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호석 열사 시신탈취 사건의 공모자들

[삼성 노동자 시신탈취 보고서(1)]삼성이 조종한 경찰 기동대? 브로커 의혹도

[출처: 삼성전자서비스지회]


2014년 5월 17일. 염호석 삼성전자서비스 양산센터 분회장이 강릉 해안도로 인근 승용차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는 유서에서 “저의 죽음으로 지회의 투쟁이 승리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자신을 찾게 되면 지회가 승리할 때까지 시신을 안치해 달라고도 했다. 지회가 승리하는 날 시신을 화장해 정동진에 뿌려달라는 부탁도 남겼다. 노조는 열사의 유언을 지켜야 했다. 18일 새벽, 노조와 열사의 부친은 강릉의료원에 안치된 그의 시신을 서울의료원 강남분원으로 옮겼다. 열사투쟁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열사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5월 18일부터 20일까지, 장장 3일간 열사의 시신을 둘러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이어졌다. 시신은 탈취됐고, 사라졌고, 화장된 유골함 또한 자취를 감췄다. 도대체 누가 시신을 빼돌렸는지, 또한 누가 이 사건에 개입됐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 뻔한 진실은 너무 쉽게 못질을 당하고 땅에 묻혔다. 그리고 4년 뒤인 지금. 염호석 열사가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검찰이 염호석 열사 시신탈취 사건 진상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과연 사건의 공모자들이 오래 전 묻어둔 진실은 다시 빛을 볼 수 있을까. 경찰과 삼성의 유착과 공모, 그 진상을 짚어봤다.

[출처: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공모자1. 경찰

가. 5월 18일, 1차 대규모 경력 투입

5월 18일 오후 6시 20분 경. 300명가량의 경력 3개 중대가 열사의 시신이 안치된 서울의료원을 덮쳤다. 느닷없는 대규모 경력 투입에 대해, 경찰 측은 112에 신고가 접수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12종합상황실 신고 녹취록에 따르면, 실제로 오후 6시 10분 경 최초 신고가 접수됐다. 신원미상의 인물이 “노조원들한테 잡혀서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신고했고, 경찰은 “경찰관을 그 쪽으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불과 10분 뒤, '경찰관 '이 아닌 경찰기동대 300명이 현장에 투입됐다. 개인의 장례절차에, 집단적인 충돌이나 소요사태가 일어나지도 않은 현장에 대규모 경력을 투입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불과 10분 만에 대규모 기동대를 꾸려 이동하고 투입한다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신원미상의 인물로부터 112신고가 접수됐다는 이유로 경찰 3개 중대가 움직였다는 것 역시 석연치 않았다.

실제로 당시 경찰은 최초 신고자의 신원조차 파악하지 않았다. 사건 약 한 달 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는 비공개 간담회를 열고 이인성 당시 경찰청 차장 등으로부터 사건 보고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이 차장은 최초 신고자에 대해 “염호석의 외삼촌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염호석 열사는 친모와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채 살았고, 친모는 당시 노조에 장례절차를 모두 위임한 상태였다. 이 같은 문제제기가 나오자 이 차장은 “(최초신고자가 계모의 형제인지) 파악하지 못했다”고 시인했다. 이 자리에서 은수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외삼촌이라는 분이 장례절차가 진행 안 된다는 전화 한통에 강남서와 서울청의 경찰병력 300여 명이 투입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 아니라 납득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경력 3개 중대를 움직인 최초 신고자의 신원은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리무중이다.

당시 서울의료원에서 열사의 시신을 지키고 있던 노조 조합원들은 갑작스런 경력 투입에 반발했다. 경찰은 시신을 지키려는 조합원들을 상대로 캡사이신을 쏘았고, 그 자리에서 25명을 연행했다. 당시 장례절차를 두고 노조와 이견이 있었던 부친까지 경찰 측에 3차례에 걸쳐 철수 요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경력 투입 1시간 35분 만인 오후 7시 55분, 염호석 열사 시신 탈취에 성공한 경찰은 부친과 함께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부친은 다음날, 독자적으로 부산 행림병원에 빈소를 차렸다.

나. 5월 20일, 2차 대규모 경력 투입

이날 오전, 노조 조합원들은 수소문 끝에 오후 1시 경 밀양시공설화장시설에서 시신 화장이 예약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오전 11시 30분 경, 조합원들이 밀양화장장으로 모였다. 친모도 화장장에 도착해 아들 유지에 따라 노조가 장례절차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밀양화장장에 다시 대규모 경력이 몰려들었다.

