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즐거워야 하고 우리 안에서 즐거워야 해요”

[워커스 28호] 류미례, 이동수를 듣다

[출처: 사진/ 정운]

펜과 종이를 들고 나선다. 길 위에서 그린다. 거리를 무대 삼아 현장의 목소리와 사람들을 그려낸다. 자본과 공권력에 터를 잃게 된 용산 참사의 현장에 머물고 콜트콜텍 해고자들 곁에 있으며, 노조파괴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유성기업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을 찾는다. 세월호 참사 후 한참을 울다 광장을 찾아 단원고 아이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매주 화요일이면 어김없이 광화문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든 시민부터 광장을 찾은 여러 사람을 그리며 기록하는 작가. 류미례 감독이 이동수 만화가를 만났다.

류미례(류) 95년인가 이동수 선생님이 우리만화협의회 사무국장이셨죠. 제가 그때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민예총)에서 어리고 여성인 실무자로 여러 설움을 겪고 있었거든요. 여성 활동가를 일회용으로 취급하는 분위기도 있었고요. 그때 따뜻하게 환대해준 거의 유일한 공간이 우리만화연대였어요.
이동수(이) 기억나요. 당시에 만화 강습을 해서 여러 사람이 오갔을 때였죠. 사실 나는 우리나라 미술계 족보에서 자유로워요. 족보가 없어요. 운동하는 사람과 조직 내에서도 인간사회의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있잖아요. 무언가를 기획해 진행해도 내가 얘기하는 거랑 선배가 얘기하는 것 중 성립될 확률이 다르고요. 나는 미대도 안 나왔고 정통 미술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철모르고 편하게 했을 수도 있어요. 상급기간이 이른바 갑질 할 때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주위 사람들도 편하게 대할 수 있었나. (웃음)

조직을 꾸리다 보면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 부분이 있잖아요. 합리 때문에 사람을 기능적으로 활용하게 되는데 그게 꼰대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걸 선생님한테는 못 느꼈어요.
나도 있죠. 안 그러려 노력하지만 어떤 순간에 드러날 수도 있고요. 사람들은 못 해서가 아니라 귀찮아서 못 한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꼰대가 되는 거 같아요. 우리 딸에게는 내가 제일 꼰대일지도 몰라요.

시사 만화가로 활동을 하셨잖아요. 그런데 2011년 마로니에 공원에서 인권영화제 했을 때, 선생님이 캐리커처를 하시더라고요. 시사 만화가에서 캐리커처를 그리는 사람으로 변신한 계기가 있을까요.
사실 캐리커처는 그 전에도 계속했어요. 시사 만화가가 상대적으로 정치 인물을 풍자해 그려야 해서 캐리커처를 잘 그리는 편이거든요. 그게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고요. 현장에 대한 욕구는 신문사에 있을 때부터였어요. 노태우, 전두환은 내가 눈감고도 그린다고 농담처럼 말하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단병호 선생을 그리는데 잘 안 그려지는 거예요. 그때 느꼈죠. 내가 미워하는 놈들은 잘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은 낑낑거리며 잘 못 그리는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용산 대참사 때,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현장의 캐리커처에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었어요. 용산 현장을 가보니 캐리커처를 그리기는 모호한 상황이더라고요. 그래서 현장에서 크로키를 했죠. 문화 활동가들은 벽에다 꽃을 붙였는데 용역들이 뺐더라고요(그걸 다 떼어버리더라고요. 그리고 카메라는 뺏어버리고. 카메라가 반입이 안 되는 상황인데 나는 펜하고 종이만 있으면 되니까 그걸 그릴 수 있었어요). 그때 저는 그 모습을 스케치북에 그렸어요. 그 후에 제 그림을 한 언론사에 보냈는데, 그림이 이런 역할도 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현장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했어요. 당시 용산이 장기전이 되면서 우리끼리 힘을 내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한 단체에서 아이들과 벼룩시장 겸 행사를 했는데, 저도 캐리커처를 하며 참여했죠. 그 이후에 문화연대에서 기념 전시한다고 하면 가서 그리고, 재능교육 농성장 가서도 캐리커처를 그렸죠.

