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9일의 기록

[레인보우]


“와아아아아아아아아.”

2019 평등행진 참가자들이 청와대 쪽을 향해 경복궁 옆길에 들어서자 양옆의 인도에서 엄청난 함성과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양손에 든 태극기와 성조기를 힘차게 흔들며 한시도 쉬지 않고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가 청와대 앞 도로에 가득 찼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이 정도의 열광적인 함성은 북한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TV를 통해서나 들어본 것이었으니까. 아마도 사정을 모르는 어떤 관광객이 보았다면 행진단을 환영하러 나온 인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선 인도의 나무에는 ‘동성애 반대’라고 쓴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문재인 반대’가 어느 순간 ‘동성애 반대’가 됐다. 어떤 사람들은 “동성애는 북한공산당”이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들은 평등행진의 참가자들을 향해 “더럽다”, “죽어라”고 외쳤다. 또 어떤 이들은 “면상이나 보자”며 행진단을 향해 거침없이 카메라를 들이밀기도 했다. 그래도 평등행진의 참가자들은 힘차게 걸었다. 자신을 향해 죽으라고 외치는 사람들 사이를, 이미 죽은 이들과 함께 걷고, 그 자리에서 춤을 추었다.

죽음이 멀리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거리에서 죽어가는 홈리스, 돈이 없어 굶어 죽는 빈곤 계층의 사람들, 기계에 끼이거나 오물통의 유독가스로 인해 죽어가는 이주노동자, 산재사망이 일상이 된 비정규직·하청 노동자, 폭력과 살해의 위험에 늘 긴장해야 하는 여성, 비장애인 중심의 거리·교통 환경과 활동보조인의 부재로 죽어가는 장애인, 자신을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죽으라”고 외치는 사회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성소수자들…. 굳이 죽으라고 저주하지 않아도 이들에게는 죽음의 구조가 늘 가까이에 도사리고 있다. 누군가의 죽음은 이미 일상이 되고 당연해져 버린 세상에서,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평등을 말하라”는 2019년 평등행진의 구호는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보장하라는 외침이었다. 그리고 이 날의 청와대 앞 풍경은 그 현실을 적나라하게 증명하는 듯했다.

한편 이 날은 조국의 장관직 사퇴 이후 양측의 집회가 최고조에 이른 날이기도 했다. 광화문, 서울역, 여의도, 서초동이 모두 관련 집회의 인파로 가득 찼다. 이제 광장에 모이고 거리를 행진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아주 익숙한 일이 된 듯하다. 하지만 광장으로 터져 나온 민주주의의 경험은 얼핏 확장된 것처럼 보여도 그 내용은 여전히 채워지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대한민국의 특정 권력을 지키거나 끌어내리는 것만이 곧 민주주의의 의미가 돼 버린 것이 아닐까.

2016년 광장에 선 사람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라고 외치며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했다. 그러나 그 외침이 문재인 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진 이후, ‘국민’의 경계는 강화되고 ‘민주주의’의 역할은 더욱 협소해졌다. 난민 반대 집회에서는 “국민이 먼저다”라는 구호가 등장하고, ‘문재인 반대’와 ‘문재인 지지’ 사이에 계속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성소수자, 장애인, 노숙인, 빈민, 이주민, 난민은 말할 자격을 박탈당하고, 비정규직·하청 노동자와 이주노동자들의 위험한 노동구조는 오히려 더욱 강화되고 있다. 국익을 핑계로 가장 열악한 위치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잔인한 구조는 이른바 ‘촛불 정부’에서 다시금 합리화되고, 민주주의의 내용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2019년 10월 19일, 이 날 모인 수만 명의 대중 사이에서 평등행진 참가자들의 요구는 어디쯤 가 닿았을까. 평등에 대한 요구는 그저 개인적인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을 담보로 유지되는 권력의 장을 바꿔내야 한다는 요구이며, 그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죽으라”는 아우성 속에서 이미 죽은 동료들과 함께 행진한 평등행진의 참가자들을 통해 조금이라도 전해졌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