경찰은 이번에도 112신고 때문에 경력을 투입한 것이라 주장했다. 경남지방경찰청 112종합상황실 녹취록에 따르면, 그날 오전 11시 55분 112에 최초 신고가 접수됐다. 신고자의 신원은 다름 아닌 밀양화장장 장의담당 직원이었다. 그는 “노조원들이 가족들을 못 나가게 막고 있다”고 신고했고, 경찰은 이번에도 “경찰관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경찰 2개 중대, 2개 제대 약 350여 명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신고 11분 뒤인 오후 12시 6분경이다. 경력이 투입될 당시 현장에 있던 노조 조합원 및 관계자는 고작 30명 내외였다.

화장장 직원의 전화 한 통으로 10분 만에 대규모 경력을 투입한다는 것 역시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이날 사건으로 삼성과 경찰이 사전에 시신탈취를 공모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당시 장하나 전 민주통합당 의원이 경남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경력 투입 현황 등에 따르면, 경찰은 “112신고를 받고 밀양상황에 대비 중이던 경력을 배치했다”고 밝혔다. 당시 밀양 송전탑 투쟁에 대비하고 있던 경력을 화장장으로 배치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밀양 송전탑 투쟁이 벌어지던 곳과 밀양화장장까지의 거리는 27km, 차량으로 약 4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다. 불과 11분 만에 현장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화장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던 경찰버스는 경남지방경찰청 제1기동대와 창원중부방범순찰대 차량이었다. 경남경찰청 제1기동대가 위치한 곳에서 화장장까지의 거리는 53km, 차량으로 약 1시간이 소요된다.

박정환 전 장하나 의원실 비서관은 당시 상황에 대해 “18일과 20일 경찰의 대응은 비정상적이었다. 통상 112에 신고한 후 경찰이 출동하기까지의 시간은 아무리 빨라도 5분이다. 한 개 경찰서에서 유치할 수 없는 대규모 경력이 10분 만에 도착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며 “특히 화장장은 밀양시 외곽에 있어 접근하기도 어려운 위치였다. 당시 우리는 삼성과 경찰의 공모 의혹을 제기했지만, 경찰은 계속 ‘신고에 따라 움직였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설명했다.

[출처: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다. 5월 20일, 유골함 탈취

이날 밀양 화장장에서는 최초 신고 이후에도, 총 7차례 112신고가 이어졌다. 그 중 네 건은 친모와 이모(친모의 동생)가 신고한 전화다. 하지만 경찰은 ‘장례 절차를 노조에 위임해야 한다’고 요구한 친모의 신고에는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았다. 경찰은 18일과 20일 모두, 삼성 측과 접촉한 것으로 알려진 부친과 함께 움직였다. 화장장에 경력이 배치된 후인 오후 1시 40분 경. 경찰은 지회 조합원들을 상대로 캡사이신을 무차별 살포하기 시작했고, 그 틈을 타 친부와 경찰 등은 유골함을 들고 화장터를 빠져나갔다.

사건 이후 삼성과 경찰의 공모 의혹을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경남경찰청은 “112신고와 부친의 경찰보호 요청에 따라 경찰조치 하였으며 유족과 경찰은 별도의 어떠한 합의도 없었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다만 새정치민주연합 을지로위원회와의 간담회에서 경찰 측은 신고 접수 이전부터 사건에 ‘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인성 당시 경찰청 차장은 “처음 강릉시부터 노조원들 다수가 여러 그런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노조 측 주장과 부의 주장이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서울로 오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저희가 대변을 했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노조와 친부 사이에 이견이 발생하기 전인 17일 경부터 이미 갈등을 예견했다는 말이다. 아울러 이 차장은 “대비를 하고 있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현재 검찰은 염호석 열사 시신탈취 사건과 관련한 의혹들을 조사 중이다. 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던 경찰은 여전히 여러 의혹을 해소하지 않은 채 말을 아끼고 있다. 당시 사건을 지휘했던 밀양경찰서 측은 “4년 전 일이라 담당자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발령받았다”며 답변을 피했다. 경남경찰청 관계자는 “밀양 송전탑 같은 경우 작전계획서가 있는데 이 건은 작전계획서도 없고 112신고로 경력을 지원한 것이어서 구체적으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며 “해당 서에서 우발 예비대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지방청에서는 답변하기가 어렵다”고 밝혔다.

공모자2. 삼성

가. 5월 17일, 삼성의 부친 접촉

삼성은 유족이 시신을 발견하기 전부터 장례에 개입했다. 《워커스》가 입수한 부친과 조합원의 대화 녹취록에 따르면, 2014년 5월 17일 밤 부친이 시신을 확인하러 부산에서 강릉으로 이동하던 중, 삼성은 단양휴게소에서 부친과 접촉했다. 휴게소에서 삼성전자서비스 양산센터장은 “노조가 장례를 맡으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우리(삼성)가 (장례를 맡으면) 보상은 확실히 해주겠다. 합의해 달라”고 말했다. 부친은 “우선 시신 얼굴을 봐야 합의할 것 아니냐”고 일단 거절했다.

