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뒤에 숨은 검은 손

[워커스 26호] 100인 위를 넘어서

  사진/홍진훤

장면 하나. 미술과 사진에 대해 한참을 얘기하고 있었다. 알고 지내던 작가의 전시회가 끝난 뒤풀이 자리였다. 함께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하나 둘 취해갔다. 누군가는 졸았고, 누군가는 화장실에 간다고 나가서는 한참 소식이 없었다. 그때 그가 물었다. 남자를 좀 아냐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난 작가였다. 그의 책은 한두 권 본 적 있지만 실제로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운 질문에 머뭇거리자 그는 ‘첫 키스는 언제 했는지’ 물었다. 그의 손은 자연스레 내 허벅지에 올라왔다. 이어 강제로 입을 맞추었다. 함께 모텔을 가자고도 했다. ‘싫다’고 답했다. 그는 태도를 좀 바꾸더니 자신이 요즘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토로했다. ‘공황장애에 시달리며 누가 곁에 있지 않으면 잠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 살리는 셈 치고 잠드는 것만 보고 가라’고 울먹였다.

장면 둘. ‘내가 너를 좀 도와줄 수 있다.’ SNS로 연결돼 있을 뿐인데, 그는 추천서를 써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공모전에 추천자가 필요한데 마땅히 아는 사람이 없어 걱정이라는 글을 올린 후였다. 그는 내 연락처를 묻고는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려달라고 했다. 거주지를 말하자 자신도 같은 동네라고 말했다. 만나자는 연락이 자주 왔다. 한밤 중 전화가 울리기도 했다. 그는 업계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도 그가 새로운 것을 빨리빨리 습득해 자신의 세계를 구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쩐지 늦은 밤 만나자는 연락은 불편했다. ‘이정도 되는 사람이 왜 나한테 딴 마음을 품겠어.’ 이 사람의 좋은 의도를 내가 오해하나 스스로를 반성할 즈음, 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피해자의 이야기를 접했다. 피해자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이 바닥 분위기 몰라?

풍문이 아니다. SNS를 타고 폭로가 흐른다. ‘OO계_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 특정 주제에 대한 글이라는 것을 알리는 표시)에는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생생히 드러나 있다. 문학, 미술, 사진 등 예술의 형태는 다르지만 성폭력 가해자의 행태는 비슷하다. 전시 기회를 줄 수 있다며 자신의 위치를 강조하거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일탈을 부추긴다. 최근 작업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이유로 쉬었다 가자하고, 공황장애에 시달린다며 집으로 와달라고 요청한다. 한 사람의 폭로가 시작되자 비슷한 일을 당한 여러 피해자가 등장했다. 가해자 한 명에 다섯 명 이상의 피해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일이 하나 둘 드러나고 있다.

한 명의 가해자와 여러 명의 피해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성폭력이 지속적이고 암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문단 내 성폭력을 폭로했던 A 씨는 ‘권력의 집중’에 대해 꼬집었다. 그는 “어떤 가해자는 여러 직위를 갖고 있다. 그는 시인이고 평론가이며 교수이자 문예지의 편집위원이다. 문단 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직위를 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며 “여기저기에 권력을 쥐고 있는 이의 성폭력을 어떻게 쉽게 밝힐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특정 유명인이 권력을 쥐고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곳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피해자의 폭로를 어렵게 하고 동시에 가해자가 사건 이후 복귀하는 것을 쉽게 만든다. 가해자는 사라지고 피해자만 남는 형국이다.

남성 중심의 문화에서 남성성을 과시하며 여성을 대상화하는데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작가 B 씨는 “선배 작가에게 ‘너 오늘 나랑 잘래?’, ‘내가 오늘 데리고 나가 줄까?’라는 말을 듣고 동료인 남성 작가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더니 ‘이 바닥 분위기 몰라? 새삼스레 왜 그래?’라는 말을 들었다”며 “그 말을 듣고 분위기에 적응 못하는 내 잘못인가 생각했던 적도 있다”고 말했다.

