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를 위한 전략 시뮬레이션

[워커스 26호] 나를 찾아서

하루하루 수많은 추가 의혹이 터져 나오면서 이제 정말 뉴스 따라가기도 벅찬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구중궁궐, 요샛말로 하면 시크릿 가든에 은신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자괴감도 들고, 부덕의 소치를 뉘우치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다가오는 매 주말이 두려울 겁니다. 이번 주엔 대체 얼마나 몰려올까, 뉴스와 신문엔 뭐라고 나올까 밤잠을 이루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은 없고, 변호사라고 뽑아놨더니 한 마디 한 마디가 정확히 사람들의 화를 돋우는 지점을 찌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워커스》가 한 번 각하께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주변에 훌륭하신 참모들과 비서진이 많겠지만 사실 《워커스》에서 알려드리는 것 외에 마땅히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잠시나마 각하의 충실한 비서로 빙의하여 전략 시뮬레이션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주의 기운 같은 치트키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 짜낸 방법이니 하나 골라잡으시죠.

이미지 큰 사이즈로 보기(새 창)


A 타입 : 비상계엄
박정희 하면 계엄, 계엄 하면 박정희! 한국식 민주주의의 유구한 전통, 계엄이야말로 땅에 떨어진 대통령의 권위를 바로 세우고 혼란에 빠진 나라를 구할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계십니다. 고개 한 번 숙여줬더니 신상털기에 나서 현빈 좋아하는 것까지 까발리는 괘씸한 작태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지요.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 했나’하는 생각도 들지만 대통령 무서운지 한 번 보여줘야 정신 차리겠지요.

어차피 한민구 국방장관은 한 배를 탄 몸.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쫓겨날 판국에 이렇게 된 이상 비상대권을 발동해 위엄을 보여주는 게 필요하겠습니다. 예전에 전두환 각하께서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기셨는데. 아직 제대로 당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민주주의가 어떻고, 나라가 어떻고 떠드는 무리에게 정말 본때를 보여줄 때입니다. “이게 나라냐?”고 묻는다면 “이게 나라다!”라고 당차게 보여주면 됩니다. 물론 대국적 이지 못한 판단의 결과는 제가 책임질 수가 없군요.

B 타입 : 버티기
각하는 이명박을 끔찍이 싫어하겠지만, MB에게 배울 점이 있다면 바로 뻔뻔함을 넘어 가증스러울 정도의 버티기죠. 2008년, 지금처럼 광화문이 촛불로 뒤덮였을 때 MB는 “노래 ‘아침이슬’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참회하는 척하면서도 명박산성을 쌓고 엄청난 수성전을 펼쳤습니다. 임기 첫해 직격탄을 맞았고 5년 내내 그 어떤 대통령보다 조롱의 대상이 됐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임기도 다 마쳤고 정권 재창출도 했고 심지어 지금은 다가올 대선에까지 마수를 뻗친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이 정도면 성공적인 버티기였죠. 각하의 귀감이 될 만합니다. 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촛불로 먹고사는 건 아닙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가면 사람들도 피곤해지기 마련. 매일 쏟아지는 속보도 언제부턴가 지겨워지기 시작할 겁니다. 사람들은 민감한 의혹과 특종보도에 열광적으로 달려들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각하가 품고 있는 그 어마어마한 의혹이 다 드러나려면 한두 달 가지곤 어림도 없습니다. 이미 친박과 박사모가 각하를 옹위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C 타입 : 외치만 담당
솔직히 이 판국에 일본 관련 문제를 건드리는 건 무리데쓰. 하지만 각하께서 그토록 원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위안부 합의부터 시작해서 군사정보협정까지 각하는 일본 문제에 대해 정말 일관된 방향을 갖고 계신 듯합니다. 역시 원칙과 신뢰는 헬조센이 아니라 일본을 위해 지키는 것이죠. 그것이 비통하게 가신 아버님이 소싯적 혈서까지 쓰면서 다졌던 각오를 이어받는 길입니다. 이건 일본만 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영원한 천조국, 미국이 그토록 원하는 제국의 질서에 제후국으로 마땅히 그 뜻을 떠받들어야지요. 우리는 400년 전 임진왜란 때부터 반세기 전 6.25까지, 나라를 살려준 은혜, 재조지은을 잊지 않는 나라 아니겠습니까.

