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을 생각하며

[워커스 28호] 시평

[출처: 홍진훤]

12월 9일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면서 박근혜는 한국 정치사에 첫 번째로 탄핵당하는 대통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고 해서 탄핵 절차가 끝난 것은 아니다. 헌법재판소의 최종 결정이 아직 남아 있다. 즉각 퇴진 압박에도 박근혜가 계속 버티는 것은 헌재 재판관 대부분이 보수 성향이라는 점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대세는 기울었다. 국회 표결 다음 날인 12월 10일에 열린 7차 주말집회에도 대규모 촛불 군중이 모인 것이 명백한 증거다. 전국에서 232만이 모인 그 전 주 집회 규모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훨씬 추워진 날씨에 전국에서 100여만, 서울 광화문 광장에만 80만이 모였다는 것은 박근혜 게이트로 불붙은 대중의 분노가 계속 불타고 있다는 말 아니겠는가. 그래서 보수 성향의 헌법재판소 재판관들도 이런 민의를 무시할 순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더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

따라서 박근혜가 권좌에서 물러날 것인가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박근혜 이후, 다시 말해 박근혜가 탄핵당한 뒤 한국사회가 어떻게 될 것이냐다. 이것은 한국의 미래를 전망하는 문제인 만큼, 입장에 따라 주장과 제안이 갈라질 수밖에 없다. 보수진영은 예상대로 원상태로의 복귀를 주장하고 있다. 탄핵소추안 통과 이후 법질서 수호 목소리를 부쩍 높이고 있는 보수언론이 대표적이다. 서울에 모인 집회군중 일부가 헌법재판소로 몰려간 것을 두고, ‘촛불, 헌법재판소로 가서는 안 된다’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큰 목소리를 거두고 법치국가 국민으로서 냉정하고 담담하게 헌재 심판을 기다려야 한다”고 써낸 <매일경제>가 좋은 예다. 법질서 수호를 지키자는 주장은 “헌재 재판관들은 그 어떤 압력으로부터도 벗어나 순전히 법률과 양심에 의해 심리하고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 <조선일보> 사설에서도 반복됐다.

보수언론이 법질서 수호를 외치는 동안 제도 정치권은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박근혜의 호가호위로 최순실이 국정농단을 하게 된 것은 87년 체제가 제왕적 대통령을 허용했기 때문이라며, 이제는 헌법을 고쳐 내각책임제를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개헌 주장은 대통령의 리더십만을 문제 삼고 있을 뿐, 그동안 촛불 집회를 통해 시민 대중이 제출한 한국사회의 근본적 개조 요구에는 귀를 닫고 있다고 봐야 한다. 박근혜가 제왕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동안 기득권을 누려온 세력은 다시 과거 질서로의 회귀를 바라거나 아니면 자신에게 유리한 새로운 법, 정치 질서를 만들고자 할 뿐이다.

따라서 박근혜 이후의 문제는 박근혜를 몰아내는 것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박근혜의 탄핵은 지금 지배 세력도 바라는 바다. 그러므로 박근혜 이후는 우리사회의 지배 세력과 지배당하는 다수 민중간의 정치적 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시민대중이 어떻게 자신의 권력을 주체화할 수 있느냐가 관건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동안 대중은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행동하고 잘 움직여왔다. 마치 1960년대 말 김수영이 쓴 시 <풀이 눕는다>에서 형상화한 대중의 모습 그대로다. 거기서 시인은 풀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이번에도 대중은 그 어떤 시류나 흐름보다 더 빨리 자신이 원하는 바를 드러냈다.

