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으로 ‘무엇’을 하고 싶니?

차별에 저항한 영상활동가 다큐인 박종필 감독을 추모하며(3)

#1 작년 이맘 때였다. 박감독님께서 식사를 하자고 연락을 주셨다. 수년 전 ‘노숙인주말배움터’에서 함께 교사로 일하면서 서로 안면은 있는 터였지만, 나로서는 뜻밖의 연락이었다. 호기심을 가지고 나간 자리에서 <다큐인> 활동을 제안 받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나의 오랜 바람은 별 다른 계획과 노력 없이 갑자기 현실이 되었다. 그 때 감독님께서 나의 무엇을 보시고 그런 제안을 하셨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영상’을 ‘얼마나’ 잘 만드는지 보다, ‘영상’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물어보셨던 것이 기억난다.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려는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감독님의 말씀에 주저하던 마음을 다잡고 이 일에 뛰어들 수 있었다.

[출처: 이관택]

#2 <다큐인>에 들어와서 처음 맡은 역할은 감독님이 연출하신 영화 <잠수사>의 조연출이었다. 할 줄 아는 것이 없었기에 그저 감독님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것이 전부였다. 감독님은 평소 걸음이 무척 빨랐다. 함께 식사를 하러가거나 촬영을 위해 현장에 갈 때, 둘이 나란히 걷기보다는 대부분 감독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바쁘게 따라가기 일쑤였다. 나도 그다지 걸음이 느린 편은 아닌데, 감독님과 있을 때면 항상 걸음이 느린 아이가 되었다.

[출처: 이관택]

[출처: 이관택]

<잠수사> 첫 촬영 때 감독님의 걸음이 빠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그 날은 故 김관홍 잠수사 님의 가족들이 한강 고수부지에서 나들이를 하고 있었는데,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날쌔게 뛰노는 잠수사 님의 삼남매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축지법을 쓰듯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니시는 감독님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묵묵히 카메라를 들고 계시다가 어느새 아이들을 향해 해맑은 미소를 보여주시며 함께 놀아주시곤, 또 다시 아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카메라를 들고 계셨다. 마치 ‘촬영’을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 아빠를 잃은 아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함께 놀아주는 삼촌처럼 허물없이 온몸을 다해 아이들과 함께 뒹굴고, 뛰노는 모습 속에서 나는 감독님이 강조했던 ‘무엇’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다. 또 그것을 위해서 한 걸음 더 빠르게 발걸음을 움직이고,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기본자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잠수사> 촬영과 박근혜 탄핵행동으로 눈코 틀 새 없었던 지난겨울 내내, 동분서주하시는 감독님의 뒷모습을 따라다니면서 참 묵묵하고 분주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없고 몸이 빠른 사람 옆에서 말이 많고 몸이 느린 내가 과연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그의 든든한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지난 겨울이자 마지막 겨울이 떠오른다.

#3 <잠수사> 작업의 막바지 기간. 감독님의 컴퓨터에서 녹취 작업을 하던 중 우연찮게 메모를 하나 보게 되었다. 메모장에는 새해를 맞이하여 다짐하듯 적어놓은 올해와 내년에 해야 할 작업 계획과 목표들이 있었는데,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바쁜 작업 중에도 끊임없이 다음 작업에 대해 고민하고,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켜 의미 있는 일들을 계획하는 감독님의 면모는 보이는 그대로였기에 그리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개월 뒤, 함께 녹색병원에 가서 간암말기 진단을 받던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친 것은 그 메모장이었다. 의사로부터 진단을 받고 ‘망했다!’고 읊조리시던 감독님의 모습 속에서 그의 계획과 목표들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감독님의 절망과 불안함이 순간 전이되는 듯 내 몸도 얼어붙었다. 아무 말을 할 수 없었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밖에 없었기에 연신 두 손과 마음을 모았다. 감독님의 평화를 기원했지만, 그 기도가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확인했던 시간이었다. 다만 모았던 두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출처: 이관택]

#4 투병 중이셨던 감독님께서 급하게 찾으신단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병원으로 뛰어갔다. 단 몇 일만인데도 몰라보게 수척해진 모습에 몹시 놀랐으나, 표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감독님께서는 내 손을 잡고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꼭 좋은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몇 번이고 하셨다. 마치 유언과 같은 말씀 앞에서 나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감독님은 병석에서도 항시 다른 사람의 걱정을 하셨다. 자신의 투병생활이 혹여 세월호 유가족들이나 다른 투쟁하는 이들에게 걸림돌이 될까봐 외부로 알리시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고, 내내 다큐인의 미래와 동료들의 안위를 걱정하셨다. 또한 병원에서 도저히 손쓸 수 없었고, 심지어 웬만한 요양원에서 조차 받아주지 않을 만큼 병환이 깊어졌는데도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았다. 마치 지난 20년간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그랬던 것처럼, 묵묵하고 분주하게 절망의 시간을 헤쳐 나가고 계셨다.

