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의 장소, 탑골공원 민가협 집회

[워커스] 인권의 장소

중앙버스전용차로 조성 공사가 한창인 서울 종로 2가,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종로 3가 방향으로 5분 정도를 걸으면 인사동 네거리가 보인다. 인사동 초입에 위치한 금강제화 건물의 맞은편이자 YBM어학원 맞은편에는 예스러운 한옥 기와 담장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탑골공원이다. 1897년 서울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공원(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공원은 인천 만국공원이다). 전철로는 종로3가역 5번 출구와 2-1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5번 출구로 나오면 낙원시장을 지나 우리나라 국보2호라는 원각사지10층 석탑이 보이는 담장을 지나 서문으로 들어올 수 있다. 서문으로 가는 공원 벽 사이로 나이 많은 할아버지들이 장기판을 두고 대여섯 명씩 앉아있다. 그 무리가 예닐곱 정도 돼 보인다. 서문을 지나 귀퉁이를 돌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현수막을 펴고 설교와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여기까지만 오면 이곳에서 민주주의의 외침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출처: 사계]

찬송가를 부르는 인파 옆을 20m 지나면 기와 밑에 ‘삼일문’이라 쓰인 정문이 보인다. 독립선언문에서 발췌한 인쇄체글씨를 본뜬 것이다. 삼일문 앞에 나이 지긋한 여성과 남성 스무 명이 주섬주섬 선전 피켓을 깔고 앰프를 설치한다. 나이가 칠십은 돼 보이는 여성들이 가방에서 보라색 수건을 꺼내더니 머리에 두른다. ‘국가보안법 폐지하고 양심수를 석방하라’고 쓰인 현수막을 펼친다. 민가협 목요집회를 준비 중이다. 민가협의 풀네임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지만 인권활동가들도 헷갈릴 정도로 약칭이 더 알려진 양심수 석방운동 단체다. 집회시간인 낮 2시가 다 되어가자 푸른 수의를 입은 젊은이 스무 명이 광화문 방향에서 집회대오에 합류한다. 통합진보당 이석기의원 등의 석방운동을 하는 ‘양심수 없는 나라로-동행’이 청와대까지 걷고 목요집회에 참가한 것이다.

2017년 10월 19일 1141회차 목요집회는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회장의 여는 발언으로 시작됐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발언에 귀기울이도 하고 무심히 지나가기도 한다. 개중에는 바닥에 깐 국가보안법의 역사와 양심수의 내용을 적은 피켓을 밟기도 한다. 그때마다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피켓 밟지 말아요!”라고 외친다. 가끔은 나이든 할배들이 “빨갱이들, 시끄럽네!”라며 삿대질을 하고는 탑골공원으로 들어간다.

문민정부를 압박하려고 시작한 목요집회, 26년

민가협은 반독재민주화운동에 뿌리를 둔 가족운동단체다. 한국인권운동의 초기는 군사독재 정권 아래 민주화운동을 하다 구속된 사람들을 구명하거나 사상양심의 자유 등의 자유권 중심의 운동이었다. 민가협은 1985년 12월 12일 서울 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 창립됐는데, 85년 7월 미문화원 점거농성이후 구속된 학생들의 부모모임이 중심이 됐다. 이전인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이후로 구속가족들의 모임은 있었지만 가족들이 석방운동을 매개로 스스로를 민주화운동의 주체로 선언하지는 않았다. 민가협은 창립발기문에 이를 분명히 했다.

“한 개인의 석방을 애걸하기보다는 민주화의 대열에 함께 서는 것만이, 고통 받는 이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지름길이라고 믿으며, 민중 민주 민족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발전적인 가족운동을 전개해 나가기 위해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를 발기하는 바이다.”

민가협 회원들은 창립 때부터 강제 연행과 고문 혐의가 있는 곳이라면 달려가 항의했다. 구치소나 교도소 앞, 대공분실이며 남산 안기부 앞에서 드러눕거나 수사관들을 붙들고 양심수를 석방하라고, 용공조작 그만하라고 외치며 싸웠다. 백골단에게 맞고 끌려가는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을 구출해내기도 했다. 2008년 촛불 때도 어머니들은 경찰이 시민들을 연행하려고 하면 달려들어, 왜 무고한 시민을 잡아가냐며 끌어냈다. 그러니 몸이 성할 리가 없다.

다리를 절룩이며 지팡이에 의지해 집회에 참석한 민가협 회원 정순녀(81세) 씨는 1999년 고문기술자 이근안 재판에서 항의하다 다쳤다. 이근안 재판 날 일찍 도착한 민가협 회원은 정 씨뿐이었는데 옆에 있던 학생 한명이 조약돌을 만지작거렸다. “학생은 던지면 잡혀가니까 내가 던질게”하고 그것을 빼앗아 재판정에 나온 이근안에게 던졌다. 이근안 얼굴이 다치자 뒤에 있던 사복경찰 9명이 정 씨를 끌고 가 짓밟았다. 쓰러져 있으니 백병원으로 데려다놓았고 거기서 3일을 입원했다. 걱정할까봐 자녀들한테 말도 못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다리 상태가 나빠져 이제는 지팡이 없이 걸을 수 없다. 이렇게 아픈데 힘들게 매주 참석하냐고 묻자, 여기 안 나오면 뭐하냐며, 민가협회원들은 친구들보다 생각이 통해 마음이 편하다며 좋아서 오는 거라 했다. 운동이 삶이 된 게다.

