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50원이 사회주의를 만났을 때

[워커스] 사회주의 탐구영역

[출처: 김용욱]

#1. ‘오늘만 사는’ 나는 왜 초라한가

“1년만 살고 죽을 거냐?”

2년 전쯤 호기롭게 ‘독립’을 선언했을 때 모친께서는 한심하다는 듯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독립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신도 서른 살이 다 돼가는 자식을 언제까지 데리고 살고 싶지 않다고 하셨으니까요. 문제는 너무나도 순진한 제 독립 ‘대책’이었죠. 알뜰살뜰 모은다고 모았는데, 수중에 쥐고 있던 돈은 200만 원 남짓. 전역한 직후라 아직 수입원은 없었지만 제 계산은 대강 이러했죠. 대학 때 자취하던 언덕배기 원룸이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이었으니 지금 가진 돈 200만 원으로 3개월은 버틸 수 있고, 그 3개월 안에 일자리를 구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월 100만 원 정도의 일자리를 일단 찾아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독립했을 때를 가정해 이 수입을 전제로 계산기를 두드려보았습니다. 월세, 식비, 교통비, 통신비 등 생존 유지 수준으로 최대한 긴축재정을 적용했을 때 한 달에 남는 돈이 약 10만 원이더군요. 그래서 다달이 이 10만 원을 열심히 모아 조금씩 더 나은 생활을 해보겠노라고 계산내역을 모친께 ‘근거자료’로 보여드렸던 것이죠. 그 결과 제게 돌아온 반응은, 위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니, 확실히 저 생활이 전도유망할 것 같지는 않더군요. 집주인이 보증금 혹은 월세를 올리거나, 병원비처럼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기거나, 혹시 친구를 만나서 술이라도 한잔 마신다면 당장 제 계산은 박살나고 말 테니까요.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지속가능한 삶을 꾸려나가는 게 이렇게 빡빡한 것이었구나. 왜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하는 자괴감 섞인 의문도 들었죠.

최근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을 두고 이래저래 반발이 큽니다. 최저임금위원회가 결정한 2019년 최저임금은 시급 8,350원, 소정근로시간을 적용해 월급으로 환산하면 약 174만 원이죠. 기업주와 경영자들은 집단반발하고 있고, 불복종 선언까지 내놓았습니다. 최저임금이 올라서 고용이 줄고 경제가 위축될 거라는 위협적 전망도 흔히 볼 수 있죠. 지난 5월 말 국회가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확대해 실제 최저임금을 삭감하는 개악을 강행한 데 이어, 이제는 주휴수당까지 최저임금 산입범위에 포함시키라거나 임금체계 개편, 최저임금 업종별 차등적용과 외국인 적용배제 등 어떻게 해서든 실제 임금액수를 깎기 위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현재 최저임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을 일일이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질문하고 싶은 것은, 과연 저 최저임금이 노동자들에게 지속가능한 삶을 보장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올해 최저임금위원회가 분석한 ‘비혼 단신근로자 실태생계비’는 2017년 기준 월평균 193만 원이었습니다. 1년 전인 2016년에는 약 175만 원이었죠. 물가가 오르니 2018년, 2019년에는 200만 원을 훌쩍 넘어설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번에 결정한 2019년도 최저임금은 2019년 기준 생계비는커녕 2017년의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 노동자의 절반은 월 240만 원 미만으로 살아가고, 그 중에서도 절반은 150만 원보다도 적은 월급으로 생계를 이어갑니다. 보육도, 교육도, 노후도 최소한의 보조 외엔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이 나라에서, 저 돈 받고 일하면서 결혼하고 집 구하고 애 낳고 잘 키워서 살아보라고요? 앞날은 고사하고 오늘만 사는 것조차 버거운 현실. 우리는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2. ‘성장과 분배의 이분법’에 빠진 것: 누가, 어떻게, 무엇을 위해?

