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문제’ 같은 건 없다

[워커스] 아무말 큰잔치

답답한 마음에 “그래서 도대체 청년의 문제가 뭔데?” 라고 물었더니 “선배가 겪는 문제가 바로 청년 문제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딱히 반박할 말도 없으니 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이다. ‘청년문제’를 주제로 (무려 원고지 15매에 달하는, 무려 신박한 문체로) 글을 써내라는 무리한 청탁을 받고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딱히 청년의 문제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싫었기 때문은 아니다) 도대체 <워커스>가 규정하고 있는, 또는 이 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청년’이 무엇인지, 창간 당시부터 ‘청년’을 주 독자층으로 삼아 갖은 기획과 꼭지를 생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겠다. 도대체 왜. 청년이 도대체 뭐라고.

[출처: 자료사진]

청년의 사전적 의미는 “신체적·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이다. 이 모호한 의미 규정 때문인지 정부와 지자체가 규정하는 청년 세대의 기준은 제멋대로다. 19대 국회는 청년고용촉진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처음에 청년을 만 19세에서 만 29세로 규정했다가 30대 구직자들을 소외한다는 지적에 만 34세까지로 상향 조정했다. 정부의 청년전용창업자금 지원은 만 39세 이하만 받을 수 있다. 서울시의 청년보장제도는 만 19세에서 29세가 수혜 대상이지만 성남시의 청년배당 대상자는 만 19세에서 24세까지다. 정치권의 청년규정도 제각각이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이 청년 비례대표를 뽑을 때 청년의 기준이 정해졌는데 새누리당은 35세 미만, 새정치민주연합은 45세 미만이었다. 만 31세의 성남시민인 나는 성남시의 청년배당은 받을 수 없지만 정부의 청년창업자금 지원은 받을 수 있다. 서울은 성남보다 공기가 좋지 않아서 신체적, 정신적 성장과 무르익음이 더딘 것일까.

<워커스> 창간 초기에 ‘청년 패널’이란 콘텐츠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2~30대 비슷한 연령의 몇몇을 불러 모아 그들의 이야기, 그러니까 취업, 빈곤, 연애와 성, 가정과 가족의 문제 등등 이른바 ‘청년 문제’로 손쉽게 언급되는 주제의 대담을 하는 기획이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 기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매 호의 기사에선 대담을 진행하고 이야기를 정리한 기자가 뭔가 대단한 대화라도 오고가고 심오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 과장했지만, 이제와 고백하건대 그거 죄다 ‘뻥’이었다. (독자 제현께 이 자리를 빌어 사과의 말씀을 올린다.) 매주 도무지 하나로 그러모아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중구난방으로 나열됐다. 뉴스가 제공하고 드라마와 영화가 포장한 ‘청년 세대’의 이미지를 재구성하려고 노력했다. 청년 세대는 죄다 가난하고 최저시급도 받지 못하는 알바에 시달리고 그 알바 업주는 악덕업주라는 설정. 그럼에도 미래의 꿈과 희망에 열정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클리셰, 지독한 가난함에도 끈끈하게 이어지는 사랑과 그 사랑마저 극복하지 못할 고단한 삶이라는 진부한 러브라인까지. ‘청년 세대’라는 허상을 만들고 그들이 사는 허구의 세상을 구획하는 일이었다. 거짓부렁의 글을 돈 주고 사 읽은 독자들에겐 죄송한 일이지만 솔직히 말해 ‘청년 문제에 대한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회의 관심과 호명은 거개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변명도 얹고 싶다. 대상을 짜맞추고 거기서 자기만족을 얻는 일. 무례한 고나리질과 의미 없는 꼰대질.

이건 ‘청년’이라는 개념 범주를 묻기 이전에 ‘청년 세대’가 이미 주어져 있다는 전제에서 이를 규정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정말 실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세대의 범주를 상정해놓고 문제를 만들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이미 주어져 있는 것에 끼워 맞추다보니 ‘청년’이라는 세대는 호명의 순간부터 대상화된다. “너희는 이런 세대고, 이런 아픔을 겪고 있을 거야 맞지?” 체제는 젠더, 인종, 세대, 국가 같은 것들로 노동력을 구획하고 통제한다. 2017년을 살고 있는 젊은 세대가 취업하기 어려운 건 자본의 이윤율 저하에 따른 문제고 삶이 피폐해지는 건 고도화된 신자유주의가 추동한 경쟁 때문이다. 그들이 그 세대여서 그런 게 아니다. 청년들이 만 39세를 넘어서는 순간 ‘뿅’ 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실은 ‘청년 문제’ 같은 건 없다. 제각각의 삶, 저마다의 어려움, 저마다의 고통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의 주름에 새긴 고통의 종류와 양과 질은 다 다르다. 그것들을 고작 ‘세대’의 이름으로 뭉뚱그리는 일은 너무 안일하고 불온하다. 88만원 세대, N포 세대, 달관 세대 등등등 등등등. 청년 세대를 규정하는 수많은 말과 말의 잔치가 포섭할 수 있는 ‘청년’은 없다. 세대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문제다. 특정 연령대를 불쌍히 여길 필요는 없다. 가난한 청년이 문제가 아니라 가난이 문제다.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들이 아니라 불량한 일자리, 불안한 고용이 문제다. 29세의 미취업이 49세의 실직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 건 아니다. 미래세대라고? 49세에겐 미래가 없냐고. 굳이 일부러 노력해서 ‘청년의 문제’를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워커스>는 안일한 세대론이 담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은폐하고 있는 너머의 것들을 들춰내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 선거철만 되면 ‘젊은 피’를 운운하며 떡고물 던져주듯 젊은 이들의 표를 구걸하거나 강탈하는 정치권의 속내, 88만원이니 청년의 대변자니 하는 세대론 장사치들의 꿍심 같은 것. 오늘 ‘청년 세대의 문제’를 운운하는 건 피시방에서 디스크 조각모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부디 담당기자는 다음 원고청탁에선 더 신박한 주제의 원고를 청탁해주길 바란다.[워커스 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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