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퇴진, 그리고 새로운 상상… 광장에 선 사람들

[워커스 26호]

[출처: 홍진훤]

광장이 열렸다. 100만 명의 시민이 쏟아져 나왔다. 광장은 사람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구호는 하나였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하지만 이상하게도 구호 뒤의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는다. 대리 정치, 부패 정치를 끝장내자고 하면서도 대안 정치의 요구는 터져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는 미래 사회의 모습은 여전히 희미하다. 정권퇴진으로 나의 삶이 어떻게 바뀌게 될지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정답 없는 질문들만 광장 위를 떠돈다. 과연 100만의 광장은 규모의 기록으로만 머물게 될까, 아니면 우리의 삶을 미래로 끌고 가게 될까. 11월 12일. 광장에 선 사람들의 진짜 목소리가 궁금해졌다.

박근혜 퇴진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
“그래도 취업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겠죠.” 대학생 김지현(23)씨가 말했다. 박근혜 퇴진 후 당신 삶이 어떻게 바뀔 것 같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요새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은 취업이라고 했다. 소신을 갖고 불문과를 선택했지만 취업 준비를 하다 보니 ‘소신’이 ‘불신’으로 바뀌더라는 토로가 이어졌다. 정권퇴진이 그녀의 ‘취업’ 고민까지 해결해 줄 것이란 기대는 없었다. “당장 뭐가 크게 바뀌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도 파급 효과는 있겠죠. 입학비리나 이상한 모금 집단을 경계하지 않을까요.”

광장에서 만난 고등학생 김다혜(가명.18) 씨는 “고민이 하나 줄어들 것 같다”고 했다. 많은 고민을 안고 사는 청소년들에게 박근혜 게이트로 인한 국정 혼란은 또 다른 고민거리였나 보다. “가뜩이나 입시 같은 고민들이 많은데, 대통령이 퇴진하면 나라에 대한 고민은 덜게 되는 거잖아요.”

또 다른 청소년 김정우(가명.14) 씨는 잠깐 고민 끝에 “비리 같은 문제가 없어진 사회에서 살게 되지 않을까요”라고 답했다. 그 역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과 그의 삶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찾기 어려운 듯했다.

회사원 문두환(32) 씨도 대통령이 퇴진하더라도 체감할만한 변화는 크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부패한 기득권 세력에 ‘경고’를 날리는 의미랄까. 그가 말했다. “박근혜, 최순실, 정유라는 상징적인 존재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에는 더 많은 박근혜, 최순실이 있을 거예요. 그들이 건재하는 한 삶은 쉽게 바뀌지 않을 거라 봐요. 그저 대통령 퇴진을 기회로 그들에게 경고 메시지를 주는 거죠.”

물론 박근혜 퇴진이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무리 속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청소년 박형준(17) 씨는 여전히 ‘세월호 참사’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박근혜가 퇴진하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면, 세월호 참사의 병폐들을 잘 메울 수 있지 않을까요. 다시는 청소년들이 그렇게 죽어가지 않도록, 비슷한 사건이 터지더라도 더 현명하게 대처하는 사회에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밤늦게까지 광장을 떠나지 못하던 장애인 김태현(50) 씨는 “(박근혜가 퇴진하면) 일단 기분이 되게 좋을 것 같다”며 화통한 웃음을 터뜨렸다. 정부 정책이 장애인의 삶에 영향을 끼쳐왔으니, 정권이 물러나면 장애인 삶도 어느정도 영향을 받게 될 테다. 김 씨가 속해 있는 장애인 단체는 광화문 광장에 ‘박근혜 퇴진이 복지다’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친재벌, 친신자유주의 정책을 취해왔잖아요. 의료민영화나 복지예산 축소, 노동시장 유연화 등의 정책은 직간접적으로 장애인 삶에 안 좋은 영향을 미쳐왔어요. 박근혜 대통령이 빨리 방을 빼면, 그래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요?”

그놈이 그놈이지만… 어쩔 수가 없잖아요
박근혜 이후, 우리 ‘국가’는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우리는 과연 어떤 정부를 세우게 될까. 광장에 나온 사람들에게 물었다. 당신이 원하는 정치세력이 존재하느냐고. 당신은 누구에게 국정 운영의 권한을 넘겨주고 싶으냐고. 대답은 다른 듯 같았다. 정치세력은 많지만, 선뜻 지지할 만한 정당은 없는 현실이라는 것. 그래서 대답 앞에는 꼭 ‘그놈이 그놈이지만’ 혹은 ‘거기서 거기지만’이라는 전제가 붙었다.

문두환 씨는 “국민의 당이 싫긴 하지만 그래도…” 라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야 3당이 빨리 거국내각 합의체를 만들어서 내년 4월 전까지 혼란을 수습한 뒤, 서둘러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지 않을까요.”

