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1주년을 앞두고…문재인 정권의 벗은 누구인가?

[정치칼럼] 문재인 정권을 넘어, 진정 ‘깨어 있는 정치주체’가 되자

문재인 정권이 정치를 잘하고 있을까. 이제 5개월 지났을 뿐인데, 무슨 평가를 하느냐며 좀 더 지켜보자는 언술들이 적지 않다. 아직 평가할 것도 별로 없는데, 괜히 꼬투리 잡으려 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정치를 역사특수적 관계들의 산물로 보기보다 구체적인 정책의 투입과 그 결과물을 산출하는 블랙박스 정도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이견들이 있겠지만, 기존의 사회관계들, 그에 내재하여 작동하는 권력관계들을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갈 것인가를 놓고 벌어지는 이론, 실천에서의 목적의식적인 쟁투이다. 물론 이 때 기존 관계들은 비대칭적이고 불균등하기에 그 관계들을 과거로 돌리려는 수구(극우), 현재를 유지하려는 보수, 그리고 그것을 변화시키려는 진보가 상존하며 서로 경합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물론 진보도 하나가 아니기에 그 안에서도 긴장과 갈등은 지속된다.

이런 맥락에서 ‘지켜보자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함축하는가. 흔히 ‘나중에 보자는 사람 무섭지 않다’는 말들을 하지만, 정치에서 나중에 보자는 언술은 주의해 들어야 하는데, 그 경우, ‘나중’은 어떤 의미로든 게임이 ‘일단락된 국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의도, 인지 여부와 무관하게 문재인 정권도 노동자들에게 1년의 시간을 달라고 한 바 있다. 문재인 정권, 그 지지자들, 그리고 그들과 밀월을 꿈꾸는 사회정치세력들에게 1년은 매우 짧은 시간일지 모르나 어떤 이들에게는 하루가 1년, 아니 그 이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절박한 상황에서 비통한 삶을 살다 그것을 놓아야 할까. 기존 관계들을 재구성하기 위한 정치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획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점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아니면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재산과 교양을 지닌 자들을 대변하는 이들’이기에 마냥 여유를 부리는 것일까.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사람이 먼저다”, 문재인 정권이 이 사회의 구성원들을 보호해 줄 수 있을까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는 “이념, 성공, 권력, 개발, 성장, 집안, 학력보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만들고자 한다” “처음도 ‘사람이 먼저’이고 마지막까지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위해 늘 겸손한 문(門)이 되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촛불의 힘을 등에 업은 2017년 선거에서 ‘나라다운 나라’를 내세우고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역설하며 집권에 성공하였다. 그의 정치적 동지인 노무현 전 대통령 또한 “사람 사는 세상”을 화두로 내세웠는데, 사실 그런 사회와 나라를 꿈꾸지 않는 이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이념, 권력, 집안, 학력 등이 사람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고 있다. 그것들 때문에 삶을 놓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단지 물리적으로 삶을 마감하는 것만이 아니라 죽은 것과 진배없는 삶을 꾸리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렇기에 정말 시간이 없어서 그런 사회, 나라, 세상을 만들지 못한 것인지 다시 묻게 된다. 문재인정권이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기에 그런 기회가 있었고 이미 한국헌정사에서 가장 무능한 정권들로 기록되고 있는 수구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기 또한 과거 집권기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더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촛불혁명’으로 집권에 성공했다고 자임하는 정권의 입에서 ‘기다려 달라’는 언술이 거리낌 없이 흘러나온다. 그것도 자신들 또한 그 한축을 담당한 신자유주의체제 20년의 지배시기 동안 착취, 수탈, 차별, 배제 받아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게 된 이들에게 말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궤적에 대한 성찰 없이 ‘혁명’을 ‘인종과 절제의 미덕’으로 대치하고자 하는 그런 언술이 ‘미래를 위해 조금만 더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하였던, 그들이 적폐의 기원으로 간주하는 과거 수구파시스트정권들, 아니 지금 수구사회정치세력들의 언술과 무엇이 다른가. 단언컨대, 그 속에 이미 ‘혁명’은 사라지고 없다. 그렇기에 그들이 말하는 개혁도 숨 쉬기 쉽지 않은데, 현실의 역사 속에서 ‘혁명처럼 하지 않은 개혁’이 성공한 예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기다림 여부와 관계없이 문재인 정권이 ‘사람이 먼저인 사회’를 만들 것이라는 점에 관해서는 의심치 않는다. 단 ‘사족’을 붙여야겠다.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사람이었던 적은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즉 사람은 ‘초역사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문재인정권의 그런 포부는 이념, 권력, 집안, 학력 등의 기준에서 일정한 자격을 갖춘 이들만이 사람으로 대접을 받게 될 것임을 새삼 공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어디 그 뿐인가. 장애, 성정체성, 피부색깔, 민족, 국적 여부 등에 의한 차별과 배제가 완화되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더 노골화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문재인 정권이 말하는 ‘비정상의 정상화’가 ‘정상화되어야 할 또 다른 비정상’이라는 점을 새삼 곱씹어 보아야 할 이유인데, 그것은 현실 속에서 자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의 운명’을 확인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한 겹을 더 벗겨 질문해 보자.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의 국가, 즉 ‘신자유주의 경쟁국가’가 모든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가. ‘누가 누구를 보호한다는 말인가?, 국가가 시민을?’이라는 더 본질적인 문제는 접어두더라도 역사에 존재한 그 어느 국가도 사회구성원 모두를 보호한 적은 없으며 국경 안팎의 누군가를 끊임없이 타자화하며 재생산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시대의 국가가 근대 이후 핵심 이데올로기로 기능해온 ‘국가중립성’마저도 시궁창에 버렸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그 ‘국가중립성의 이데올로기’가 근대 이후 노동자계급 등 가난한 대중들의 지난한 투쟁의 산물이었다는 점에 착목한다면, 애초 국가의 핵심 유전자였으나 눌려 왔던 계급성, 가부장성, 자연 수탈성이라는 성격이 공공연한 것으로 되었음을 의미한다.