작품을 통해 드러나야 하는 자유로움을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하는 폭력으로 행사한 사례는 배용제 시인과 관련된 폭로에서도 드러난다. 배 씨에게 시를 배웠던 이들은 그가 ‘시를 쓰려는 사람은 도덕에 얽매이면 안 된다’, ‘시 세계를 넓히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경험을 해 봐야 한다’라며 자신과 성관계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동시에 배 씨는 “내가 문단에서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 줄 아느냐. 내 말 하나면 누구 하나 매장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다. 나는 언론계와도 아주 잘 안다”고 말했다. 그 스스로 자신이 쥐고 있는 권력을 드러내고 이를 강조하며 협박한 것이다.

권력관계로 인한 성폭력은 습작생과 작가 사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편집자와 작가, 거래처 관계자와 상사 등 불평등한 관계 안에서 성폭력은 탄생한다. 전국언론노동조합 서울·경기지역 출판지부(출판노조)가 출판계 종사자 257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는 이를 드러낸다. 이들의 68.4%는 ‘업무와 관련해 만난 사람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다른 사람의 피해 사례를 들어본 적 있다는 사람도 81%에 달했다. 문단 내 성폭력 방지 운동을 하며 ‘책은탁’이라는 트위터리안으로 알려진 탁수정 씨는 “유명 저자는 출판사의 수입원이다. 사장이나 상사는 그들을 떠 받들도록 암묵적인 지시를 하거나 그들이 부적절한 행동을 해도 제지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출판계의 현실을 설명했다.

다른 예술 분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모델 활동을 하고 있는 C 씨는 사진작가와 모델 사이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에 대해 토로했다. 그는 “사진작가와 모델은 암묵적으로 임금을 지급하지 않은 채 작업을 하는 일이 많다. 내가 찍어주면 너도 좋은 것 아니냐는 태도이기도 하다. 에이전시 없이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경우는 대우가 더 심하다”라며 “사진 촬영을 하는데 예고 없이 팬티를 벗기거나 신체접촉을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말했다. 이어 “모델은 이런 일을 당해도 마땅히 말할 곳이 없다. 노조나 신문고 역할이 없어 각자의 상처로만 간직할 뿐이다. 더 벗지도 못하면서 무슨 모델이냐는 말에 상처를 받아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고 활동을 그만두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는 자기가 나약한 게 아니라 성추행을 당하니 약해질 수밖에 없는 일 아니냐”고 말했다.

100인 위, 그 다음을 향해

‘이제는 말한다.’ 16년 전, 성폭력 사례를 수집하고 가해자의 실명을 밝혔던 일이 있었다. 여성활동가들로 구성된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이하 100인 위)’의 탄생이다.

이들은 민주노총과 가맹조직, 노동·시민사회단체, 민주노동당, 재야인사 등 진보운동진영을 총망라한 성폭력 사례를 수집했다. 100인 위는 ‘평등’과 정치적 진보를 말하며 ‘동지’라는 이름으로 가해진 성폭력과 남성 중심적 행태를 고발했다. 운동사회 내에서 수많은 성폭력 사건이 있었음에도 조직을 강조하며 숨겨왔던 사건에 대한 폭로였다. 16명의 가해자 실명과 성폭력 사례가 공개됐다. 가해자 실명 공개에 대한 비판과 피해자의 경험에만 입각해 성폭력 개념을 확장해 정립 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100인 위의 발표 이후 운동진영 내에서 조직 내 성폭력 사건에 대한 규정을 마련하고 성폭력에 대한 예방 교육을 시작했다. 피해자를 보호하고 성폭력 사건을 무마시키지 않을 수 있는 내규들이 마련된 것이다.

16년이 지난 지금, 100인 위의 활동을 통한 변화는 무엇이 있을까. 100인 위가 마련한 성폭력 해결 절차와 과정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인식의 변화가 이를 쫓아가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페미니스트들의 연대체인 셰도우 핀즈는 “100인 위 활동 이후 운동진영 내부에서 성폭력과 관련된 각종 제도들이 보완되고 강화되는 추세인 것은 맞지만,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위축되고 축출되는 과정은 여전하다. 가해자가 가해 사실에 부합하는 형태의 처분을 받는지도 의문스럽고, 여전히 가해자들의 복귀는 일정시간이 지나면 어렵지 않다고들 한다”고 말했다.

