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문턱에 가로막힌 HIV감염인 인권, ‘장애’로 인정해 차별 시정해야

국가인권위, 'HIV 감염인 의료차별 실태조사’ 결과 발표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 감염인은 치료요법의 발전에 힘입어 일상생활을 꾸리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의료기관에서 진료를 거부당하거나 부당하게 대우받는 경우는 여전히 빈번하다.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온 몸에 붕대를 싸맨 채 병원에서 쫓겨나거나, 비닐로 꽁꽁 싸맨 의자 위에서 치과 수술을 받은 사례는 감염인 사이에서 그다지 낮선 경험은 아니다. 바이러스 감염 자체보다는 의료차별이 감염인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위협한다.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가 지난해 장애여성공감에 의뢰해 작성한 ‘감염인(HIV/AIDS) 의료차별 실태조사’ 용역보고서는 HIV 감염인들이 겪고 있는 의료차별의 구체적인 실태를 담고 있다. 보고서는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감염인을 장애의 한 유형으로 인정하고 다양한 구제조치를 받도록 법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보고서가 전하는 대략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에서 신장 투석을 거부당한 HIV 감염인 당사자가 "15년 다니던 병원 에이즈 환자라고 신장투석 거부, 어디로 가란 말인가?"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출처] 비마이너

감염인 4~5명당 1명 진료 거부, 76.2% “병원에서 감염인 드러내기 어렵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1985년부터 2015년 말까지 HIV 감염인으로 보고된 인원은 1만 2523명이며, 생존자는 1만 502명이다. 60세 이상 생존자 비율은 10.8%(1139명)로 2000년 3.1%보다 크게 높아졌다. 한국의 경우 2000년대 중반 이후 간편하게 복용할 수 있는 항바이러스 복합 치료제가 도입되면서 감염인의 기대 수명이 크게 높아졌다. HIV 감염의 성격이 만성질환으로 바뀌면서, 감염인들이 받는 의료의 성격도 변했다. HIV 감염이 후천성 면역결핍증후군(AIDS)으로 악화돼 입원하는 사례보다는 일상적이고 가벼운 경증질환, 고혈압이나 당뇨병 등 만성질환 등으로 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나 보고서에서 감염인 20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4-5명당 1명 꼴로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거부당했다. HIV 감염 사실 확인 후 약속된 수술을 받지 못한 응답자가 26.4%, 약속된 입원을 하지 못한 이는 18.6%였다. 비록 진료 거부까진 아니나 인권침해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치료, 수술, 입원 시 감염 예방을 이유로 별도의 기구나 공간을 이용해야 했던 이는 40.5%, 의료인으로부터 동성애 등 성정체성을 혐오하는 발언을 들은 이도 21.6%나 됐다. 협진을 하지 않은 다른 의료인들에게 감염 사실이 누설된 경험도 21.5%나 됐다.

이렇듯 의료기관에 만연한 차별 때문에 응답자 중 76.2%는 병원에 자신을 감염인임을 드러내기 어려워했다. 또한 차별을 인지했을 때 국가 기관이나 병원 상담실, 인권단체 등에 도움을 요청한 경우가 29.9%로 차별을 개인적으로 참는 경우도 많았다.

HIV 감염인이 겪는 의료 차별은 건강 지표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사 대상 HIV 감염인은 흡연율 54.7%, 고위험 음주율 30.0%, 스트레스 인지율 45.9%, 우울감 경험률 34.0%, 1년 내 자살시도 경험률 41.7%로 비감염인(흡연 38.8%, 음주 19.4%, 스트레스 26.7%, 우울감 7.8%, 자살시도 0.4%)보다 건강 지표가 나쁜 편이었다. 그러나 최근 2년간 건강검진 수검률은 36.3%, 암검진 수검률은 21.8%로 비감염인의 수검률 각각 67.5%, 54.9%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또한 감염내과 의료인 60명이 사회적 낙인과 차별, 의료인의 경험 부족 등 6개 차별 원인 항목에 대해 차별 정도를 1-5점(점수 높을수록 심각)으로 평가한 결과로도 HIV 감염 및 에이즈의 차별 정도가 심각했다. HIV 감염 및 에이즈의 총합 점수가 23.95점으로 조현병 16.98점, 신종 인플루엔자 16.3점, 다운증후군 11.56점 등 다른 질병보다 월등히 높았다.

의료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사회 전반적인 차별과 더불어 의료인들의 HIV, 에이즈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점이 의료 차별의 주요 원인으로 드러났다. 사회적 낙인과 차별로 인한 의료차별은 HIV 감염과 에이즈 4.39점, 조현병 3.65점, 다운증후군은 3.16점 순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의료인의 경험 부족은 HIV 감염과 에이즈가 4.32점, 신종 인플루엔자 3.16점, 조현병 3.07점 순이었고, 동료 의료인의 반발은 HIV 감염과 에이즈가 4.3점, 신종인플루엔자 2.77점, 조현병 2.39점 순이었다.

  2015년 10월경 보라매병원이 HIV감염인 치과진료를 이유로 진료용 의자, 파티션 등에 비닐을 씌워놓은 모습 [출처] 권미란

HIV 감염인, 장애인으로 인정해 적극적으로 차별 시정해야

보고서는 HIV 감염인들이 겪는 의료차별을 해결하기 위해 의료계 내부뿐 아니라 다양한 법적, 정책적 해결 방안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먼저 보고서는 HIV 감염인이 감염으로 인해 일상 및 사회생활에 제약을 받고 있다며, ‘장애인차별 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에 따른 장애인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경우 인권위 진정이나 차별구제소송을 통해 감염인 의료차별을 구제할 수 있다. 나아가 등록장애인 범주에 HIV 감염인을 포함해 복지를 확대하는 한편, 특별법인 가칭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만들어 적극적으로 의료차별을 예방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보고서는 HIV, 에이즈가 만성화되는 흐름을 고려해 장기적인 의료 서비스를 확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생애주기별로 요양병원, 호스피스, 재택 요양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장기요양 환자들이 겪는 인권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가이드라인도 마련할 것 등을 방안으로 제안했다.

아울러 보고서는 의료인을 대상으로 한 적극적인 정책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감염인에 대한 적절한 임상 경험을 쌓고 진료 과정 중 주의 사항을 배울 수 있는 교육 과정을 마련하고, HIV 감염에 대한 두려움을 줄일 수 있는 홍보 대책도 마련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HIV 감염인의 의료차별 사례에 대해 실질적인 처벌을 하도록 법제를 마련하라고 강조했다.

덧붙이는 말

갈홍식 기자는 비마이너 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비마이너에도 게재됩니다. 참세상은 필자가 직접 쓴 글에 한해 동시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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