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여성이자 장애여성의 홀로서기

[이슈①] 경증 뇌병변 장애인 C씨의 노동

이슈① [누가 나의 노동을 쓸모없게 만드는가] 순서

도비라. 누가 나의 노동을 쓸모없게 만드는가
1. 중증장애인 생산시설에서의 20년
2. 합법화된 가난, 장애인 노동
3. ‘헬스키퍼’로 일하는 시각장애인 노동자입니다
4. “장애인 노동의 가치,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동”
- 일하고 싶은 장애인, 투명인간 취급하는 사회
5. 비혼여성이자 장애여성의 홀로서기



기업에서 재택근무 사무보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물건 판매 현황을 엑셀로 정리하는 일을 주로 합니다. 근무한 지는 1년 반 정도 됐고요. 처음 모집 공고에는 ‘전화업무’라고 나와 있었는데, 채용 후 업무가 바뀐 것 같아요. 제가 경증 뇌병변 장애인이라 발음이 조금 어눌하거든요. 면접 때 ‘발음이 원래 그러느냐’는 질문을 받아서 떨어질 줄 알았는데, 다행히 채용이 됐어요. 그리고 다른 직원이 하고 있던 엑셀 정리 작업을 제가 맡게 된 거죠. 생각해보면, 회사에서 장애인 일자리를 급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면접관이 자신들도 장애인 고용은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이 있으니 뽑긴 뽑는데, 어떤 업무를 맡겨야 할지 애매했던 거죠.

저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4시간 노동을 해요. 오전 10시에 회사 메신저로 출근 보고를 하고, 정오까지 물건 판매 현황을 정리합니다. 점심시간 이후 1시부터 3시까지는 미회수 물건을 조회, 정리하는 일을 하고요. 임금은 최저임금의 절반 정도. 중식비 10만 원을 포함해 실 수령액은 80만 원 정도입니다. 혼자 독립해서 살기엔 굉장히 적은 돈이죠. 저도 가능하면 출퇴근을 하는 전일제 일자리를 갖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질 않아요. 태어날 때부터 뇌병변을 앓긴 했는데, 특별히 아픈 곳이 많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회사 생활을 하면서 불면증이 심해졌고, 자궁근종 수술과 재발을 반복하면서 급격히 몸 상태가 악화됐죠.

출퇴근이 불가능한 상황이라 재택근무 일자리만 찾았습니다. 그러다 지금 일을 겨우 구한 것이고요. 대부분 장애인 재택근무 일자리는 중증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작년까지는 4시간 재택근무 일도 간신히 했고, 나머지 시간은 누워있거나 잠을 자야 했습니다. 최근에는 그나마 호전이 돼서 오후에 사람도 만나고, 이렇게 인터뷰도 할 수 있게 됐지요. 6월에는 부모님 집에서 독립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독립을 시도한 것이 벌써 세 번째네요. 주변에서는 ‘왜 부모님 집에서 편히 있지 자꾸 독립을 하려 하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사실 저 같은 비혼여성이자 장애여성은 지금까지의 삶도, 앞으로의 삶도 그리 평탄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제가 죽을 때까지 살아 계시지도 않겠지요. 계속 부모님 곁에서 살다 보면, 의존성도 높아지고 세상물정도 더 모른 채 살아갈 것이라는 위기감이 들었어요. 언젠가 세상 밖으로 던져졌을 때, 그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면역력이 있어야 하잖아요. 내가 나를 책임질 수 있도록 계속 독립을 시도하는 겁니다.

한 달에 80만 원 가량의 월급으로 생활을 꾸리기는 힘들어서, 지금은 모아 놓은 돈을 조금씩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직장이 사라질까봐 언제나 불안하지요. 1년 단위로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비정규직 일자리라, 내년이 두렵거든요. 이곳에 취업한 지 1년이 됐을 무렵, 장애인고용공단에서 근무 환경에 대해 묻는 전화가 왔어요. 제가 그때 공단에 털어놓은 고민은, 너무 단순 업무라 재계약이 되지 않을까봐 불안하다는 것이었어요. 내년이면 근무한 지 2년이 됩니다.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면 좋겠지만, 계약만료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언제나 고용불안은 가장 큰 걱정거리이지요.

