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를 넘어-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와 재생산 문제

[워커스 기획연재] 세계 페미니스트들이 다시 읽는 마르크스(2)

[편집자 말] 《워커스》는 창간 2주년을 기념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카를 마르크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며 젠더와 계급 그리고 변혁을 고민하는 세계 페미니스트들의 주요 연구를 연재합니다. 이 글들은 독일 로자룩셈부르크재단이 지난 1월 발행한 ‘다시 마르크스하자?!(Marxte noch mal?!)라는 기념출판물 중에서 페미니즘 이슈를 선별한 것입니다. 페미니즘 리부트와 미투 운동 속에서 젠더와 계급 문제를 고민하는 독자여러분의 관심을 바랍니다.

[차례]
(1) 주변적 중심 : 젠더관계는 생산관계이다(프리카 하우크)
(2) 마르크스를 넘어 : 재생산 문제는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까(실비아 페데리치)1. 2
(3) 노동 전체를 변혁하자!(가브리엘 윙커)

[출처: Yevgenia Belorusets]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은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급진적인 운동 두 가지이다. 이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지구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분열을 극복하고 더욱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데 중요하다. 앞으로 나는 오늘날 페미니즘 이론과 운동에 마르크스의 저작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동시에 이의 한계, 즉 마르크스를 넘어 생각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할 것이다. 나의 견해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페미니즘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의 분석은 주로 노동자계급의 일부, 즉 남성인 산업 임금노동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이럴 경우 자본주의의 축적을 촉진하는 노동을 하면서도 보상받지 못하는 세계 모든 사람들의 경험은 가장자리로 밀려나 자본주의의 관계는 불완전하게만 파악될 것이다.

마르스크의 체계적인 접근법, 즉 그의 물질주의적 역사인식과 임금노동에서의 착취에 대한 분석은, 급진적인 사회변화를 필수적으로 생각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마르크스는 젠더와 계급, 페미니즘과 반자본주의를 동시에 사유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에 대한 그의 기여는 간접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서의 젠더문제
<신성가족>(1844)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푸리에를 토대로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사회 진보와 인간 본성의 인간화의 척도로서 설명한다. <독일이데올로기>(1846)에서 그들은 아버지가 여성과 아동의 노동을 제 것으로 한다는 점에서, 가정에서 이들이 ‘잠재적 노예’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공산당 선언>(1848)에서는 부르주아 가족관계의 위선적 도덕성을 조롱하며 특히 사유재산에 반대한다. 자본가 계급은 여성을 소유물처럼 다룬다고 했다. 그리고 <자본론>(1867) 제1권에서 마르크스는 여성 공장노동자들을 주목하고 여성 노동력 착취에 대한 분석에 열중했다.

다른 어떤 저자도 마르크스처럼 이토록 집요하게 공장체제 속에서 잔인하게 착취되는 여성과 아동노동을 다룬 적이 없다. 그러나 모든 웅변에도 젠더문제에는 소홀했다. 마르크스는 여성을 전투적인 주체로서 거의 보지 않았다. 그들은 대개 희생자였다. 다른 저자들은 이미 여성노동자들의 독립성과 저항적 태도에 대해 점점 더 많이 말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그리고 특히 대규모 산업이 더욱 발전한 가족 및 사회형태와 젠더 평등을 위한 물질적 토대를 만들 것이라고 보았다. <자본론> 제1권에서 그는 산업화가, 사적인 종속과 제약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능력으로 해방되며 그의 역량이 다양한 방식으로 발달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산업 노동은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이 나중에 언급한 것처럼, 전문화의 형태를 대체하고 ‘일반적인 노동 능력’을 증진할 것이라고 보았다.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여성의 고용을 긍정적으로 봤다. 그것은 여성을 가부장적 통제에서 해방시키고, 남성과 여성에 대한 평등주의의 태도를 만들며 사회적 생물학적 차별을 억누를 것이라고 보았다. 거대한 평등주의자로서 산업 자본주의를 설명했다. <자본론> 제3권 중 일부만이 가정, 섹스와 가사 또는 여성의 생활상에 대한 주제를 다뤘다. 사회적 노동 분업, 임금과 노동력 재생산에 관한 설명에서 즉, 우리가 가장 기대할 수 있는 곳에서 이 주제는 다뤄지지 않았다.

