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의 삶의 자리 죽음에 가까운 곳에서

[워커스] 레인보우

[출처: 김한주 기자]

“트랜스젠더가 1년에 몇 번 씩 모이는 곳이 있는데, 바로 장례식장이다.”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 방송인이자 이태원에 위치한 클럽 대표인 차세빈 씨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1) 트랜스젠더는 흔히 같은 성소수자라는 이름 아래 묶이곤 (‘LGBT’의 ‘T’가 바로 트랜스젠더를 가리킨다) 하지만 대개 다른 성소수자, 특히 동성애자들보다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다. 독자적인 커뮤니티나 따로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은 점부터, 성별 정정 과정이나 직장 구하는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차세빈 씨의 말은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정보를 얻거나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의 부재, 그런 가운데에서 길게 이어지기 힘든 삶, 그럼에도 끝내는 함께 모여 서로를 추모할 수밖에 없는 연대의식과 같은 것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여러 나라의 트랜스젠더 인권활동가들은 11월 20일을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Transgender Day of Remembrance, TDOR)로 기린다. 1998년 미국에서 혐오범죄로 살해당한 트랜스젠더 여성 리타 헤스터를 추모하는 의미로 제정된 이 날을, 한국의 활동가들 역시 여러 방식으로 기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트랜스젠더인권단체 ‘조각보’가 2014년부터 추모 행사를 열어 왔으며, 올해는 11월 13일부터 20일까지를 추모 주간으로 정해 사진전, 화상회, 촛불 문화제 등을 진행했다. 혐오범죄로, 자살로, 혹은 다른 어떤 이유로 이 세상을 떠난 트랜스젠더들을 기억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다짐을 나누는 자리들이었다.

트랜스젠더들이, 그리고 그 친구들이 모이는 곳이 장례식장, 혹은 TDOR 추모 행사장이라는 것은 쓸쓸한 사실이다. 트랜스젠더의 삶이 죽음에 가까이 있다는 것은 단순한 비유나 과장이 아니다. 지난 2015년 TDOR에 조각보가 내건 슬로건은 “우리는 추모한다, 그리고 존재한다”다. 추모로써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삶을 산다는 것, 자긍심이나 행복 이전에 애도가 존재의 중심에 온다는 것 ― 이것은 삶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숨김과 드러냄 사이에서

트랜스젠더의 삶은 종종 착각되곤 한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남성이라는, 혹은 여성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자라서 어느 순간에 수술을 통해 반대편 성으로 새로 태어나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그들이 “죽음에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는 말은 낯설 것이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트랜스젠더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나라에서 많은 이들은 성인이 되어서야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으며, 수술은 경제적, 의학적 부담으로 인해 모두에게 허락되지 않는다(애초 모두가 수술을 택하는 것도 아니다). 어렵사리 수술을 한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예컨대 여고나 여대를 나온 트랜스젠더 남성은 자신의 학력을 숨긴 채 살아야 하거나, 자신이 트랜스젠더임을 밝히고서 차별당해야 한다.

2014년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가 기획하고 성적지향·성별정체성법정책연구회가 수행한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에 따르면 트랜스젠더는 다른 성소수자에 비해 학력과 소득 수준이 낮고 고용이 불안정한 편이다. 정규직 종사자는 26.1%(전체 44%)에 그쳤고, 월평균 소득 역시 전체 평균에 비해 60만 원 이상 낮았다.(2) 학업이나 생업을 법적, 의료적 성별 정정 과정과 병행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은 탓으로 풀이된다. 트랜스젠더에 대해 잘 모르거나 편견을 가진 의사와 판사를 설득해야 하는 성별 정정 과정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한국은 성별 정정 관련 전문의가 많지 않으며 관련법이 부재한 상태로, 많은 것이 개별 의사와 판사의 재량에 달려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적지 않은 트랜스젠더들의 꿈은 ‘성별 정정하기’, 그리고 ‘들키지 않고 살기’에 머물게 된다. 그 이후의 삶을, 특히나 ‘트랜스젠더로서의 삶’을 기획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차세빈 씨는 “‘트랜스젠더’가 꿈이 되면 안돼요”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트랜스젠더 개개인에게 하는 조언이기도 하겠지만, 그 이상을 꿈꾸지 못하게 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말이기도 할 것이다.

트랜스젠더의 삶의 자리

트랜스젠더들의 삶이 언제까지나 죽음에 가까운 곳에, 숨김과 드러냄 사이의 고민에 머물러서는 안 되지 않을까. 트랜스젠더에게만 해당하는 삶의 자리가 따로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다른 삶들의 자리와 연결돼 있다.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시달린다는 점에서, 트랜스젠더 노동자의 자리는 곧 비정규직 노동자 모두의 자리이다. 혐오범죄에 시달린다는 점에서 트랜스젠더의 자리는 곧 여성의 자리이기도 하다. 안정된 법적 지위를 갖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점에서 트랜스젠더의 자리와 이주노동자의 자리는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트랜스젠더의 삶의 자리를 찾는 싸움 역시, 그들만의 것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함께 외쳐보면 어떨까. 우리는 우리 모두의 잃어버린 삶을 추모한다고, 그렇게 우리는 함께 존재한다고.

(1)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커밍아웃 인터뷰 41 <이태원의 여신: 차세빈>, 2016. (https://chingusai.net/xe/ comingout/480677)
(2)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을 정정한 경우, 임금은 더더욱 낮았다. 보고서는 http:// www.sogilaw.org/39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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