이 혼란의 상황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일본과 군사협정을 맺고 사드 배치를 완료하면 미국도 각하를 외면하지 않을 겁니다. 조선일보마저도 어쨌든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각하의 뜻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역시 조선의 적은 북조선, 적의 적은 동지이니 싫든 좋든 조선일보도 각하의 외치는 인정해줄 겁니다. 다만 천조국 황상 폐하가 괴짜로 바뀌는 바람에 좀 골치 아프긴 하겠네요.

D 타입 : 2선 후퇴, 권한대행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적의 예봉은 일단 피하고 봐야 합니다. 그다음엔 더 큰 것을 지켜야죠. 보수 장기집권의 대의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비록 지금은 괘씸하지만, 비박계니 친이계니 하는 자들이 다음 정권을 잡는 게 그나마 각하의 퇴임 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길입니다. 전두환, 노태우 보세요. 원래 죽을 뻔한 거 그래도 정권 재창출하니까 YS가 국민 대통합이라고 살려주잖습니까. 각하도 이명박 퇴임 후에 그래도 적당히 봐주셨으니, 정권 재창출만 되면 심하게 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려면 지금 더 이상 어그로를 끌면 안 됩니다. 지금 유영하 변호사와 이정현 대표가 안 먹어도 될 욕까지 다 뒤집어쓰고 있어요. 지금은 한발 물러서야 합니다. 어차피 대통령직만 유지하고 있으면 기회는 분명히 옵니다. 내치, 외치, 군 통수권까지, 책임총리건 권한대행이건 일단 주면 됩니다. 민주당은 떡밥을 물 겁니다. 거긴 촛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당리와 당략이란 걸 그래도 계산할 줄은 아는 곳이니까요. 그다음은? 어차피 민주당도 구조조정, 가계부채, 노동개혁 원칙적인 입장도 비슷하고 더군다나 능력도 별로 없습니다. 앞으로 1년간 실권 쥐어주고 온갖 욕먹게 하면 그만입니다. 우리는 내년 대선을 준비하면 됩니다. 87년 그 난리법석 뒤에도 대통령은 노태우가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E 타입 : 탄핵 유도
얼마 전 동아일보 칼럼에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주말 시위에 100만 명이 모였어도 그게 민의는 아니다. 무작위 추출된 1,000명의 여론조사보다도 민의를 더 정확히 대변하지 못한다.’ 이런 대쪽 같은 충언을 믿고 당당하게 버티면서 “법대로” 를 외치면 됩니다. 100만 명이 모인 게 뭐가 두렵겠습니까. 설령 5,000만 명이 몰려온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경찰을 넘어, 차벽을 넘어, 청와대로 들어와서 각하를 직접 끌어내리지 않는 한 몰려든 군중은 결국 언젠가는 흩어질 겁니다.

헌법적 절차를 밟자며 김무성 등이 탄핵 운운하고 있지만, 어차피 김무성은 탄핵안 못 올립니다. 옥새파동 말고는 김무성이 결단 내렸던 적은 없습니다. 그때도 총선 지나고 나서는 우리 친박계에 꼬리 내렸지요. 민주당, 국민의당도 선뜻 탄핵 못 합니다. 노무현 때 대차게 역풍 한 번 맞아봤고, 어쨌든 국회 법사위, 헌법재판소 전부 각하에게 유리하니 설령 탄핵소추를 올려도 실제 탄핵당할 일은 없습니다. 각하께서는 그저 이렇게 시크하게 말하시면 됩니다. “불만 있어? 불만 있으면 탄핵해!”