먼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물질적 수준이 아직 구성원들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에는 부족한 것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단적인 지표를 한 번 보지요.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롯데 같은 국내 30대 재벌그룹이 축적한 사내유보금이 2017년 말 기준으로 880조 원에 달합니다(재벌사내유보금 환수운동본부, ‘2018년 재벌사내유보금 현황’). 그리고 이 분석에 따르면 30대 재벌 사내유보금 액수의 단 7%인 약 60조 원만 있어도 이 나라 모든 노동자의 최저임금 1만 원을 즉시 달성할 수 있지요. 한편 재벌 사내유보금은 지난 1년간 약 75조 원, 2년 만에 120조 원이 증가했습니다. 최저임금 1만 원 실현에 필요한 금액 60조 원과 비교하면 엄청난 부가 30대 재벌의 수중에 매년 추가로 축적되고 있는 것이죠. 물론 시급 1만 원(월 환산 209만 원)이 곧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언급한 실태생계비를 고려하면, 월 200만 원 남짓으로도 저축은 어렵고 다소 빠듯하게 살아야 하기는 하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30대 재벌이 축적하는 천문학적인 이윤을 사회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최저임금 1만 원은 일도 아닐뿐더러 그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삶이 실현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모두가 풍요로울 수 있는 이 물질적 가능성을 봉쇄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른바 ‘분배’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임금을 더 올리거나 법인세처럼 이윤의 일부를 거둬들여 사회적으로 재분배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가령 세금을 더 부과하면 자본은 ‘기업 활동이 위축돼 고용을 줄이겠다’는 식으로 위협하죠. 마치 오늘날 ‘최저임금을 올려서 일자리가 줄어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위협만은 아닙니다. 이윤을 계속 축적하려면 당장 생산을 줄이기 어렵기에 무작정 고용을 축소할 수는 없겠지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 이윤에 압박을 받는다고 판단할 때 자본은 얼마든지 노동자들을 해고하거나 생산을 축소해 사회 전체를 위기로 내몰 수 있죠. 이는 생산 자체를 자본이 통제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우리가 새로운 분배의 원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분배를 가능하게 하는 생산의 권력을 자본이 아니라 노동자들과 사회 전체가 확보해야 하죠.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폐지와 민주적 통제’라고 불렀습니다. 흔히 사적 소유 폐지에 대해 ‘개인 물품들까지 공유하자는 것이냐’하는 오해 혹은 비아냥거림을 접할 수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닐뿐더러 저 역시도 제 개인 노트북이나 휴대폰, 좋아하는 그룹의 앨범CD를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사용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개인적 소유’를 더 풍족하게 누리기 위해서라도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철폐해야 한다고 하죠. 그래야 자본이 배타적으로 점유하던 이윤을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누릴 수 있으니까요.

이는 또한 이른바 ‘현실사회주의’에서 나타났던 명령경제와도 다릅니다. 설령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사라졌다 해도, 노동자들이 민주적 과정을 통해 생산을 사회적으로 통제할 권한은 여전히 없었죠. 그 자리를 거대한 국가기구와 관료층이 차지했고,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국가 관료와 소수 경영진의 지시에 따라 특정 생산량을 맞출 것을 강요당해야 했습니다. 사회구성원의 필요를 충족할 생필품 생산은 부족했고,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이라는 사회주의의 핵심 가치는 사라진 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생활은 노동자들과 유리된 권력의 통제 하에 놓였죠. 이에 따라 분배 역시 민주적 결정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명령에 의해 이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 소유하고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통제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더 이상 개별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생산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회구성원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을 계획하지요. 그렇다면 사회구성원들의 필요는 어떻게 판단할까요? 생산의 주체이자 소비의 당사자이기도 한 노동자들이 민주적 절차에 따라 스스로 결정하게 됩니다. 과거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 나타났던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가 그 대표적인 맹아적 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업장별로 만들어진 평의회는 지역 평의회를 조직하고, 나아가 전국 평의회를 구성하죠. 작업장의 노동자들은 평의회 의원을 선출하고, 얼마든지 소환할 권리를 가지며 대표자들은 노동자들의 평균소득을 받는 것 외에 어떤 특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사회주의 사회가 된다고 해서 저절로 젖과 꿀이 흐르는 지상낙원이 펼쳐지지는 않을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평의회에서 노동자들은 생산에 있어 어떤 사회적 가치와 필요를 우선시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하게 논쟁하고 토론하면서 좌충우돌하게 되겠지요. 그러나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노동자들이 직접 자신들의 풍요를 어떻게 만들고 나눌지를 결정함으로써, 적어도 지금처럼 한편에서는 어떤 사회적 기여도 없이 그저 축적을 위한 축적에 사회적 부가 낭비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하루의 삶조차 버텨내기 어려운 사람들이 늘어나는 비합리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3. n빵하면 사회주의다?