[출처: 사계]

1992년 간첩단 조작사건으로 아들이 잡혀가자 민가협 활동을 하게 된 김성한(77세) 씨는 그전까지 집회니 국가보안법이니 하는 것들은 몰랐다고 했다. 추석 쯤 집에 들이닥친 경찰이 영장도 없이 책장을 뒤지더니 물어볼 게 있다며 아들을 잠시 데려갔다. 그러나 밤이 돼도 아들은 귀가하지 않았다. 이튿날도 오지 않고 애가 어딨는지도 몰라 아들 친구들에게 물었더니, 일단 민가협이란 단체에 가서 도움을 청하라 했다. 안기부가 있는 남산에서 여자들이 머리띠를 두른 채 밀고 당기며 싸우곤 했던 민가협에 찾아가 가입했다. 최규석의 만화 <100℃>에도 주인공 영호의 엄마가 아들 친구가 민가협을 알려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비슷하다. 김 씨는 1993년 9월 23일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시작된 목요집회에 대해 말한다.

“그해 12월까지만 하자고 했는데, 26년째 할 줄 몰랐어. 내 아들은 나왔지만 아직까지도 못 나온 사람이 많으니까 (목요집회에) 안 나올 수 없잖아. 그 사람들 손을 잡아주면 위로가 되니까.”

민가협 어머니들은 더 이상 구속자의 가족이 아니지만 국가보안법 폐지와 양심수 석방운동을 26년째 하는 운동의 선배다. 더 이상 그녀들의 투쟁을 ‘모성’이란 범주에 가둘 수 없다. 민가협 회원들은 87년 노태우의 6.29 선언과 1988년 1400명에 달하는 양심수 석방을 잊지 못한다. 이영 전 상임의장도 노태우 정권만 양심수 석방을 못해서 시작한 거라고 했다. “88년에는 재판이 끝나든 안 끝나든 다 풀어줬지. 기소된 사람들까지 풀어줬으니까. 그런데 자칭 문민정부라니까 우리가 좀 싸우면 양심수를 풀어주겠지 싶어서 시작한 거지.”

그 외에도 민가협이 95년 장기수 문제를 국내외에 알려 비전향장기수들이 풀려나게 됐다. 1989년 사회안전법이 폐지되면서 대부분의 장기수들이 석방됐지만 여전히 비전향 장기수들은 50여 명 넘게 감옥에 갇혀 있었다. 연고자도 없고 사진 한 장도 없는, 44년간 갇힌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 씨의 존재를 알린 것도 민가협의 노력 덕분이다. 그 결과 1995년 김선명 씨가 석방되고 1999년 모든 비전향장기수들이 풀려났다. 풀려난 비전향장기수들은 목요집회에 꼬박꼬박 참여하고 있다.

그때도 할배들은 우리더러 빨갱이라고 욕했지

목요집회 장소를 탑골공원 앞으로 한 이유는 3.1독립운동의 정신을 잇기 위해서라고 했다. ‘삼일문’ 현판 아래로 정했다. 탑골공원 안에는 여전히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팔각정이 있고,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손병희 선생의 동상과 3.1운동 부조 등이 있다. 민중들의 민주화에 대한 굳은 의지를 드러내기 좋은 상징적 장소인 셈이다. 그러나 당시에도 탑골공원에 주로 있는 사람들은 독재정부를 지지하는 보수적인 할아버지들이었다. 처음 목요집회를 열던 때도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거나 조작간첩사건을 말하면 ‘빨갱이 여편네들’이라고 공격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큰소리로 맞선 사람이 임기란 전 상임의장인데, 지금은 병환으로 입원 중이다.

게다가 종로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을뿐더러 가두집회를 하면 모이는 집결지였으니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다 아는 곳이다. 정태춘의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의 노래가사에 나올 정도로 90년대 초반 종로는 대규모 가두투쟁이 벌어지던 곳이다. 거리를 점거하기로 한 시간에 누군가 도로에 나가 구호를 외치면 인도에서 숨죽여 기다리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도로로 뛰쳐나왔다. 전경들과 지랄탄, 최루탄이 등장하면 최대한 버티다가 뒤로 빠지던 가두투쟁이 종로와 서울역, 시청과 남대문에 빈번했다.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라는 정태춘의 노래가사처럼, 1993년 문민정부 등장 이후 가두투쟁이 조금 잦아들 무렵 목요집회가 시작된 것이다.

보수적인 할아버지들이 많은 이곳을 목요집회 장소로 택한 것은 과감하게 이곳을 3.1독립운동의 정신을 잇는 인권의 장소로 탈환하려 했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탑골공원은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는 불화의 장소다. 일제 치하에도, 그리고 독재정권 아래서 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하다. 파고다공원 시절, 파고다극장에 남성동성애자들이 몰래 모이던 곳이기도 했다. 물론 집회나 연애나 잠시 잠깐일 수 있다. 현대사회의 유동성만큼이나 장소성도 흐르지만 그 흐름에 인권의 섬광이 빛날 수 있는 건 목요일마다 그곳에서 꿋꿋하게 국가보안법 폐지와 양심수 석방을 외치는 민가협 어머니들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그녀들은 여전히 종북 낙인이 유효한 현실과 양심수가 한명도 석방되지 않는 2017년이 답답하지만 “그래도 계속 싸워야지”라고 다짐한다.[워커스 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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