문재인 정권 또한 예외가 아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자유주의정치세력들처럼, 문재인 정권이 시종일관 ‘사람이 먼저인 사회’를 말하는 것은 그들의 전매특허인 ‘자유’에 부합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언술의 이면에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진언이 적혀 있다는 것 또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이른바 그들이 자임하는 ‘촛불혁명 정권’이 작동하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적지 않은 이들이 여전히 ‘개, 돼지’로 간주되며 그렇게 취급받고 있는 이유이다. 누구인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무엇보다 그 위에 이주자, 장애인, 성소수자(LGBT) 등의 타이틀이 포개진 이들이다.

[출처: 청와대]

‘질서 자유주의’의 실현, ‘정치 빈곤’의 난망한 꿈

문재인 정권의 핵심 목표는 ‘질서자유주의’의 실현이다. 특히 그것은 한편으로 과거 김대중 정권의 모토였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이라는 언술의 계승을, 다른 한편 그 모토와 달리 시장만능주의로 나아간 것에 대한 ‘자기비판’을 함축하고 있다. 물론 거기에서 민주주의는 국가의 법, 제도적 개입을 통한 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질서 조성’, 그것을 통한 기회균등의 제고를 의미한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비정상의 정상화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그런 기획은 어떤 정치적 문제를 지니고 있는가. 삶의 위기에 처한 이들이 문재인 정권이 복지예산을 늘리고 고용구조를 개선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소득주도의 경제성장을 목표로 삼는 것에 대해 호감의 눈길을 주고 박수를 치는 것은 자연스럽다.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한계를 인지하고 있는 진보적인 사회정치세력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문재인정권의 ‘진정성’을 믿고 지지, 협력하고자 하는 것 또한 이해할만하다. 사실 모든 것을 떠나 특정 이념, 행태를 준거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배제하는, 더 나아가 그 사회구성원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수구파시스트보다 이념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집권이 긍정적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이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럼에도 문재인정권의 정치를 냉정히 보아야 하는 것은 이 정권이 질서자유주의의 실현을 민주주의 그 자체로 믿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질서자유주의적 개혁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최소의 조건이 정권의 개혁의지가 아니라 그 의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적 힘, 즉 ‘인민의 자기통치성’ 제고를 위한 새로운 사회관계, 정치관계의 조성에 있음에도 문재인정권이 그 과제를 자꾸 배면으로 밀어내고 있기에 그렇다. 스스로 촛불정권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잠시 과거로 돌아가 보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이라는 김대중 정권의 모토가 실패로 끝나고 결국 노무현 정권기에 이르러 ‘삼성공화국’이 된,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는 기억으로 말이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가. 기존의 사회, 권력 관계들을 재구성하기 위한 쟁투인 정치, 그 핵심인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제도적인 것으로 환원시켜버렸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대통령 탄핵을 무력화시킨 촛불대중의 힘을 사회, 정치 변화의 기반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수구정치세력들과 타협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인민의 힘이 그 위에 있음을 망각하여 자신들을 떠받치고 있는 대중적 힘을 스스로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집권 말기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깨어 있는 시민”을 강조한 것은 매우 역설적인데, 진정 깨어나 있어야 했을 때, 깨어 있지 못한 것이 바로 그로 상징되는 당시의 집권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주정부 3기’로 김대중, 노무현정권의 적자를 자임하는 문재인 정권에게 묻자. 2017년 ‘촛불혁명’을 일으킨 대중은 ‘깨어 있는 시민’인가, 아닌가.

