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차 파업을 혐오한 경찰, “노조가 완패했다”

[쌍용차 진압의 비밀⓹]심리전, 그리고 여론을 통한 교섭 개입

[출처: 미디어충청]


2009년 12월. 경기지방경찰청은 쌍용차 옥쇄파업이 마무리된 지 4달만에 ‘쌍용자동차 사태 백서’를 발간했다. 경기청 경찰 20명이 동원돼 만들어진 백서의 발행인은 조현오 전 경기지방경찰청장이다. 백서에는 쌍용차 77일 옥쇄파업 당시 경찰의 진압 작전 과정과 대응 등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하지만 400페이지에 달하는 백서의 내용은 당시의 객관적 사실에 대한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노동조합이라는 ‘적군’을 물리친 경찰의 ‘승전보’의 색이 짙다. 경찰은 백서를 통해 2009년 쌍용차 사태 폭력진압을 ‘노사관계 선진화의 계기’라고 자화자찬한다. 백서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것은 노동조합과 노동권을 바라보는 공권력의 왜곡된 시각이다.

경찰에게 ‘쌍용차 노동조합’이란?

조현오 전 경기지방경찰청장의 임기는 2009년 1월부터 2010년 1월까지였다. 백서에 따르면 그가 경기청으로 부임한 직후 쌍용차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고, 사태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을 예견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조 전 청장은 부임한 지 한 달여 만인 3월부터 노조의 공장점거에 대비했고, 공장의 시너 및 휘발유 등의 사전 반출과 고공농성에 대비한 굴뚝 폐쇄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이 쌍용차 사태 해결의 원동력으로 꼽는 것 또한 자신들이 ‘분규 초기부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대비’에 철저했다는 것이었다.

조 전 청장의 ‘예견’이나 경찰의 ‘대비’는 애초 노동기본권에 대한 기울어진 시각에서 출발했다. 당시 경기경찰의 기조는 쌍용차 사태 진압을 통해 노사관계를 재정립한다는 것이었다. 경기청은 백서에서 “불법파업을 하고서도 사측으로부터 고소고발 취하를 얻어내 책임을 회피하였고,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은 사측에 ‘타결 일시금’을 요구하여 무력화시키는 잘못된 노사관행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며 “경기경찰은 이러한 왜곡된 노사문화를 바꾸고 법질서를 확립하겠다는 일념 하에 일관된 기조로 대처했다”고 자평했다. 반면 사측의 대응에 대해서는 “경쟁력 없는 기업의 독자생존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단 한 명의 정리해고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강성노조의 장기간 극한투쟁과 불법적 요구에도 사측은 끝까지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노동조합에 대한 경찰의 혐오인식은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노동자들의 권리 요구는 ‘진압’의 대상으로, 노동조합은 ‘적’으로 규정하는 식이다. 경찰은 백서에서 2009년 8월 6일 ‘쌍용자동차의 회생을 위한 노사합의’에 대해 “교섭 내용도 사측의 구조조정을 관철시키는 내용으로 노조 측의 완패였다”고 기록했다. 심지어 조현오 전 청장은 발간사에서 “쌍용차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상황이 종료된 지금에 와서도 일각에서는 경찰의 정당한 법집행을 사사건건 트집 잡으며 여론으로 호도하고 있다. 불법파업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국민들의 동정심을 유발하고 경찰에 대한 반발과 비난을 유도하기 위해 혹세무민을 서슴지 않고 있다”며 적대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심리전, 여론전을 통한 ‘교섭’ 개입

이는 경찰이 위해성 경찰 장비를 무리하게 동원하고, 교섭 타결 압박을 위해 노조를 상대로 심리전도 불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실제로 경기청은 백서에서 “쌍용차사태 이전까지의 집회, 시위 현장에서 경찰이 통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비는 방패와 같이 길이 60~120cm에 불과한 경찰봉이 전부였다”며 “그동안 불법, 폭력집회를 바라보는 사회 내 온정적 시각은 진압경찰 활동의 위축을 초래했다”고 밝혔다. 이어서 “단순한 불법행위와 살상무기가 동원된 의도적인 과격 폭력행위에 대한 경찰의 대처방식은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목적발사기나 테이저건 등 경찰이 당시 동원한 무기들은 경찰청 내에서도 논란이 됐다. 심지어 경찰청에서는 위와 같은 무기 사용을 금지했지만 조현오 전 청장을 비롯한 경기경찰청은 이를 강행했다.

2012년 조현오 전 청장이 발간한 자서전《 조현오, 도전과 혁신》에는 이 같은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조 전 청장은 저서에서 “진입 전날인 8월 4일, 테이저건이나 다목적발사기 사용 여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경찰청에서는 변수 발생이 우려되니 테이저건이나 다목적발사기를 사용치 말라고 금지했지만 나는 강행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경찰이 진입을 시도한 8월 4일 부상자가 4명밖에 발생하지 않았다며 “경찰특공대가 다목적발사기로 스펀지탄 35발을 발사하며 노조원들의 기세를 제압한 덕분”이라고 기술하기도 했다.

농성 진압에 동원된 ‘헬기’는 최루액 살포 이외에도 농성자들의 심리적 압박용으로 사용됐다. 경찰은 백서에서 “경력 진,퇴 훈련을 통한 심리전과 소모전에도 헬기가 큰 도움이 됐다. 특히 야간에는 최루액 비닐봉지나 최루액을 직접 투하하지는 않았지만 노조원들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키기 위해 심야시간(23:00, 02:00, 03:00)대를 선택하여 선회 비행하면서 헬기에 장착된 서치라이트를 이용하여 노조원들을 비추는 등 실제 진입하는 착각을 불러일으켜 불법시위용품을 소모하도록 하고 농성 노조원들에게 긴장감과 심리적 압박을 가하여 이탈을 유도했다”고 밝히고 있다.

