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학자 김시덕의 ‘서울 선언’

[서평] “무심코 걷는 길, 새로운 감수성”

돌이켜 보건대 서울사람에게 유년의 추억을 증명할 만한 곳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자고 일어나면 철저히 파헤쳐지고 너무도 낯선 모습으로 변해 버리는 게 우리 일상이 아니었던가. 그 허전함이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때가 있지만, 사는 게 원래 이런 거려니 하며 포기하곤 한다. 얼마 전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을 둘러싼 상인들의 저항도 이곳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의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부모의 손을 잡고 방문했던 곳, 수족관에 펄펄 뛰는 생선들을 날 것으로 보고 직접 먹어봤던 그 유년기의 기억도 소중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살고 공간을 제대로 인식하며 살고 있을까? 일상적이고 너무도 가까이 있기 때문에 또는 바빠서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서울 사람들은 고향이 없다 하는 거 같다.

아들 녀석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방학 숙제로 태어나 자란 곳을 온종일 돌아본 적이 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녀석은 작은 공책을 들고, 지금은 ‘북서울 꿈의 숲’으로 바뀐 드림랜드, 석관동 성북도서관과 그 주변 마을, 장위시장과 돌곶이 어린이집을 들렀을 때 추억으로 수다를 떨던 녀석은 장위 초등학교를 거쳐 골목길 담벼락에 쓰인 낙서와 공놀이 하던 곳에 다다르자 차츰 조용해지고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뭔가 골똘히 사색에 잠기는 거 같았다.

오래된 기억은 가슴 두근두근 벅차오르다가도 또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 아릿해 오게 마련이겠지. 나는 녀석에게 도시적 ‘감수성’에 대해 일깨우고 싶었다. 외부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감수성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어떤 것이 아니라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사람도 특정 공간을 벗어나 생존할 수 없기에 자기 주변을 둘러싼 환경에 관심을 두고 이해하게 된다면 궁극적으로 이를 지키고 보존하려는 노력으로 나아가게 되지 않을까? 약간의 방향과 훈련을 통해 충분히 갖춰질 수 있지 않을까?


여기 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서울과 도시공간의 물리적 변화를 정리한 책 ‘서울 선언’이다. 도시와 공간을 중심으로 한 책들이 주목받는 이유는 과거 개발 광풍으로 피로도가 높아진 시점에 서울을 직접 체험하고 도시를 어떻게 바라보고 사유할 것인가? 라는 다양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동안 서울을 다룬 책 가운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우선 책의 첫 장 ‘여기도 서울이다’ 에서는 기존의 사대문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 지금의 서울이라는 것도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1963년 확장을 통해 탄생한 서울특별시와 그 주변 지역 모두가 대서울이라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필자는 말한다.

2장 ‘나의 서울 답사 40년’으로 이어지면 마치 언젠가 저자와 내가 길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것처럼 ‘기시감’이 느껴진다. 나는 개인적으로 빈민운동단체에서 근무하다 보니 활동 경험상 공간과 지역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기존의 마을을 허물고 욕망의 대상으로 자리한 고층 아파트에 대한 경계가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유년기에 청계천 삼일아파트에 잠시 살았지만 비좁은 아파트와 계단으로 오르내리던 기억이 썩 유쾌하지만 않다. 서울에서 아파트는 낯설거나 가난의 상징이었으며 또 한쪽에서는 강남을 중심으로 선망과 부의 상징이었기에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기존 도시를 다룬 많은 책이 해방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생겨난 골목길과 전통가옥 혹은 개량주택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대신, 이 책은 자신의 기억을 차근차근 추적하는 식의 자전적 체험에 근거를 두고, 저자가 살아온 아파트에 대한 애틋한 정서를 일정 정도 보여준다. 어린 시절 올림픽 주경기장에 만들어 놓았던 비밀기지, 그리고 잠실 1단지 입구의 모습과 잠실 주공 5단지에 자리 잡고 있던 야외 수영장 자리 등이 그렇다. 이제는 메워져 주차장 자리로 바뀌어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웠을 때의 헛헛한 심정을 저자뿐만 아니라 책을 읽는 독자도 똑같이 느꼈을 거라 짐작된다.

3장 ‘서울 걷기 실전편’ 은 저자의 시각이 더 자세히 드러나는데, 청계천에서 시흥까지의 답사를 다룬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과거 서울 커다란 자연재해라 할 수 있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둘러싼 이야기, 영등포와 강남의 지명을 둘러싼 이야기, 서울 중심으로 소위 변두리 외곽지역으로 일컬어지는 성남시, 동쪽 끝인 YH무역과 원진레이온, 동일방직. 서남쪽인 구로공단과 가리봉의 노동자 이야기. 시흥과 목동의 남쪽 끝을 둘러싼 이야기는 체험에 그치지 않고 전공을 토대로 시간을 두고 방문했던 곳을 다시 찾아 변해버린 장소 안에 숨겨진 역사성을 조명해내고 다시 자신의 기억을 덧붙여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그리고 마지막 제4장 ‘서울 어떻게 기억할까’로 글을 맺는데, 서울을 바라보는 기본적 시각에서 장소를 둘러싼 답사와 그리고 다시 과제로 이어지는 구성은 마치 망원렌즈로 서울을 크게 잡고 차츰 조여 가면서 구체적인 현안으로 접근하는 방식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이 오가는 마을의 공터에서 출발하여 실핏줄처럼 사방으로 이어진 골목을 걷다가 깊숙이 미로 속을 헤매고, 그리고 우연히 만나는 주민과 함께 커다란 등나무 아래 잠시 쉬어 마을의 속사정을 전해 들은 후 땀을 식하고 다시 되돌아 나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34쪽 저자의 말처럼, 유명한 건물이나 사건 현장만 보고 다니는 것은 서울답사의 초보 단계다. 유명한 지역을 걸어 다면서 그 공간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은 중급 단계고, 전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도시구획을 걸어 다니면서 서울 사람이 살아온 모습과 감춰진 재미를 발견해 내는 것이 고급 단계의 서울 답사다. 이 책은 무심코 걷는 길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도시적 감수성을 독자에게 제공해 줄 것이고, 역사 문화적 시각을 통해 공동체적 삶이 서울이라는 커다란 도시에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일상적 삶의 공간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안겨 줄 것이다. 이번 여름 어디 멀리 갈 거 없이 이 책 한 권 읽고 동네 한 바퀴 어슬렁거리고 걸어 보는 것도 더위를 이기는 방법이 아닐는지 김시덕에 '서울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