선생님의 자기소개를 보니까 ‘레알로망 캐리커처리스트’라고 나오더라고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맞아요. (웃음) 제가 현장 캐리커처에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현장에 온 사람들은 이류라는 인식이 있는 편이잖아요. 자신도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고요. 내가 실력이 없어서 여기 와 있는 거 아닌가 하면서요. 물론 여기저기 그냥 그려주다 보니까 마음에 안 들어도 사람들이 뭐라고 안 그러니까 실력이 늘지 않는 건가 싶은 마음도 생기더라고요. 고민이 들었죠. 그래서 이렇게 계속하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웬만하면 ‘저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캐리커처를 제일 잘 그리는 실력 있는 사람인데 우리랑 함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래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더라고요. '노장 공맹'이라는 말이 있어요. 저는 노자와 장자처럼 꿈을 꿔야 하지만, 우리의 삶은 공맹이 될 수밖에 없다고 풀이하는데요. 우리의 꿈은 마음껏 펼칠 수 있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형식과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기도 하고요. 쉬운 말로 땅을 딛고 하늘을 봐야 한다는 거죠. 결국, 레알과 로망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하잖아요. 레알이 없는 로망은 거짓이고 로망이 없는 레알은 팍팍하니까요.

선생님은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해 간직하고 전시하고 이런 식의 욕심을 내지 않는 거 같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언제부터인가 사는 게 별거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하는데 예술도 짧고 인생도 짧지 않나. 너무 내 것, 욕구에 집착하기보다는 더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면 뭐 어떤가 하는 마음이 들어요.

90년대 초부터 20년 넘게 활동하면서 여러 사람이 함께했고 지금은 각기 다른 자리에 있는데,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고 ‘현장을 선택’하면서 다른 길, 다른 기회에 대한 고민은 없으셨나요.
제가 젊었을 때 유명하면서 동시에 안정적이고 인기가 많은 만화가 선생님이 계셨는데, 과연 제가 이 길을 계속 가야 하는지 고민을 털어놨어요. 제가 상대를 나왔으니까 만화가 아니어도 직장을 들어갈 수도 있을 거 같았거든요. 만화에는 재능도 별로 없는 거 같고 다른 길의 여지도 있다고 고민을 하니까, 그 선생님이 ‘나도 그래’ 하시더라고요. 충격받았죠. 그때가 30대 중반이었으니까 처음 활동하면서도 계속 고민을 이어간 거예요. 또 한 편으로 저는 뜨는 걸 스스로 무서워하는 거 같아요. 변할까 봐서요. 흥하는 곳에 가면 내가 변심하게 될까 봐 회피하고 거리를 둔 경험도 많았죠. 결국, 고민이 없을 수 없어요. 순간과 상황, 고민의 지점은 다를지라도 고민은 계속돼요.

자신을 활달해 보이지만 소극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하시잖아요. 저도 그래요. 작업 할 때 현장을 지휘해야 하니까 밝은 기운을 내 뿜도록 노력하지만 사실 내성적이에요. 우리처럼 내성적인 사람일수록 외향적으로 활동하는 자리가 지치지 않나요. 근데 선생님은 힘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제 외면을 보는 사람들은 절 보고 힘이 난다고 하더라고요. 예전에는 전화를 받아도 되게 높은 억양으로 받았어요. 사람이 다 그렇잖아요. 관계 속에서는 나를 좀 죽이고 혼자 있을 때는 나를 드러내고. 삶이 고해인데 즐거운 일이 별로 없고요. 저는 만평으로 박근혜를 그리면 손가락이 썩어드는 기분이에요.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그리니까 나도 모르게 신이 나죠. 그래서 웃게 되고요. 다행히 현장에서 사람들이 좋아하고 기뻐하고 하니까 저도 힘이 되더라고요.