재생산의 불완전한 이미지
마르크스는 노동력이, 임금노동에 대한 우리의 능력이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것은 매일 같이 소모되기 때문에, 지속적인 (재)생산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것은 자본의 4 이용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자기 생산을 ‘자본가들에게 필수적인 생산수단’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단지 상품생산의 순환 과정에서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노동자들은 이에 따라 생계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임금으로 취득하고 다른 임금노동자들이 생산한 상품의 소비를 통해 스스로를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자본론> 어디에서도 노동력의 재생산이 요리, 세탁, 보육과 사랑 등 여성의 무급 가사노동을 필요로 한다고 논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생식에 관한 재생산 문제를 다룬 곳에서도 그는 여성의 기여를 다루지 않는다. 자본가들이 인구의 재생산을 ‘안심하고 노동자의 자기보전과 생식본능에 맡길’ 수 있다는 표현은 자신의 재생산 능력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여성의 출산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기술 혁명을 통해 새로이 과잉인구를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것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 게다가 마르크스는 노동력의 재생산과 유럽 산업혁명이 본질적으로 설탕, 차, 담배나 럼주처럼 노예가 생산하는 재화를 토대로 한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지구적 노동분업과 생산체인은 17세기 말 유럽 산업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을 현저하게 낮추도록 했다. 플렌테이션 경제는 유럽 노동력 (재)생산 체제에 노예를 포함시키고 동시에 임금노동자와 노예를 공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분리하는 지구적 노동 분업의 핵심이었다. <자본론>에서는 이러한 노예노동을 간략하게 언급할 뿐이다. 마르크스가 주도한 인터내셔널이 미국 내전 기간 남부 주들에 대한 보이콧을 지지했음에도 말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왜 재생산에서의 젠더 문제를 보지 못했을까? 가사노동 문제에 있어, ‘자연적’이고 진부한 노동들이 산업화에 따라 사라질 것이라는 남성주의적 관점의 한계에 책임이 있다. 또한 마르크스 생애 동안 전형적인 노동자 가정은 매우 강력하게 공장체제에 묶여 가사 노동을 위한 시간이 거의 없었던 것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더욱이 마르크스의 관점은 항상 조직화에 맞춰져 있었다. 이(재생산) 분야에서 그는 아마도 혁명적인 사회운동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임금 착각과 이의 결과
그러나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을 임금관계를 넘어서는 자본주의의 착취와 계급투쟁의 중심 주체로 보지 않았다. 케인즈의 한 개념을 응용하면, 마르크스는, 산업노동이 착취와 해방에 결정적인 지대로서 이것이 다른 형태의 노동들을 점점 더 밀어내는 일종의 ‘임금(중심의) 착각’에 잠겨 있었다. 이로써 원시 축적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은 임금노동의 출현에 한정되어 가사 및 재생산 활동들에서의 변동은 도외시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실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마르크스는 노동일을 둘러싼 투쟁이 임금노동자에 관련될 뿐 아니라 노동일은 공장문에서 끝나지 않고 무급노동도 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본주의 착취에 대한 분석과 공산주의에 대한 전망에서 이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활동들은 다뤄지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이러한 한계의 가장 큰 문제는 마르크스가 이로써 (유럽) 임금노동자의 이익이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사회주의 운동에서 지배적인 전제를 뒷받침한다는 데 있다. 많은 반식민주의 이론가들은 마르크스주의가 그들의 투쟁과 무관하다고 본다. 마르크스는 그렇게 자본가 계급이 임금관계와 성별에 따라 노동자계급, 인종, 나이 등으로 노동계급을 나누고 계급투쟁을 억누르는데 유급 및 무급노동 간의 분할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었는지 인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분열선들은 자본주의의 세계적 팽창으로 인해 더욱 심화됐다.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단결하는 대신, 지구적 착취와 불평등이 심화됐다. 특히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주 언급한 ‘감독자’와 개혁가의 역할을 오인했다. 그가 봤을 때 쓸모없고 위선적인 조치들은 프롤레타리아트 가정을 재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가족 임금의 도입, 생산으로부터 여성의 배제와 노동력 재생산 관련 투자의 증가는 계급투쟁을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는 자본주의 축적의 새 단계를 게시했다. 이러한 교묘한 조치로 반란의 위험이 방지될 수 있었다. 새롭고, 더 규율화 됐으며 더 탄력적인, 점점 더 자기 노동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즉 마르크스의 말대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요구를 ‘자명한 자연법’으로서 인식하는 노동자유형이 출현했다. 그렇게 19세기 말 영국과 미국에서 기술적이며 사회적인 격변이 일어났다. 경공업에서 중공업까지, 섬유 생산에서 철강까지, 노동일 연장에서 노동 강도 심화를 통한 착취까지 말이다. 전업주부를 둔 프롤레타리아 핵가족 모델은 ‘절대적’에서 ‘상대적’인 잉여가치생산으로의 이행을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이로써 가사노동은 ‘실제적인 포섭’ 과정을 밟았으며 점점 더 국가적으로 규제됐고 노동시장의 요구에 맞춰졌다.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와 ‘재생산’의 새로운 발견
마르크스는 (산업) 생산에 여성 참여를 통한 여성해방운동을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사회주의자들의 모든 세대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은 그러나 또 다른 마르크스를 발견했다. 가사노동, 사생활과 물질적 종속에 대한 반역 속에서 그들은 여성억압의 뿌리를 계급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이론을 추구했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지속가능하게 변화시킨 이론적인 혁명에 성공했다.

