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노동자의 이야기

[새책]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

한 차례 읽었지만, 다시 반복해서 읽고 있는 책이 있다.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이라는 긴 제목의 책이다. 저자는 한국 지엠에서 근무하는 노동자 이범연이다. 책의 겉표지를 보면, 바지 뒷주머니에 공구가 꽂혀있는 모습이다. 제목도 디자인도 조금은 예스럽다. 굳이 밝히자면 저자와 나는 오랜 지인이다. 하지만 직접 만난 적은 없다. 다만 오래전 SNS 상에서 안부를 주고받는 정도였다. 저자는 ‘김삿갓’으로 나는 ‘사노라면’이라는 아이디로 말이다. 언젠가는 꼭 뵙고 싶어 문자를 보낸 적도 있었다. 소위 번개를 쳤지만, 그날 너무 많은 노동자가 참석한 집회라 만나진 못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책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책을 펼쳐 들자 나는 빠른 속도로 빠져들었다. 그의 문장이 일상에 지친 내게 신선하고 가슴 시리게 다가왔다.

[출처: 레디앙]

책을 통해 그가 두 번의 구속과 두 번의 해고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철저하게 무권리한 노동자들의 실태를 접하면서부터이다. 회사는 정규직 신규 채용 시 비정규직 발탁 채용을 원칙으로 한다. 비정규직부터 노동조합 가입을 막거나 열악한 근무조건에도 불평불만이 없도록 길들인다는 뜻이다. 자본은 홈을 파고 생산에 유용한 방식으로만 노동자 욕망이 흐르도록 노동자를 훈육한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노동자들의 풍부한 욕망, 삶의 총체적 실현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효율적인 노동력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오늘도 사람들은 갇힌 틀 속에서 성실이라는 단어를 붙들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루하루 살아간다.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이들은 불성실하다고 매도당하기 일쑤다. 어디 노동자들이 불성실해서 취직을 못하고 있는가?

저자는 잔업과 특근에 목을 매달아도 불안이 해소되지 않는 현실을 현장의 임금체계와 노동관리 정책에서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무기력해진 노동조합을 통해서는 얻을 게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무기력과 절망감은 바로 현상 유지라는 단어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자의 일상적인 문화에 대해 풀어 놓는다. 한 사회의 관습, 가치, 규범, 제도, 전통 등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생활양식을 의미한다고 했을 때, 남성 중심의 권력화 된 노동조합, 경제적 이익에 매몰되어 있는 현실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이밖에도 활동가의 자세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데 ‘늙은 노동자의 이야기’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시는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시사점을 던져준다.

머리에 하나둘 흰머리가 나도록 / 무기력과 낮잠과 권태와 싸웠네
이마에 깊은 주름살이 서도록 / 초조감과 조급성과 세월과 싸웠네
아무도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었네 / 그를 배치한 조직을 빼놓고는
백군에게 쫓겨 파국을 앞두게 된 / 홍군이 어느 날 그곳을 지났네
뗏목 지기 나서 뗏목을 준비했네 / 5년도 넘게 10년도 넘게
흰머리가 나도록 준비했던 뗏목 지기 / 뗏목 풀어 한꺼번에 대군을 살렸네
김형수의 시, ‘뗏목 지기는 조직원이었네’ 중에서……. (135쪽의 내용이다)


저자는 위 구절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굳건한 신념을 갖고 지속해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만, 자칫 과거와 같은 실천을 맹목적으로 반복하는 완고함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정파의 이익을 앞세우는 방식으로 귀결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운동의 공통목표를 추구하면서 그 장기적 과제에 충실한 것을 요구한다. 운동을 둘러싼 눈앞의 성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긴 안목을 가지고 신중해라는 뜻이다.

이밖에도 노동운동을 둘러싼 고민을 풀어 놓는데 가령 미조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노동자의 잔여적 범주를 넘어 이주노동자 등등 광의의 개념으로 해석한다. 이들은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형성된 ‘배제’된 사람들로써 임금 수준의 차별을 넘어 자신의 몫과 자리를 빼앗긴, 다수임에도 나머지, 잔여로만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던져본다.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참여하는 길이 차단된 상황에서 노동권과 연대는 후퇴하고, 사회적 네트워크는 해체되어 결국 많은 이들이 빈곤에 빠진다. 배제를 둘러싼 해결방안은 참여와 통합을 대안으로 상정하게 된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적극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사회적 합의와 상생과 통합은 어느 수준으로 관철될 것인가?

노동자들의 상여금을 기본급으로 전환하겠다는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개악이 시도되고 있는 등 과연 상생이 가능할 것인가?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 과정에서 무원칙한 참여와 통합은 배제와 포섭으로 또다시 전락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이처럼 늙은 ‘노동자의 이야기’ 는 이 시대 우리 현실과 맞물려 있다.

저자는 책을 통해 일관되게 단결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무엇보다 서로 안다는 것을 넘어 ‘공감’해야 한다고 한다. 투쟁의 현장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으로, 깊은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끊긴 분노의 선을 이어 집단적인 연대의 선으로 만들어야 현장과 의식 그리고 지역과 공간에 그물망처럼 처져있는 배제를 넘어 설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책은 노동운동의 현실을 분석하는 눈과 방향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우리 사회는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3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오랜 세월 현장에서 충실히 살아온 활동가의 기록이야말로 살아 있는 생생한 역사가 아니겠는가? 인천 대우자동차 지엠의 운동사를 넘어, 우리 사회노동운동의 전개와 그 이면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정리하며 무모한 도전이 아닐까? 주저했지만 나에게는 답답할 때 다시 꺼내 읽는 책이 되었다. 아마도 활동에 지친 노회한 사람들, 일상에 젖어있는 이들의 마음을 다지는 지침서가 될 것으로 믿는다. 더불어 미래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도 ‘늙은 노동자의 이야기’가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 되었으면 더더욱 좋겠다. 끝으로 이 범연 작가를 만나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그처럼 수많은 활동가가 사회 곳곳에서 헌신적으로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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