오랫동안 현장을 지킨 사람들이 있는데 광장이 넓어지면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모셔지잖아요. 민중가수들은 안 불리고요. 사실 90년대 말에 이른바 ‘촛불론’이 있었는데요. 촛불은 어둠 속에서 빛이 나는데 환한 등불이 보이면 촛불이 필요 없다는 거죠. 이렇게 넓어진 곳에 우리가 설 자리가 없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반복되는 고민이고요.
장이 다르다는 생각을 해요. 내 장은 현장이에요. 여기서 정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내 장인 거죠. 등불은 일반적인, 보다 폭넓은 장을 갖고 있죠. 또 하나는 작가가 지녀야 할 자존심 있어요. 이런 마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어, 그래 내가 밀렸네. 다음에 한번 보자. 다음에는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나를 부를 것이다’ 하는 마음이요. 또 공연, 판의 성격에서 보면 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잖아요. 거기에 내 작업이 안 맞을 수도 있죠. 기획하는 사람이 다르면 여러 가지가 달라지니까요. 넓은 판을 기획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고 우리를 모를 수도 있고요, 그럼 그냥 몰라서 생긴 문제일 뿐이에요.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 아직 대중적이지 못한 측면이 있다는 것 아닐까요. 누가 옳고 그른 것 대신에 그렇다면 그 힘을 어떻게 키워낼 것인가. 그걸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등불이 생기면 촛불은 또 다른 현장으로 가면 되는 거네요.
어찌 보면 그 촛불이 횃불이 될 수도 있는 거죠. 우리가 덜 알려져서든 아니든 꿀릴 필요가 없다고 봐요. 어떤 작가나 시장도 마찬가지이지만 촛불도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으로 승부를 보는 데 정말 이기려면 지속성이 필요하잖아요. 열정, 헌신하는 사람들의 지속성이요. 그게 없으면 금방 사라지니까요. 이 많은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것을 갖게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문화 예술 활동가라면 더 그걸 고민할 필요가 있고요.

현장이 어디에나 있지만 모든 현장에 갈 수는 없잖아요. 일과를 어떻게 정하세요?
아무래도 친한 곳부터 가겠죠.(웃음) 긴급한 데가 있잖아요. 막 싸움이 시작된 곳들이 있고요. 시급한 곳에 먼저 가게 돼요. 주로 사람들이 많이 안가는 노동투쟁 현장에 가려고 하는 편이기도 하고요. 또 콜트콜텍처럼 오래된 사이고 호형호제하는 현장은 아무래도 마음이 쓰이니까 더 찾아가죠.

현장에 캐리커처를 하는 사람이 선생님 말고는 없는 것 같아요.
가끔 후배 중에 같이 하고 싶은데 미안하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기본적으로는 제가 오가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상황이 되고 동하면 오는 거죠. 예전에는 선배가 부르면 아무 말 못 하고 가야 했던 때가 있잖아요. 저는 그런 게 싫더라고요. 성인이 자기 판단으로 움직여야죠. 진심을 갖고 오기를 바라고요. 각자의 장에서 역할을 하는 건데 마음이 동하면 오면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현장이 맞는데, 또 어떤 사람은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맞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요. 다를 뿐이죠.

선생님의 근거리의 꿈과 원거리의 꿈은 뭐에요?
개인적으로는 올겨울을 잘 넘길 수 있도록 일이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겨울을 날 수 있는 양식을 마련하는 게 개인적인 꿈이고요.(웃음) 박근혜, 김기춘 구속은 원대한 꿈이에요. 친일 유신의 뿌리가 뽑혔으면 좋겠어요. 우리도 좀 더 다양한 노력이 필요한 거 같아요. 원하는 대로 당장 되지 않았다고 실망하지 말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본인 스스로가 즐거워야 하고 우리 안에서 즐거워야 해요. 각자가 자기 발현을 즐겁게 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나라가 만들어져야 하니까요. 아이들도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대학 때 친구들과 모여서 했던 얘기가 우리가 장가가고 애 낳으면 이따위 나라 물려주지 말자 했는데, 결국 그런 나라를 물려준 꼴이 됐어요. 무엇을 잘못한 걸까. 깊은 반성이 필요하죠. (워커스 28호)

* 인터뷰 류미례 / 정리 신나리 기자 / 사진 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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