야당이 탐탁지 않은 그 역시 ‘대안 정치 세력’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매번 현실 가능성이란 벽에 부딪혀 ‘도로 야당’으로 선회하는 것이 문제지만. “급진적인 대안세력이 나타난다 해도 대다수 국민에게 동의를 받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 역사에 그런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의문이 들어요. 사람들 생각이 워낙 다양하고 넓으니 결국 타협점을 찾게 되지 않을까요.”

질문을 받은 김태현 씨도 고민이 많아 보였다. 지금 야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으냐, 이 얘기를 시작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고 했다. 그저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를 품을 수밖에. “새 정권이 창출된다 해도 재벌과 보수언론이 여전히 기득권을 지킨다면 정권도 버티기 힘들어지겠죠. 정치성향으로만 따지면 정당 중에 정의당과 가깝지만 국회의원 숫자가 너무 적어서….”

대학생 김지현 씨는 아무도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바람은 소박하다. 그저 청년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제대로 된 ‘청년 의원’ 한 명이라도 나타나 주는 것.

“지금 정치권을 싸잡아 욕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런데 대안 정치세력이라고 한다면 새로운 정치세력을 말하는 것 아닌가요? 그 나물에 그 밥 같아요. 그냥 청년 국회의원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진짜 우리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인. 안 시켜주는 건지, 안 뽑아주는 건지 모르지만 지금은 없잖아요.”

50대 철도노동자 박기운(가명) 씨는 ‘그놈이 그놈’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치권에 답이 없어요. 야 3당이나 여당이나 어차피 기득권층이고 불합리함을 발판으로 권력을 얻었고 그 덕에 정치하는 거잖아요.” 그에게 정치란 ‘진퇴양난’이었다. 남는 것은 분노뿐.

진보진영의 분열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농민 이정민(55) 씨는 “야당이 자꾸 주판알 튕기고 있는데 아마 국민한테 철퇴를 맞을 것”이라며 입을 열었다. “진보진영이 (정권을) 세웠으면 좋겠지만 통합진보당도 없어졌고, 정의당도 노동자 농민을 껴안는 그릇이 되지 못한 채 애매하게 가 버렸잖아요.” 그가 그나마 기대하는 것은 진보진영이 ‘견제’ 역할을 하는 것뿐이다. “진보진영이 정권을 잡지 못하더라도, 올바른 야당을 세워내는 역할은 하지 않을까요.”

청소년 김다혜 씨와 김정우 씨는 박근혜 이후의 정치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박형준 씨는 샛별같이 나타난 ‘스타 정치인’에게 기대를 품고 있었다. “이재명 성남 시장님이 대선에 출마해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어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콕 집어 사이다 발언을 하잖아요.”

그래도 우리는 ‘미래의 사회’를 상상한다
그 나물에 그 밥. 믿을만한 정치세력 하나 없는 현실. 그래도 우리는 광장에서 새로운 사회를 상상한다. 박근혜 퇴진 이후 어떤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간단한 질문에 수많은 답변이 줄줄이 달려온다. 묵혀 있던 사회 문제들과 사람들의 삶이 얽히고설킨다.

“청년들이 지치지 않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그 목소리를 경청해주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기업에도 요구해야죠. 열정페이 강요 말고 신규채용 확대하라고. 이런 대학생들의 시위가 더 적극적으로 확대됐으면 좋겠어요.” 대학생 김지현 씨가 바라는 박근혜 이후 사회의 모습이다.

회사원 문두환 씨도 ‘고용안정’이 보장되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리 회사에도 뛰어난 20대들이 많은데, 월 130만 원 받으면서 일해요. 고용이 불안정해 6개월 뒤에 회사를 떠나는 청년들도 많고요. 고용이 안정돼 더 많은 청년이 안정적으로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김정우 씨는 누구는 ‘금수저’로, 누구는 ‘은수저’로 태어날 때부터 인생이 정해져 버리는 사회 구조적 병폐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형준 씨는 빈부격차가 학교폭력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구의역 사고처럼 청년 비정규직이 희생당하는 일도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정민 씨는 “경제 논리로 쌀을 뒤흔드는 게 아니라, 쌀은 주권이라는 점을 분명히 세우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철도노동자 박기운 씨는 “법 적용에 있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불평등이 너무 심하다. 불평등이 먼저 없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광장은 여전히 열려있다. 그리고 여전히 이곳에는 백만의 요구들과, 백만의 질문들이 모여든다. 우리는 과연 현실이라는 선을 넘고, 하나의 구호를 넘어 새로운 사회로 발을 디딜 수 있을까.(워커스 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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