나. 5월 18일, 부친 회유, 시신 값 6억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서울의료원 강남분원 장례식장에 시신을 안치한 5월 18일. 노동조합장에 동의했던 부친이 돌연 가족장을 치르겠다며 입장을 번복했다. 부친은 이날 오전 10시경부터 1시간 40분가량 자리를 비웠고, 이후에도 외부와 통화를 하거나 알 수 없는 지인들과 문을 잠그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결국 부친은 그날 저녁, 경찰과 함께 노조를 따돌리고 시신을 부산으로 옮겼다. 그는 다음 날 노조 조합원에게 “(처음 서울의료원 장례식장을 갔을 때)

염태원(당시 양산분회 대의원)이 인권 변호사와 인사하게 했다”며 “‘당신(노조와 변호사)이 (장례를) 끝나고 나서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느냐. 그리고 이게 얼마가 남느냐?’(고 물었는데),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최근 검찰은 삼성 노조파괴 문건 수사를 통해 삼성이 염호석 열사의 노동조합장을 막을 목적으로 부친에게 2차례에 걸쳐 6억 원을 건네고 회유한 사실을 확인했다.

다. 5월 18일, 시신탈취

부친이 가족장을 치르겠다며 경찰을 대동해 서울의료원을 빠져나가기 직전. 시신 운구차 운전석 옆에서 삼성전자서비스 상생지원그룹 그룹장 정 모 씨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가 발견됐다. 이 쪽지에는 삼성 고위직 정 모 씨를 비롯해 삼성전자서비스 양산센터 팀장, A상조회사 서 모 이사의 번호도 적혀 있었다. 양산센터는 염호석 열사가 일했던 곳, A상조회사는 삼성전자서비스와 계약을 맺은 곳이다.

《워커스》는 쪽지에 있던 본사 정 모 그룹장에게 수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대신 총무그룹의 박 모 그룹장이 《워커스》 측에 전화해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검찰에서 수사 중인 사안이니 답변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상조회사 서 모 이사 역시 “우리 회사가 염호석 고인의 장례를 맡았다는 기록이 없다”고 부인하면서도, 삼성전자서비스와 계약을 맺고 있어 본사 임직원의 상이 발생하면 장례 서비스를 지원한다고 밝혔다. 장례 기록을 삭제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보안담당이 삭제할 수는 있다”고 답했다.

18일 오후 경찰의 시신탈취 후, 노조는 시신 운구차를 쫓았다. 운구차는 부산 행림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노조가 행림병원에 도착하자 병원 측은 예약이 취소됐다고 했다. 노조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오는 경로인 구서IC 반경 5km 내에 있는 모든 장례식장을 찾아 예약 사실을 확인했다. 이중 부산 강산병원에서 “서울에서 차량 한 대가 들어오는데 노조 관련 사안”이라고 했다. 노조가 이곳에서 대기했지만 차량은 들어오지 않았다. 19일 새벽 4시경에는, 부산 영락공원 화장장에 시신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옮겼지만 또 다시 허탕을 쳤다. 당시 현장에 있던 조합원은, 서울에서 봤던 운구차가 영락공원으로 들어오다가 노조를 보고 차를 돌렸다고 증언했다. 그 사이 부산 행림병원에 빈소가 차려졌는데, 이 또한 시신이 없는 ‘가짜 빈소’였다.

라. 5월 20일, 유골을 옮긴 신원 미상의 인물

5월 20일 유골 탈취 사건이 벌어졌던 밀양공설화장장에는 신원 미상의 인물이 등장한다. 노조 조합원들이 ‘삼성 브로커’라고 추정하고 있는 인물이다. 부친 주변인들 중, 노조가 유일하게 신원을 파악하지 못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서울에서부터 부친과 동행해 왔다. 결정적으로 그는 유골을 마지막으로 옮겼던 차량의 탑승자다. 부친은 경찰의 호위 아래 유골함을 들고 아반떼 차량에 탑승했다. 이와 동시에 스타렉스, SM7차량이 동시에 움직였다. 신원 미상의 인물은 SM7 차량에 탑승했다. 이 차량은 길을 안내하듯 아반떼 차량보다 앞서 화장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아반떼 차량에 타고 있던 부친은 경주IC에서 유골함을 들고 SM7 차량으로 갈아탔다. 지회가 마지막으로 목격한 열사 유해의 위치다.(워커스42호)

[출처: 삼성전자서비스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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