재택근무는 이번이 두 번째예요. 직전 회사에서도 재택근무로 1년 반을 근무했습니다. 소규모 디자인 회사였어요. 하루 8시간을 일했지요. 디자인 기술이나 경험이 없어 망설였는데, 장애인고용공단에서 3개월간의 교육을 잘 수료하면 취업할 수 있다고 해서 지원하게 됐어요. 주 5일, 하루 6시간 씩 세 달간 꼬박 교육을 받았지요. 교육비는 따로 없었고, 중식비만 한 달에 10만 원을 받았습니다. 교육 마지막 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사진 100장을 작업하는 테스트가 있었어요. 그런데 테스트가 끝난 뒤, 갑자기 회사에서 교육 기간을 한 달 연장하겠다고 통보했습니다. 기술이 부족하다면서요. 한 달에 10만 원을 받으며 3개월을 버텼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지요. 교육 기간이 연장된다는 말에 동료들이 힘들어하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4개월의 교육 끝에 취업이 됐습니다. 15명의 장애인 노동자가 월 150만 원을 받으며 그 곳에서 일을 했지요. 우리는 3일 주기로 사진을 100장씩 보정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기술도 없고 손도 느린 사람은 집에서 초과근무를 해야 했지요. 물론 수당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팀장 두 명이 갑자기 퇴사를 하는 겁니다. 알고 보니 임금이 체불되고 있었다더군요. 임금 체불은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9개월이 넘어가면서, 제 임금 역시 체불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한 달, 그리고 두 달, 또 다시 세 달. 전 직원의 월급이 지속적으로 체불됐습니다. 임금 체불보다 더 신경 쓰였던 것은, 4대 보험료까지 계속 체납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회사가 사회적기업으로 전환해 장애인표준사업장 인증을 받으려 했다더군요. 그래서 무리하게 장애인 노동자들을 고용했던 것이었습니다. 회사가 장애인표준사업장 인증을 위해 장애인을 꼭두각시처럼 동원한 꼴이었지요.

저는 장애인고용공단에 임금 체불 사실을 알렸어요. 공단에서는 자신들이 강제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난처해했습니다. 회사 사장은 공단 측에 ‘장애인들이 손이 느려서 매출이 안 나온다’고 하소연을 했다더군요. 결국 마지막 3개월 임금이 체불됐을 무렵, 회사를 나왔습니다. 다행히 체불임금과 퇴직금을 모두 받았지요. 그런데 제 뒤에 퇴사한 직원은 체불된 5개월 치 임금도 받지 못한 채 회사를 나와야 했습니다.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해도 오래 걸리고 해결이 되지 않는다더군요.

원래 제 꿈은 국어 교사였습니다. 20대 시절에는 임용고시 준비도 했었지요. 그 때 처음으로 학원 강의를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3일 만에 해고됐어요. 발음이 어눌해서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더군요. 굉장히 충격을 받았었죠. 그래도 꿈을 포기하지 못했고, 중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의 기억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따르지 않는 것, 교실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 그 모든 것들이 자기 비하로 이어졌거든요. 제 스스로 장애에 대한 비하가 얼마나 뿌리 깊게 들어박혀 있는지 절실히 느꼈지요. 자기 비하가 계속될수록, 저는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쓰다가, 나중에는 욕을 했고, 마지막에는 폭력을 썼어요. 안 되겠구나, 더 욕심내면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뒀습니다.

그 후 우울증을 겪었고, 불면증과 이러저러한 질병을 겪으면서 ‘이 몸으로 노동을 계속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들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원하는 노동조건을 따라갈 수 없는 몸이니까요. 저도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싶지만, 저는 장애와 질병을 떼어놓을 수 없는 몸이 돼 버렸지요. 정말 중요한 것은 일을 할 수 없는 장애인도 같이 먹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는 겁니다. 일을 할 수 있는 장애인들은 다양한 직업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야 하고요. 사실 장애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대부분의 장애인 일자리는 단순 업무뿐이죠. 저비용 고효율을 따지는 한국사회에서, 장애인 고용을 비용 낭비라고 생각하는 인식부터 개선해야 하지 않을까요.[워커스 57호]

* 이 기사는 경증 뇌병변 장애인 C씨와의 인터뷰를 재구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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