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촛불을 들자 위력은 더 거세졌다. 최장기 파업을 이어가는 철도노조는 지부별로 돌아가며 광장 촛불에 함께했다. 철도노동자가 오는 날이면 집회 규모는 배로 늘었다. 11월 9일 공공운수노조 집중 투쟁 대회엔 평일이었지만 8,000명의 노동자 시민이 광장에 나왔다. 일반 시민들은 3분 자유발언 말미에 항상 철도노조를 응원했다.

언론에서 듣지 못한 광장의 구호

언론은 청와대, 여야, 정파 입장만 줄기차게 대변했다. 하지만 국민의 목소리는 광장에서 울렸다. 광장의 구호가 국민의 입장이었다. 각기 지향하는 바는 달라도 광장에서 시민들은 각각의 문제에 대해 날카롭게 발언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첫 촛불을 들었던 10월 26일, 시민들은 “박근혜는 퇴진하라”와 “최순실은 나와라” 구호를 외치며 책임과 문제의 본질을 분명히 했다. 27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최순실은 “태블릿 PC는 내 것이 아니”라고 밝히자, 광장에선 “최순실을 구속하라”며 손 놓고 있는 검찰을 압박했다. 결국, 31일 최순실이 검찰에 출석해 구속됐지만 검찰이 ‘최순실 게이트’로만 사건을 꼬리 자르기 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졌다. 광장의 목소리는 박근혜 대통령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몸통은 박근혜다”, “박근혜를 구속하라”고 외쳤다.

청와대와 여야 정치권이 눈치 보기를 하며 서로 유리한 방향으로 정국을 끌고 가려 했을 때도 광장은 흔들리지 않고 박근혜 하야와 퇴진을 고수했다. 새누리당은 10월 30일 박근혜 대통령에 거국내각 구성을 촉구했다. 11월 2일엔 박근혜 대통령이 총리로 김병준 교수를 내정했다. 반면 광장은 “2선 후퇴 말도 안 돼”, “거국내각 필요 없다”, “박근혜는 퇴진하라”를 외쳤다. 광장의 목소리는 점점 우세해졌다. 10월 29일 3만 명이던 촛불은 11월 5일 20만 명, 11월 12일에는 120만 명이 함께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광장의 요구는 탄핵도 아닌, 퇴진과 하야였다. 또 2선 후퇴 반대, 거국내각 반대, 새누리당 해체였다. 광장에 밝혀진 촛불의 입장은 분명했다.

광장, 혹은 난장

다양한 시민이 한데 모이면 갈등도 일어나게 마련이다. 다양한 관점으로 토론하자고 광장에 모였지만 시민끼리의 충돌이 이어졌다. 11월 2일 집회 시작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두고 비판자와 옹호자가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 한 중년 남성은 자유 발언 중 난데없이 구호를 계속 외쳐 시민들에 항의를 받았다. 그러자 그는 다짜고짜 청중에 욕을 퍼붓고 시비를 걸었다. 한 청소년은 이 남성에 욕을 하며 폭력까지 행사하려 했다. 이 둘은 거의 매일 참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싸움은 매일 반복됐다.

촛불 집회 속 발언에는 ‘혐오’가 넘쳤다. 박근혜 대통령 뒤에는 항상 ‘정신병’과 ‘년’이 붙었고, 최순실에는 ‘프라다’와 ‘강남 아줌마’가 따라다녔다. 10일 집회에 한 남성이 청소년 발언을 두고 “고등학생한테 발언을 왜 줘. 내가 운동을 몇십 년 했는데”하며 윽박질렀다. 결국 이 남성은 집회 참가자들 손에 끌려 나왔다.

이날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김수환 활동가는 “병신년, 아녀자, 강남 여자, 수첩 공주 등으로 사람들이 분노를 표출한다. 하지만 그들이 남성이었으면 할 수 없을 말이다. 대한민국의 문제는 최순실과 박근혜 대통령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기득권을 끌어내는 동시에 약자 혐오를 끝내는 운동을 해야 한다. 우리부터 변화해야 한다. 그들의 혐오 선동에 우리가 이용당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광장에 정치인도 모였다. 윤종오, 김종훈 의원은 매일 같이 촛불을 들었다. 이재명 성남시장도 가끔 참석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자주 참석했지만 발언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11월 첫째 주 대통령 지지율 5%가 발표되고 정치인들은 앞다투어 광장에 나왔다. 하지만 그전에 이미 시민들이 광장을 지켰고 토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평일 촛불은 촛불 항쟁이 되어

노동자와 학생, 시민들은 평일 광장의 추위를 견디고, 주말 광장에서 얼음새꽃을 피웠다. 11월 7일엔 비가 내렸고 11월 9일엔 영하의 칼바람이 불었다. 주말 대규모 집회보다 평일 촛불의 추위가 더 매서웠다. 시민들은 핫팩을 쥐고, 우의를 입고 행진했다. 1,000명 이상의 사람이 매일 평일 광장을 지켰다. 지나가는 이들에게 “모이자 민중총궐기”를 외치며 12일 민중총궐기 참여를 호소했다. 매일 행진하며 전단을 같이 뿌리기도 했다. 이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을 지켰고, 촛불은 100만이 되어 타올랐다. 시청 광장에는 노동자가, 광화문 광장은 시민이, 내자동 로터리와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은 학생들이 촛불을 들었다.

20일 동안 촛불은 매서운 추위와 칼바람 속에서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좌충우돌 정치권의 흔들림에도 촛불은 흔들림 없이 타올랐다. 촛불은 모일수록 힘이 커졌고, 권력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해 갔다.(워커스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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