문재인 정권을 넘어 새로운 촛불을 만들자

문재인 정권은 ‘촛불혁명의 산물’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촛불이 없었다면, 집권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 평가는 적절하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자칭 ‘페미니스트 정권’ ‘노동자를 대변하는 정권’임을 내세우고 있으며 그에 호응하여 적지 않은 조합주의적 페미니스트들, 노동운동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런 기대는 식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문재인 정권이 ‘촛불혁명을 배신하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물론 그런 비판은 수정될 필요가 있는데, 문재인 정권은 촛불봉기를 배신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촛불의 요구 가운데 일부를 변형, 수용하고 다른 어떤 요구들을 배제하고 있을 뿐이다. 애초 촛불대중은 균질한 하나의 바위덩어리가 아니라 이질적이며 그 요구들 또한 상이하였기에 그렇다. 기존 제도정치세력들과 분리될 수 없는 촛불대중 안에서 이미 ‘정치’는 진행 중이었고 그렇기에 비정규직 철폐, 여성혐오 반대, 재벌해체 등의 요구가 후순위로 밀려난 것 아니겠는가. 촛불봉기 그 자체가 ‘혁명’의 제도화와 탈제도화의 긴장과 갈등, 타협 등을 담지한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거기에 ‘모두의 승리’라는 이름표를 붙인다고 한들 그것이 ‘중립의 언술’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이것이 지금 문재인정권이 한편으로 손쉬운 ‘행정명령’, 다른 한편으로 수구야당과의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배경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야기되고 있는 대중의 불만은 이른바 ‘공감과 소통’으로 집약되는 ‘이미지 정치’로 위무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 정당정치의 위기를 상징하는 ‘이미지 정치’는 그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문제해결능력의 빈곤을 확인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특히 민주정권을 자임하는 문재인정권의 경우, 그 모든 행보가 수구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대척점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퇴행적이다. 기존 ‘수구-보수 독점의 정치’라는 틀을 유지하면서 ‘촛불정권’이라는 언술로 자신들의 역사적 오류와 한계를 가리며 눙치고 있기에 그렇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런 하향평준화된 행보가 통할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5개월이 지난 지금, 문재인정권은 단지 ‘개혁’의 시간을 축내고 있을 뿐이다. 시간을 달라고 하면서도 그저 시기상조, 국회에서의 협치를 강조하며 방관만 하고 있을 뿐이다. 김대중, 노무현정권이 그랬듯이 그런 요구들을 특정한 사회정치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고자 하는 과도한 요구들로 치부하면서 말이다.

문재인정권이 말하는 ‘혁명’이 무엇이든 그것은 기존의 관계들을 변화시키는 것을 핵심으로 할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혜적인 정책들’이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을 시민인륜을 지닌 정치주체로 일으켜 세우는데 필요한 조치들이다. 노동3권 등 노조 할 권리의 보장, 나아가 시민적 보편성을 확인하는 차별금지법의 제정, 그리고 그러한 변화를 정치적으로 담보할 독일식 비례대표제 도입 등이 필요한 이유이다. 물론 지금의 이 상황을 문재인정권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차별금지법, 노조할 권리,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등의 온전한 실현이 어디 그들이 앞장서서 할 수 있는 일인가. 그 어떤 시대, 그 어떤 권력이 대중의 자기통치 제고를 위한 조치들을 스스로 발동한 적이 있는가. 그것들의 실현은 항상 자기통치를 원하는 이들의 몫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묻는다. 문재인 정권, 당신들의 ‘정치적 벗’은 누구인가. 차별금지법, 노조할 권리,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등을 찬성, 지지하는 이들인가, 아니면 그것을 반대, 혐오하는 이들인가. 어느 길을 걷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 ‘나라다운 나라’에 부합하는 것인가. 이 질문을 하는 것은 늘 ‘역사의 무게’를 강조하는 당신들의 정치적 운명은 물론, 당신들과의 정치적 관계, 이 사회구성원들의 현재-미래의 삶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이광일(성공회대)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ㅇㅇ

    웃기고 있네 니네들은 꺼져라

  • 양심좀

    하나하나 반박하기가 피곤해서 비웃어주고 간다. 수준하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