사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기까지 곡절도 많았다. 사보타주라고 해야 할 검찰의 늑장 수사, 집권당 주류 친박 세력의 반대, 비주류 비박계의 입장 바꾸기, 제1야당의 헛발질과 우왕좌왕, 제1야당과 제2야당 간의 불화, 야권 유력 대선 후보들 간의 입장 차이 등으로 과연 국회에서 탄핵 소추가 이루어질까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정치권이 탄핵 절차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10월 29일부터 12월 3일까지 여섯 차례 대규모 주말 집회를 통해 대중이 압박한 결과다. 시민 대중이 그 어떤 정치 세력보다 먼저 박근혜 하야와 퇴진을 외쳤고, 탄핵을 요구했다. 이제 대중은 박근혜 탄핵을 넘어 즉각 퇴진과 구속, 체포까지 요구하고, 더 나아가 일부의 목소리이기는 하지만 한국사회를 새로운 사회로, 예컨대 새 민주공화국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중이 새 민주공화국을 원하는 것은 그동안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권리와 권익을 유린당해온 데 대한 반발일 것이다. 대중은 지금 박근혜의 퇴출만이 아니라 박근혜 같은 부류의 정치 지도자를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구조와 형태 자체를 바꾸고 싶어 한다. 우리 사회는 과연 시민 대중의 이런 여망을 구현할 수 있을까? 바람보다 더 빨리 자신의 고통에 울고, 바람보다 먼저 목소리를 내는 대중이 바라는 사회, 그런 좋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하는 까닭은 지금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이 ‘수동혁명’이기 때문이다. 수동혁명은 진정한 혁명의 진전을 막기 위해 보수 세력이 벌이는 혁명 예방책을 말한다. 지금 정치권에서 다시 나오고 있는 개헌 논의는 그런 책략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럴 경우 한국사회에는 새로운 협약 민주주의(Pacted Democracy)가 탄생할 공산이 크다. 미국 스탠퍼드대 정치학과의 테리 칼 교수에 따르면, “협약 민주주의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민주주의로의 한층 더 진전을 차단하는 새로운 현 상태를 만들어내 정치체제에 보수적 편향을 제도화해 넣는다” 시민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차단한 채 정치권만의 논의를 통해 개헌이 이루어진다면, 그로 인해 탄생하는 새로운 정치체제는 시민 대중의 요구와는 거리가 먼 형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자유주의 세력이 독점한 87년 체제를 탄생시킨 경험이 있다. 87년 체제에서 신자유주의적 지배가 강화된 것은 실질적 민주주의를 배반한 협약 민주주의가 허용됐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와 관련해 며칠 전 진주의 한 집회에 참가한 19세 청년의 발언이 가슴을 후려친다. 박근혜를 퇴진시키고 최순실을 구속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박근혜와 최순실이 사라진다고 해서 주변에 산재한 또 다른 박근혜, 최순실은 어떻게 할 것이냐, 그것이 그의 질문 요지였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박근혜, 최순실의 분신들이 너무나 많다. 회사면 회사, 학교면 학교, 병원이면 병원에서 박근혜 짓과 최순실 짓을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분신들은 여성, 장애인, 노동자, 미성년자 등 우리 사회 소수자들을 짓누르고 착취하고 차별하는 존재들이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면 박근혜와 최순실 분신들을 모두 몰아내야만 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분신들은 사회 구조적인 측면도 지닌다는 점을 간과해서도 곤란하다. 우리 주변에 박근혜 분신들이 숱하게 깔렸지만 역시 첫 번째로 타격해야 할 대상은 이재용 같은 재벌일 것이다. 재벌이야말로 대를 이어가며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우리 사회 최고의 갑질 집단 아닌가. 박근혜 분신 척결은 따라서 재벌과 그들의 자본권력을 가장 먼저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이런 자본권력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검찰 권력, 언론 권력, 지식 권력이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 이후의 문제는 시민 대중이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대중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 일상적 차별 극복을 위해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 물론 대중은 지금까지 누구보다 먼저 움직여 왔다. 하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다가도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 것이 대중이기도 하다. 현 국면에서 그 대중이 계속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길 바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워커스 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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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퇴진 ,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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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내희 (참세상 이사장,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 학장)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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