나는 결국 감독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 날은 감독님의 바람으로 준비 중이었던 용산역 텐트촌 다큐 작업의 제작지원을 위한 면접이 있던 날이었고, 감독님을 간호하고 있는 송윤혁 감독을 대신하여 면접을 치러야 했다. 면접을 마치고 감독님이 계신 강릉으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 나는 임종소식을 들었다. 그 때 강릉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는 지금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뭔가 기나긴 암흑 속에서 멈춰있었다는 것밖에.

[출처: 이관택]

#5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감독님의 투병을 지켜보는 동안에도,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먹먹하고 답답했던 가슴 속 멍울은 이상하게 눈물과 통곡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난생처음 ‘죽음’을 아주 가까이에서 체험하고 있는데도 그것이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다. 감독님을 향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오열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나 자신이 낯설었고, 항상 든든하게 곁에 계셨던 분의 존재가 사라진 상황이 생경했다. 그렇게 장례가 끝났고, 감독님은 우리 곁을 떠났다.

눈물은 예상치 못한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폭발했다.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는 내내 나는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도무지 화면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영화 속에 등장한 독일인 가자가 내 눈에는 ‘박종필’로 보였다. 카메라를 들고 역사의 한복판에 있던 그 사람이,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아픔을 기록하고, 온몸으로 진실의 현장을 고발했던 그 사람이 지금 우리 곁에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감독님의 카메라는 항상 안에서 밖으로 향했다. IMF 직후 거리로 쏟아져 나온 거리노숙인의 아픔을 다룬 그의 첫 작품 <IMF한국 그 1년의 기록, 실직노숙자>에서 그는 거리 노숙인을 관찰하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그들의 삶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들과 함께 살았고,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일처럼 아파했으며 그들의 죽음을 묵묵하게 애도했다. <끝없는 싸움 에바다>에서도, <장애인이동권투쟁보고서, 버스를 타자>에서도 그는 투쟁의 한복판에서 장애인을 차별하는 폭력의 현실을 기록했다. 그의 카메라는 투쟁하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이 사회의 멸시와 냉대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고, 그것과 대결했다. 그는 외부자가 아니라 내부자이자 당사자였다. 영상으로 ‘무엇’을 하려 했는가? 그는 영상으로 차별받는 이와 긴밀히 연결되고자 했다. 차별이 난무하고 진실이 사라진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6 나의 첫 번째 조연출 작업이자 어느새 감독님의 유작이 되어버린 영화 <잠수사>의 맨 마지막 장면엔 故 김관홍 잠수사의 친구였던 이병도씨 인터뷰가 나온다. 그의 마지막 한 마디를 감독님께서는 참 아끼셨다. 그리고 몇 번이고 그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해주셨다. “관홍아! 나도 이제 너처럼 살게.”

감독님과 식사를 하며 영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여전히 나는 어리버리 하고, 말은 많고 몸이 느린 초보 영상 활동가이다. 감히 박종필 감독님처럼 산다는 얘기는 못하겠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차별과 억압의 수렁에 빠져있는 수많은 민중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기록했으며, 그들의 한을 담고 있는 감독님의 REC 버튼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큐인을 비롯하여 수많은 다큐감독들과 영상 활동가들이 그 REC 버튼을 여전히 부여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내가 잡은 카메라의 시선과 방향에 대해 면밀히 고민하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잊지 않으려고 한다. 말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몸과 마음은 좀 더 분주하고 빠르게 움직여 보려 한다.

#7 장례를 마치는 날, 감독님을 모란공원에 모시고 서울 사무실로 오던 차 안에서 제작지원 최종합격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감독님께서 임종을 지키지 못한 내게 괜찮다 말씀해주시며 선물을 주신 느낌이었다. 헉헉거리며 그의 걸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바라보았던 그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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