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의 진심은 왜 당신에게 중요한가

[워커스] 반다의 질문


“가해자가 진심으로 억울해 한다”

이 말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성폭력 가해자 주변인들은 가해자가 진심으로 억울해 하고 있으니, 사건을 다시 검토해 달라고 완곡히 말하거나, 피해자 말만 듣는 것 아니냐고 성폭력대책위에 문제제기한다. 심지어 한 대책위원이, 가해자가 억울해하는 마음이 너무나 진심인 게 느껴져 위축감이 들었다고 말하는 걸 들은 기억도 난다. 나도 진심으로 억울해 하는 가해자를 여럿 보았다. 그리고 많은 경우 자신의 행위 여부가 쟁점인 게 아니라 행위에 대한 해석을 억울해 했는데, 후자와 관련해서는 나도 그들의 ‘진심’을 믿는다.

강간이란 상대와의 동의나 합의 없는 성관계를 의미한다고 정의된다. 묻는다. 성관계에 동의를 구했나요? 아니요. 강간했나요? 아니요. 그럼 뭘까? 동의를 구한 적은 없지만 강간을 한 건 아니고, 거친 성관계을 뿐이라는 진심 혹은 진실한 믿음! 반성폭력 운동은 강간이 아니라 거친 성관계라는 ‘진심 어린 믿음’에 대한 문제제기다. 그리고 여성 혹은 타인으로부터 인격을 휘발시키고 성적 대상으로 만들어온 ‘정상적’ 믿음, 그리고 그러한 남성성과 문화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동료 여성들과 함께 있을 때 어깨나 허벅지를 쓰다듬고, 악수하다가 손가락에 깍지를 끼는 남성을 본 적 있다. 불쾌함을 표하는 여성들에게 그는 친밀함의 표현이라고 답했다. 이어서 상대의 거부 의사에도 반복되는 행위에 대해 문제제기를 받자, 이번에는 습관이라고 답했다. 나는 둘 다 그의 ‘진심’이었을 거라고 믿는다. 친밀함의 표현이나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데, 상대는 없고 자신만 있는 일방적 태도. 그리고 상대의 거부 의사에도 반복할 수 있는 권력. 이 사회가 구성해온 남성성의 일부이고, 성폭력의 토대가 되는 전형적 태도들이다.

# 감정이입은 세계관의 반영

대책위 활동을 하다보면,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말에 더 공감하고 감정이입하는 이들을 눈빛과 공기로 만난다. 그리고 가해자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피해자를 절대로 탓하고 싶지 않지만, 솔직히 피해자가 그때 왜 그랬을까 답답한 마음이 든다는 이들을 만나기도 한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는 남성 입장의 성경험을 일반화 해왔고, 일부 성폭력을 제외하고, 많은 경우 가해자의 입장에 감정이입하는 게 더 익숙하기 쉽다. (파업이라는 하나의 현실을 놓고 노동자는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하고, 자본가는 손해배상을 주장한다. 그리고 상당수 노동자들도 자본가 논리에 감정이입한다. 그들에게 익숙한 보편적 세계관에 따른 자연스러운 감정이입일 것이다.)

페미니즘은 오랫동안, 기존 세계관이 남성의 경험과 입장에 기반한 인식체계라고 말해 왔다. 그리고 성폭력 사안에서 피해자중심주의는 여전히 논란의 지점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피해자중심주의가 남성의 성적 경험, 태도, 관점이 보편적인 사회에서 피해자의 경험과 목소리를 경청하도록 도와줬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성역할, 성차별, 젠더위계 등은 몸과 의식에 너무나 깊숙이 스며들어 있고, 아직도 남성 위치에서 구성된 성경험이나 입장에 더 익숙하다. 우리 모두 착한 여자아이, 씩씩한 남자아이라는 말을 들으며 성장했고, 성에 대한 공격적 태도가 남성성인 사회 혹은 폭력적인 남성의 성이 정상이라는 태도를 아직도 공기처럼 마셔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 믿음을 넘어서는 질문

어떤 사람들은 성폭력은 사라지기 어렵다고 한다. 너무나 오래된 폭력이고 인간의 무의식까지 뿌리내린 문화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운동이란 믿음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봉건제가 하늘의 뜻인 것처럼 여기던 시대가 있었다.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주장은 여전히 힘을 얻고, 자본주의가 자연의 법칙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남성의 성욕이나 소통방식을 진화생물학이라는 ‘과학’으로 설명하는 이들이 있고, 이 시대가 구성해 놓은 여성성/남성성을 우주의 질서로 여기는 믿음도 존재한다. 하지만 모조리 인간의 산물인 차별을 자연화, 본질화 하는 태도일 뿐이다.

성폭력은 사라지기 어렵다거나,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성이 남성의 본질인 양 여기는 이들에게 오늘도 질문으로 그 믿음에 균열을 시도한다. 질문은 믿음을 넘어 세계를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하는 이들이 지겹도록 반복하는 말. “왜 저항하지 않았는가, 왜 그 당시에 문제제기 하지 않고 이제 와서 그러는가!”

우리는 질문한다.

“왜 동의를 구하지 않았는가, 왜 동의 여부를 충분히 확인하지 않았는가. 왜 지금까지 사과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었는가?”

다시, 우리는 질문한다.

“왜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은 게 문제가 되는가? 왜 남성들은 그게 성폭력임을 모르는가? 희롱하지 말라, 추행하지 말라, 강간하지 말라고 매순간 말하지 않으면. 그건 희롱, 추행, 강간이 아니란 말인가?”

계속해서, 우리는 질문한다.

“왜 여성(혹은 피해자)의 행위에 대해서만 묻는가, 그것의 효과는 무엇인가?”

“왜 개인의 책임만 강조함으로써, 이 사회 구조/권력/억압을 비가시화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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