환경과 상황도 변했다. 100인 위가 수집해 발표했던 사례는 SNS라는 보다 개별적이고 확장성이 큰 공간에서 ‘폭로’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지지와 연대의 범위는 넓어졌다. 송란희 한국 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최근 성폭력에 한정되지 않고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혐오적이고 차별적인 행위의 경험 역시 모아지고 있다. 동시에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목소리를 모으며 지지해주는 그룹이 늘어나고 있다”라며 “나 혼자가 아니고 지지해주는 그룹이 있다면 대응 방식은 전혀 달라진다. 고발을 넘어서 집단적인 각성이 일어나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페미 서포터즈’의 탄생이다.

‘페미라이터’가 그렇다. 페미라이터는 문단 내 성폭력 방지를 위한 작가 모임이다. 이들은 트위터에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과 관련해 작가들이 할 수 있는 공동 행동을 제안하고 추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배경을 밝혔다. 최근에는 SNS를 통해 문학, 출판계 성폭력 퇴출에 동참하는 ‘작가 서약’을 받고 있다. 작가 서약은 “나는 성폭력, 위계 폭력의 가해자가 되지 않겠습니다. 타인의 인격과 인권을 존중하겠습니다. 젠더, 신체적 조건, 연령, 지위 등의 차이를 이용해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습니다” 등 일곱 가지로 이루어져있다. 서약은 등단 문인에 한정하지 않고 ‘글을 쓰는 정체성’을 지닌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셰도우 핀즈’는 페미니스트들의 연대체이자 프로젝트 그룹이다. 이들은 데이트 폭력, 성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 에게 명예훼손 등 보복성 고소를 당한 이후 연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피해자들과의 연대를 위해 만들어졌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사실을 알릴 때 망설이게 되는 부분 중의 하나는 가해자의 역고소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명예훼손, 모욕죄, 무고죄 등 다양한 방식으로 피해자를 압박한다. 이는 100인 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가해자로 지목된 이는 실명공개를 두고 100인 위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이후 검찰은 100인 위의 성폭력 실명공개가 명예훼손이 아니라고 불기소했다)

셰도우 핀즈는 이러한 가해자의 압박과 역고소에 위축돼 피해자가 입을 닫지 않도록 보복성 고소와 관련한 성공 실패 경험을 공유하고, 대응 매뉴얼과 가이드라인도 작성한다. 경찰과 검찰의 수사과정에서 무혐의 처분은 어떻게 내려지는지 판례를 분석 하는 등 전문분야의 지식을 공유하기도 한다. 이들은 사실에 대한 ‘기록 투쟁’도 이어간다. 셰도우 핀즈는 “‘말’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기록’이 뒷받침이 돼야 한다. 이를 위해 피해 사례를 아카이빙 하는 등 기록 투쟁을 이어갈 것”이라며 “피해 사례의 선정적 나열이 아니라, 피해의 발생원인 등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 폭로 이후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응 및 진행과정, 사법 시스템 이용 시 그 결과에 대한 정리 등 다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나의 일, 혹은 내가 겪을 수 있는 일, 또는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겪었던 일. 성폭력 피해가 혼자서 겪어내야 할 일이 아니라는 지지와 연대가 넓어지고 있다. 암묵적 연대의 힘으로 계속해서 조금씩, 혼자가 아니라는 울림을 전하고 있다. 한 순간에 가해자의 반성과 깨달음, 가부장성 사회가 바뀔 리 없다. 탁수정 씨는 “성폭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고 사라진다해도 아마 오래 걸릴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갖고 왜 그래?’, ‘원래 이런 분위기인 거 몰랐어?’라는 말에 ‘무슨 소리하세요. 큰일 날 소리 하시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는 것. 술자리를 주도하고 질펀한 농담을 하는 사람이 움찔하게 되는 것. 이런 작은 것 하나하나가 이어지면 희망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예술 뒤에서 권력을 무기로 검은 손을 내밀던 이들에게 조금씩, 느리더라도 또박또박 ‘그것은 성폭력’이라는 인식의 보폭을 넓히기 위한 연대가 이어지고 있다. (워커스 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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