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 잘 쓰는 법

[워커스] 아무말 큰잔치

모든 말과 글은 사실 모종의 연애편지다. 내 마음을 너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또는 네 마음을 얻고 싶어서. 그래서 대부분의 글은 사랑을 과장하고 나를 부풀린다. 모든 연애편지가 그렇듯이. 어느 때는 위악을 떨기도 하고 저주와 증오의 말만 늘어놓기도 한다. 원래 연서라는 게 그렇지 않나. 한없이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과 오롯이 자기를 드높이고 싶은 허망 사이의 애절한 줄타기. 당신의 마음을 얻고 싶어요. 당신을 설득하고 싶어요.

근래에 쓴 글 중에 가장 많은 오해의 소지를 남겼던 건 지난 호 《워커스》의 아무말 큰잔치다. ‘그건 정말 여성주의인가요?’라는 제목이었다. 글을 쓴 애초의 목적은 어딘가 어긋나고 있는 것 같은 현재의 페미니즘에 대한 지적이었다.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또 다른 혐오가 실행되는 일, 그 혐오가 폭력을 발생시키는 일, 그 혐오와 폭력에 대한 비판을 여성주의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리는 일에 대한 지적. 그 글이 본래의 의도대로 여러 독자에게 전달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 글의 첫 독자로서 분명한 문제를 발견하고 반성해야 했다. 과한 감정, 비아냥, 충실하지 않았던 설명, 왜곡의 여지를 남겨둔 비유와 수사들. 무엇보다 진지하고 본격적이지 않았던 생각. 의도가 선했다고 변명할지언정, 몇 줄 되지 않는 글에서 내 ‘선한 의도’를 읽어달라고 (글쓴이가 직접) 사정하는 것은 얼마나 꼴사나운 일일까. (사실 지금의 이 비루한 고백도) 마치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넌 왜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느냐고 징징거리던 스무 살 언저리의 연애편지처럼. 그때도 난 유려한 말로 나를 돋보이게 하려는데 집중하고 과잉된 감정의 언어로 내 사랑을 과시하려는 데 몰두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 연서를 쓰면서도 난 그녀를 맨 먼저 생각하지는 않았다.

[출처: 사계]

바야흐로 말과 글이 범람하는 시대다. 하루에 인터넷에 유통되는 정보량이 제타바이트 단위를 가뿐히 넘어선다. 제타바이트라니. 그러나 이 수많은 말과 글은 발신자가 의도한 본래의 목적대로 수신자에게 가 닿았을까. 마음이 전달돼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충실한 설명으로 누구에게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었을까. 집회 현장에서의 그 수많은 발언은 그들이 말하는 ‘동지’들에게 가 닿았을까, 아니면 거리를 지나는 ‘대중’들을 설득할 수 있었을까. 온라인에 범람하는 수많은 말의 편린은 또 어떤가. 누군가를 조롱하려는 목적, 아님 말고 식의 유언비어.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 제 눈에만 맞는 안경을 쓰고 보는 확증편향. 기사라고 해서 다를까. 오프라인에서 우리가 지금 서로 주고받는 말은 또 얼마나 다르겠나. 그저 모두 나를 과시하는 말, 너에 대한 감정이 과잉된 말, 조악한 은유와 비유, 애초의 목적을 망각한 비아냥. 이런 것들로 정말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을까. 누구도 설득할 수 없는 말과 글은 무슨 의미일까. 그야말로 아무말 큰잔치.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중략)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 따르면 우리는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독창적인 비유와 은유, 감정을 드러내는 언어는 사실 화자의 의도를 왜곡할 뿐이다. 사실에 충실한 묘사를 위해서 대상을 성실하고 솔직하게 관찰하는 것, 나의 감정을 강변하는 표현보다 대상을 올곧게 그려내는 표현을 찾는 것. 좋은 말과 글이란 그런 것일 테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연애편지도 그렇게 쓰이겠지.

그럼에도 ‘사실’과 ‘진실’에 도달하는 건 요원한 일이다. 말하고 쓰는 이의 생각과 감정을 읽고 듣는 이에게 온전히 전달하기도 어렵다. 사실 마음을 전달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서로 다른 사람인걸. 지젝은 그래서 “수신자에게 온전히 도달하는 편지는 차라리 부치지 않은 편지”라고도 했다. 쓴 사람 본인이 아니고서는 편지의 내용이 타인에게 어차피 제대로 전달될 리 없다는 뜻일까. 그럼에도 우리는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싶다. 당신에게 내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고, 당신이 내 생각에 동조해주길 원한다. 설득하려 하고 설명하려 한다. 그렇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설명충.

다시, 모든 말과 글은 모종의 연애편지다. 당신의 마음을 얻고 싶고 내 마음을 당신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하는 일. 이해시키고 설득하려는 안간힘. 소통의 노력. 나를 부풀리지 않고 솔직하게 내보이는 일, 대상을 가감 없이 관찰하는 일, 그리고 사실에 충실한 묘사. 어차피 안될 것을 알지만 최선을 다해 당신의 마음을 건드리려고 하는 노력. 연애편지를 써야겠다. 어차피 난 설명충이니까. 성실하게 관찰하고 진지하게 고민해서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마음을 다해. 스무 살 때보단 좋은 편지를 써야지.[워커스 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