F 타입 : 하야
한 줌밖에 안 되는 박사모가 도움 되기는커녕 똥칠만 하고 있고, 이정현은 반격하라고 했더니 대놓고 비웃음을 사고 있습니다. 무리수를 두면서 사드까지 밀어붙인 만큼 뭔가 해주리라 믿었던 미국은 ‘누가 대통령이든 상관없다’며 슬쩍 등을 돌립니다. 헌법재판소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노무현 때야 탄핵 반대 촛불이 들고 일어났지만 지금은 물러나라는 촛불이 역대급으로 번지고 있어, 몸과 마음을 다하는 충성이라곤 쥐뿔도 없는 눈치 보기의 대명사 사법부를 믿고 운명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퇴진보다는 하야가 좀 점잖기도 하고 내 발로 물러난다는 느낌도 들 수 있습니다. 대통령에서 물러난다고 모든 명예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끌려 내려와 험한 꼴 보는 것보다, 품위도 지키고 책임도 지는 모양새를 보여주면 명예를 지킬 수 있습니다. 게이트의 원조, 워터게이트로 물러난 미국의 닉슨도 스스로 물러날 때 말이 많았지만 어쨌든 시간이 많이 지난 후 비교적 잠잠해지지 않습니까. 아 참, 다들 구속돼서 하야 성명서를 대신 써줄 사람이 없다면 말씀만 하십시오. 여기, 많습니다.

G 타입 : 즉각 퇴진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고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고 느끼는 시점입니다. 당내에서 탄핵 운운하고, 김무성이 대선에서 각하를 지지한 ‘원죄’를 고해성사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거의 넘어올 것 같았던 추미애마저 하루도 못 버티고 퇴진으로 돌아서 버린 상황. 조선일보는 그래도 퇴진은 안 된다고 말은 하지만 점점 후퇴해서 이제는 헌법 71조를 들먹이며 권한대행을 세워 권력을 통째로 넘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주말엔 좀 편하게 자고 싶은데, 수십만에 이어 백만이 경복궁 코앞까지 밀려와 퇴진을 외쳐대니 그 소리에 놀라 밤잠을 이루기도 힘듭니다. 이제 다음 주는 또 얼마나 몰려올지 주말만 바라보며 전전긍긍하는 끔찍한 하루하루. 그러게 왜 굳이 가명을 길라임이라고 하셨어요. 도저히 커버를 해드릴 수가 없잖아요. “이게 최선입니까” 라고 되물어봤자 돌아올 대답은 똑같습니다. 지금 그냥 내려오세요. 지금까지 보다는 조금이라도 편한 밤잠을 이루게 될 겁니다. 구속된다고 꼭 나쁘게 생각할 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새벽까지 퇴진하라는 함성은 들리지 않을 테니까요.

H 타입 : 망명
이젠 꿈이고 희망이고 다 잃으셨군요. 촛불을 버텨낼 힘도, 정책을 밀어붙일 의지도, 그렇다고 대의를 위해 희생할 결의도 없다면 튀면 됩니다. 우리에겐 “내가 간다, 하와이”를 선구적으로 실천하신 국부 이승만 박사가 계시지 않습니까. 범죄자로 낙인찍히더라도 독일 같은 데만 피하면, 미국 정도라면 아마 매몰차게 돌려보내지는 않을 겁니다. 프랑스도 좋겠네요. 올랑드 대통령은 각하의 5%보다 더 작은 4%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하니 동병상련이라고 받아줄지 누가 알겠습니까? 프랑스에서 유학도 했는데 다른 곳보다는 더 편하겠지요.

이승만도 재평가 받고 누구는 건국의 아버지라고 칭송까지 하는데,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밖에 나가서 조용히 계신다면 누군가 각하를 다시 미화해줄 겁니다. 보니까 순Siri가 여기저기 밖으로 빼돌린 돈이 많던데, 그거 다 모으면 풍족하게 사는 데 문제없을 겁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대국적인 결정이니, 뒤끝이 험하지는 않을 방법입니다.
태그

탄핵 , 정권퇴진 , 박근혜 , 최순실 , 거국내각 , 비상계엄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강후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