사회주의적 생산은 이렇듯 사회구성원들의 필요를 근거로 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분배와 직결돼 있습니다. 조금 전에는 평의회에서 노동자들이 사회적 필요와 그에 따른 분배방법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요. 이는 결국 노동자 자신에겐 스스로의 노동에 대해 어떤 보상원리를 만들 것인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 당장 새로운 사회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세세하게 모델화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집단적인 의사결정과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지고 변화할 테니까요. 다만 추상적으로나마 스케치해볼 수는 있을 겁니다.

일단, 사회 전체적으로 생산한 부(富)에서 소비로 분배하지 않고 공제해야(혹은 남겨두어야) 할 몫이 있겠지요. 노동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인간다운 삶은 보장해야 마땅하니까요. 또한 미래를 위한 연구개발이나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식의) 생산 확대를 위해 필요한 몫이 있을 수 있고, 만일을 대비한 여유분도 남겨두어야겠지요. 게다가 공공부문의 확충을 위해 필요한 투자도 있을 겁니다. 앞서 최저임금 얘기를 하면서(그리고 제 처지에 대해서도 푸념하면서) 현재 임금으로는 생계비도 충당하기 빠듯한 현실을 보았는데요. 당장 생존과 기초적인 생활에 필수적인 지출만 해도 부담이 상당하죠. 사회주의자들은 주거, 교통, 통신, 보육, 교육, 의료 등 현대생활에서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공공성을 띤 재화와 서비스를 사회의 책임 하에 제공할 것을 주장합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에서라면 개별적으로 지출해야 했을 비용을 절감할 수 있죠.

이렇게 공제한 뒤 남은 몫은 어떤 원리에 따라 배분하게 될까요? 대개 ‘자본주의는 기회의 평등, 사회주의는 결과의 평등’이라고들 말하는데요. 제 생각에는 양자 모두 사실과 다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재용 부회장과 평등한 기회를 누리고 계신가요? 입사한 지 10년 만에 임원 자리에 앉고, 온갖 경영수업을 받고, 증여와 상속으로 손끝 하나 까딱 않고 회사 지배권을 물려받는 재벌이나 기업주 일가와 정말 같은 기회를 보장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거꾸로, 사회주의라고 해서 1/n 식의 똑같은 결과를 분배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수준의 보상은 기본적으로 이루어져야지요. 또한 심각한 불평등을 야기할 정도의 격차가 생겨서도 안 될 겁니다(이는 노동자들이 직접 분배방식을 결정함으로써 상당 부분 방지할 수 있는 문제겠지요). 다만 고되더라도 사회적으로 꼭 필요하지만 사람들이 꺼려하는 일들도 있고, 고도의 숙련이나 전문성을 요하는 일들도 있을 겁니다. 따라서 기회의 평등을 철저히 보장하되(예컨대,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자격요건이 필요하지만 그 자격요건을 갖추기 위한 교육과 수련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보장하는 것이죠), 사회적 가치판단에 따라 보상의 차이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계속 변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성원들의 필요와 욕구가 변하고, 그에 따라 생산과 분배의 비율도 바꾸어야 할 테니까요. 중요한 것은, 그 사회적 가치판단의 기준이 더 많은 이윤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필요라는 것이고, 판단의 주체는 자본과 엘리트가 아니라 노동자들 자신이라는 겁니다. 사회주의는 어떤 완성된 유토피아도 아니고 역사의 종언도 아닙니다. 다수의 직접생산자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일 뿐입니다.[워커스 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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