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바뀌었는데, 비정규직은 왜 아직 거기에 있어요?

[워커스] 노동의 추억

6월 7일, 유성기업, 동진오토텍,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청운동사무소 앞 노숙농성에 들어갔다. 농성에 들어가기 전날 밤까지도 걱정했다. 정몽구 흉상을 내리는 것을 경찰이 막으면 어떻게 할까. 텐트를 치면 경찰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부숴버릴 텐데, 밤새 텐트를 치겠다고 싸워야 하는 걸까. 새삼스러운 걱정은 아니었다. 2013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농성하던 날에는 앰프도 제대로 내리지 못했다. 2014년에는 청운동사무소 인근 60여 곳에 집회 신고를 냈지만 모두 금지통보를 받은 적도 있었다. 2015년 오체투지 행진에선 청운동사무소 앞 기자회견을 했다는 이유로 집시법 위반 혐의 재판까지 받고 있다. 기자회견 한 번을 위해 연행과 폭력을 ‘결의’해야 했던 공간, 그곳이 청운동사무소였다.

[출처: 박다솔 기자]

그런데 7일 오전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청운동사무소에서 청와대 들어가는 길목을 채웠던 차벽도 없고, 경찰 병력도 적었다. 정보관은 여전히 많았으나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부드러운 분위기마저 풍겼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정몽구 흉상이 들어왔다. 기대(?)했던 바와는 달랐다. 초반에 잠깐 진입이 막혔으나 참가자들의 격렬한 항의 후에는 별 다른 무리 없이 흉상이 농성장으로 들어왔다. 오후 늦게 친 텐트에 대해서도 경찰은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근 십 년 만에 ‘최소한의 인권을 지킬 장비를 갖춘 최초의 청와대 노숙농성’이 시작되었다. “내부개혁 없이는 수사권도 없다”는 청와대의 메시지가 나온 지 얼마 안 된 시기인지라 경찰들의 대응이 유별났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촛불항쟁으로 바뀐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새삼스레 실감한 날이었다.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 한 번 하겠다고 몸을 던져야 했던 시간. 시청 광장과 대한문, 광화문 광장에서 천막 한 번 쳐보겠다고 발버둥 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승냥이처럼 천막으로 달려들던 경찰들에게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예의는 지켜라”라고 외쳤던 악다구니들도.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 외치는 것이 ‘용기’가 돼야 했던 장면들도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당연한 권리가 보장되는 경험에 기쁨보단 허탈함이 앞섰다. 이 날의 경험이 변화의 시작일지, 변화의 전부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정권이 바뀌었음을 처음 몸으로 느꼈다.

비정규직, 아직도 굳건한 적폐

노숙농성에 들어간 노동자들은 “적폐1호 정몽구를 구속하라”며 현대・기아자동차의 불법과 편법 엄단에 정부가 나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얼마 전 5월 19일, 대전지방검찰청 천안지청은 현대자동차 구매담당 임원 등 4명과 현대자동차를 기소했다. 부품사 노조파괴 문제로 원청이 기소된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기소까지 과정은 험난했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2012년부터 현대자동차 책임자들의 처벌을 요구했다. 노동조합이 현대자동차를 고소하면 검찰은 불기소처분을 하고, 노동자들이 법원에 재정신청을 하면, 검찰이 또 다시 불기소 처분을 했다. 노동자들이 증거를 추가로 확보하여 재차 고소하면, 검찰이 질질 사건을 끄는 것이 지난 6년 동안 반복돼 왔다. 포기하지 않은 노동자들과 변호사들의 뚝심이 현대자동차를 사법부의 저울 위로 올려놓을 수 있게 한 것이다.

현대·기아자동차 불법파견도 마찬가지다. 2004년 노동부가 처음 불법파견 판정을 내고 8년이 지나서야 대법원은 사내하청 노동자(최병승)가 불법파견이며,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한다는 판결을 냈다. 이어 2014년에는 현대자동차 1,179명, 기아자동차 468명의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승소 판결이 이어졌지만 여전히 회사는 불법파견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고 있다. 불법파견만이 아니다. 동희오토, 만도헬라, 현대모비스, 현대글로비스, 현대위아 등 정규직 0명 공장, 현대글로비스가 동진지회 노동자들에게 하고 있는 노조탄압까지. 노동자들이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최소한의 권리가 무너진 일터를 만들고, 법이 규율하고 있는 최소한의 처벌도 피해 다니는 기업이 바로 현대·기아자동차다.

이명박근혜 정권 10년이 최소한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짓밟았다면, 정몽구 회장 일가는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노동의 권리를 무너뜨리고, 노동적폐를 쌓아왔다. 이들이 돈의 힘을 이용해 얻어낸 면죄부는 다른 재벌과 기업주들이 서슴없이 불법에 뛰어들 수 있게 자신감을 불어넣었으며, 이들이 설계한 정규직 0명 공장, 노조파괴 매뉴얼은 산업구조 전반으로 파고들어 나쁜 일자리를 늘리는데 주요한 역할을 해 왔다. 그렇기에 현대기아자동차 비정규직, 유성기업, 동진지회를 비롯한 부품사 노동자들의 농성은 노조 할 권리를 짓밟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투쟁이다.

함께 만든 승리의 경험, 조직화로 이어져야

파견법이 도입된 지 20년. 구조는 중층화 되고, 차별은 고착됐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다른 임금을 받는 일이 자연스러워졌고, 특수한 고용구조였던 ‘비정규직’이 어느덧 보편적인 고용구조가 됐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를 만큼 거대해진 비정규직 문제. 지금 당장 비정규직 법・제도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니 차별을 줄이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현실로 만든 경험을 갖고 있다. 현직 대통령을 끌어내렸으며, 대한민국 최고 재벌 총수를 구속시켰다. 집회시위의 금지구역처럼 여겨졌던 청와대 앞을 열었고, 광장에서는 수없이 많은 적폐들을 고발했다.

박근혜 퇴진 국면을 지나고, 다시 노동조합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다. 새로운 정부에 대한 기대가 만든 변화일수도, 촛불을 들었던 경험이 만들어 낸 변화일수도 있다. 이제 이들과 함께 삶을 바꾸는 바람을 몰고 올 차례다. 20년 가까이 사회 곳곳에 파고든 비정규직 법과 제도, 직군이라는 명목으로, 알바라는 이름으로 당해야 했던 차별에 균열을 만드는 바람이 필요하다. 이 바람은 작년 겨울이 그러했듯 누군가의 시혜나 은덕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변화가 가능하다는 믿음, 내 일터를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 새로운 꿈에 대한 희망이 모였을 때 비로소 일터를 바꾸는 씨앗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작년 겨울 함께 들었던 촛불이 세상을 바꿔냈듯, 이제 함께 뭉치는 노동조합이 새로운 변화를 만들 수 있다.[워커스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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