핵심적으로 마리아로사 델라 코스타(Mariarosa Dalla Costa)는 가사노동을 노동력 재생산의 열쇠로 규명했고 셀마 제임스(Selma James)는 주부를 무급노동을 하는 지구적 노동계급의 일부이자 이들에 대한 착취가 자본축적에 핵심적이라고 개념화했다. 또 다른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임금관계를 새롭게 생각하고 어떻게 다양한 착취관계가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되는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새로운 위계를 통해 어떻게 분열되는지를 밝혀낼 수 있었다. 이른바 ‘가사노동논쟁’은 그러나 가사노동이 생산적인지 아닌지의 그 여부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다. 가사노동이 노동력 (재)생산의 핵심적 전제로 이해되면서, 전체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이로써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의 전략 또한 변화했다. 정확히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한 재생산’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이 새로운 효과를 낳을 수 있었으며 이론적인 전기로서 나타났다. 이는 가정에서의 재생산 노동이 자본에 착취되기 때문에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을 시사했다. 사회주의 운동들이 주목하지 않은 이 노동은 갑자기 자본주의 노동운동의 중심축으로 등장했다. 무급 가사노동에 대한 거부는 이로써 분명한 계급적 지위를 확보했다. 정치적 실천에 이는, 우리가 페미니스트로서 노동자계급과 계급투쟁의 일부가 되기 위해, 공장노동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자율적으로 조직하고 그리고 가사 노동에 - 노동력 재생산의 ‘중추’에서 일할 수 있다. 남성들이 자본주의에서 가족 임금, 결혼과 부르주아적인 사랑 이데올로기를 통해 여성의 노동과 시간 그리고 운동의 자유를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는 우선적으로 자기 가정과 관계 속에서 투쟁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래의 또 다른 이미지
페미니즘적 분석과 투쟁은 마르크스가 그의 작업에서주의하지 못했던 바로 ‘사회적 공장’의 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본 축적에 재생산 노동이 얼마나 핵심적인지에 관한 발견은 자본주의 역사를 보는 관점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 공장이 아니라 노동력이 매일 같이 그리고 세대에 걸쳐 생산되는 부엌이나 침실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서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원시 축적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도 재검토돼야 한다. 결정적인 역사적인 순간은 여기서 16세기와 17세기에서의 마녀 사냥이었으며 이는 여성의 노동과 지식을 평가절하하고 자본주의에 특정한 젠더적 노동 분업을 관철시켰다.

동시에 원시 축적은 마르크스의 예측과는 달리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과정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자본주의가 역사의 특정 단계라는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생각은, 즉 산업화를 통해 열린 새로운 자유의 영역으로 가는 일종의 연옥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은 분명 환상으로 입증됐다. 1903년 아우구스트 베벨의 ‘여성과 사회주의’에서 꿈꾸는, 생활수단이 화학적으로 생산되고 모든 사람이 하루 중 어느 시간에 관계없이 작은 알약 상자에서 영양분을 공급받는 날은 오늘날에는 디스토피아로 보인다. 최근 등장한 생태페미니즘은 이러한 입장을 강화했다. 이것은 재생산 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평가 절하를 자연지배가 인간의 역사적 운명이라는 그의 생각과 관련지은 것이었다. 마리아 미스(Maria Mies)와 아리엘 사례(Ariel Salleh)는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재생산 노동에 대한 경시가 체계를 가지고 있고 모든 기술과 남성 피조물에 의한 위계적인 평가에 기초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역사는 생산의 첫 번째 행위로 시작되며 노동은 그것이 자연을 인간적 필요에 종속시킴으로써 자연은 인간 자기실현의 수단이었다.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활동들은 남성적으로 암시되며, 노동은 아버지와, 자연은 어머니와 연관된다. 마르크스는 ‘Madame la Terre(지구 양)’와 ‘Monsieur le Capital(자본 군)’에 대해 말한다. 오늘날에는 진보하는 산업화가 우리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동시에 과학은 이제 자본주의의 편에서 인간의 생명을 여성의 몸 밖에서 생산하고자 애쓰고 있다. 이 프로젝트가 이미 나타난 농업의 산업화 보다 훨씬 더 끔찍한 악몽이 될 것이라는 점은 우려할 만하다. 즉, 바로 여기서 패러다임의 변화가 너무도 중요하게 급진적 운동으로 이뤄지고 있다. 희망적인 것과는 달리, 이제는 기계들이 생명과 생태계의 재생산을 위한 진보를 추동하는 동력들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부분적으로는 옹호해온, 기술 진보의 프로메테우스 같은 전망은 계속해서 커다란 호소력을 발휘하며 반향을 일으킨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들은 일전에 마르크스가 자동화에 대해 말했던 것과 비슷하게 해방적인 기능이 부여되고 있다. 재생산과 돌봄노동의 영역은 다시금 뒷전으로 내몰리고 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이 주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침묵이 실수가 아닌 그의 이론과 정치적 실천의 한계라는 것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극복할 수 없었던 한계이나 오늘날의 우리가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마르크스 저작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물질적 삶의 생산과 생태 보전이라는 분명한 정치적 초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의 지속을 위해 가장 열심히 애쓰는 사람들, 즉 돌봄 노동을 하는 여성들, 원주민과 오늘날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형성하고 있는 자급자족 농민들 등으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불행히도 그들은 트럼프에 환호하는 미국 광산노동자들처럼 더 많은 지구의 약탈과 자본주의의 성장에 그들의 미래를 연결 짓는 사람들과 갈등을 벌이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이러한 분열을 점검하고 우리 공동의 삶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과제이다.<워커스 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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