[출처: 미디어충청]

경찰은 ‘노사자율 해결 원칙’을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노조를 상대로 심리전을 벌여 교섭 압박 및 타결을 이끌어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실제로 2009년 8월 2일, 쌍용차노사는 3일간의 끝장교섭을 벌였지만 합의에 실패했다. 사측이 ‘정리해고 60%’안을 고수하며 교섭 결렬을 선언한 까닭이다. 이후 경찰은 이틀 뒤인 8월 4일에 공권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심리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조 전 청장은 자서전에서 “2009년 8월 4일을 D-day로 삼았다. 이틀 전부터는 밤새도록 경찰을 이동시키며 밀고 당기기를 계속했다. 노조원들도 이틀간 밤잠을 설쳤다”고 밝혔다. 그리고 8월 5일 공권력 투입에 성공한 경찰은 기자회견을 열고 교섭 타결 압박을 위한 여론전에 나섰다.

경찰은 백서에서 “경기청장은 8월 5일 오전 도장1공장, 조립공장 옥상을 확보하여 농성자 활동반경을 도장2공장으로 압박한 후 오후에 기자회견을 개최하였다”며 “이 자리에서 8.2정리해고를 포함한 구두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이ㅇㅇ를 비롯한 강경파가 쇠파이프를 들고 한상균 위원장을 ‘때려죽인다’고 협박하여 일반 노조원들에게 협상안을 설명도 못하고 합의 번복했다는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강경파의 입지를 대폭 약화시키고 결국 협상 타결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 경찰은 백서를 통해 노사 간 협상타결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 8월 5일 조현오 경기청장의 입장발표 기자간담회였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경기청은 “전일 경찰의 도장1공장, 조립공장 옥상 장악과 경기청장의 최후통첩이 노조원들의 농성 지속을 어렵게 하고 결국 정리해고를 받아들이게 한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상 이날 공권력 투입은 경찰이 자본을 대신해 노동자의 양보 교섭을 받아낸 것이었다.

경찰, 대법원, 그리고 청와대

2009년 8월 5일 쌍용차 조립공장 옥상에 경찰 공권력이 투입된 날, 2명의 노동자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에 대한 경찰의 인식은 당시 ‘폭력 진압’의 잔인함을 드러낸다. 조현오 전 청장은 자서전을 통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복기했다.

“돌이켜봤을 때 제일 아찔했던 순간은, 조립공장 옥상 진입을 개시한 지 얼마 안 되어 노조원 2명이 공장 옥상에서 추락했다는 무전이 흘러나왔을 때였다.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들이 사망한다면 내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이제 집에 가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어차피 그만둘 건데 상황을 확실하게 끝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공황상태에 빠져 있던 경찰관들에게 정적을 깨고 무전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나머지 공장 진입을 계속 진행해 깨끗하게 마무리 지었다. 오후 들어 다행히도 그들이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 ‘내가 여기서 그만둘 운은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경찰청 역시 백서를 통해 “작전이 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노조원 추락이라는 무선교신이 흘러 나왔을 때에는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도 잠시, 경기청장의 결의에 찬 지휘로 진입작전은 계속되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미디어충청

8월 4일과 5일에 걸친 경찰의 진압작전이 무리한 시도였다는 것은 경찰도 시인하는 바다. 경찰은 백서에서 “진입 결정은 대형 참사를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과 일부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내려진, 실로 ‘고뇌에 찬 결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조 전 청장도 자서전에서 “주변에서는 절대 다수가 경찰 투입에 반대했다”고 설명했다. 양일에 걸친 진입 시도에 대해, 강희락 당시 경찰청장이 진입 중지를 지시했지만 조 전 청장이 이에 항명했다는 진술도 나온다. 4일 진입 시도 당시 중상 4명, 경상 46명의 많은 부상자가 발생해 강희락 전 청장이 “진입을 안 하는 것이 좋겠다”는 전화를 여러 차례 했음에도, 조 전 청장이 스스로 물러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5일 진압을 두고도 강희락 전 청장이 ‘확고하게 재차 중지 지시’를 내렸음에도 조 전 청장은 청와대에 직접 연락해 허락을 받아내기도 했다.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는 경찰과 청와대, 사법부가 만들어낸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가장 큰 문제는 정부가 공권력과 사법부까지 동원해 ‘기술 먹튀’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상하이자본의 쌍용차 먹튀에 조력했다는 점이다. 또한 이명박 정권은 쌍용차 사태 이후, ‘노조파괴 시나리오’를 가동해 금속 사업장 등에 대한 대대적인 노조파괴에 나섰다. 이명박 정권 시절 대법원장으로 임명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을 비롯해 통상임금, 전교조 법외노조, 콜트콜덱, 철도노조 파업, KTX열차승무지부 불법파견 등 주요 노동 사건 판결을 두고 정부와 ‘거래’했다. 그리고 조현오 전 청장은 쌍용차 진압 이후 서울지방경찰청장과 16대 경찰청 청장 자리에 올라 본격적인 ‘댓글조작’을 벌였다. 김득중 쌍용차지부 지부장은 “쌍용차 노동자 폭력진압은 이명박 정권이 추진한 노동 유연화 정책의 실험대였다”며 “이 과정에서 경찰은 이명박 정권과 자본의 하수인으로서,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들을 살인 진압하는 역할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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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선영

    당시 쌍용차 노동조합에서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폭력을 동반한건 사실 아닌가요?. 여기에 대응하는 경찰이 갖는 혐오감을 강조하기 이전에, 왜, 어떤 방식으로 폭력을 쓰게 되었는지를 조명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