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노동

[워커스 사전]


언제부터인가 노동해방이란 말 대신 ‘탈노동’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탈노동 담론은 탈계급 담론과 함께 부상했다. 1980년대 이후 서구 좌파들은 저성장 기조로 돌아선 ‘포스트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이 점차 소멸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1983년에 출간된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은 1996년 출간된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만큼 대중적으로 유명하진 않지만 탈노동의 시대를 예언한 대표적인 책이다. 노동자들의 생활양식과 소비 패턴의 변화, 정보 지식사회로의 이행에 따른 블루칼라 노동자의 감소와 화이트칼라 직군의 증대는 노동계급의 양적 축소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노동계급의 부르주아화’를 나타내는 분명한 지표처럼 보였다. ‘프롤레타리아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프롤레타리아에게 안녕을 고하고, 새로운 사회 개혁의 주체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었다. 에릭 홉스봄도 “전통적 사회주의 노동당의 핵심인 육체노동자 계급은 축소되고 있을 뿐 확장되고 있지 않으며”(Marxism Today, 1982년 10월호) 이런 상황은 중간 계급과의 ‘동맹’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1)

알렉스 캘리니코스와 크리스 하먼은 《노동자 계급에게 안녕을 말할 때인가?》(2006)라고 반문하는 책을 통해 노동계급 소멸론이 하나의 착시였음을 논증하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사라진 노동자들은 서구의 좌파 지식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뿐이다. 기술 발전과 산업구조의 변동이 전통적인 노동자 계급의 소멸을 초래했다는 분석은 서구의 산업국가에만 국한된 고찰이고, 그 고찰은 일국의 차원에서만 타당하다. 국제적 차원에서 보면, 서구의 도시들에서 공장과 노동자들이 사라질 때 중국과 인도 등 지구의 다른 곳에서는 서구 기업들의 하청 공장과 공장 노동자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결국 고르의 세계에서 사라진 노동은 다른 세계로 외주화됐던 것이고, 심지어 프랑스 안에서도 실제로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제조업 분야의 노동자들은 서비스업 노동자나 소자영업자로 전환됐고, 그 과정에서 집단적 노동 안전망을 벗어난 고립된 개별 노동자들과 실업자들로 해체됐다는 것이다. 그들은 파리 부르주아들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는 곳으로 밀려났거나 유령화 되었을 뿐이다. 노동은 기술에 의해 대체된 것이 아니라 외곽 지대 이주 노동자들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에 의해 대체됐고, 유입된 저임금 노동자와의 경쟁 및 기술 가치가 노동 가치를 압도하는 금융 자본주의에 의해 기존의 노동계급은 더 가난하고 비참한 상태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탈노동의 담론이 다시 부활했다. 20년 전 유입된 탈노동의 가설은 최근 들어 창조경제와 혁신경제, 4차 산업혁명론과 직업소멸론 등 미래 가설을 통해 다시 확산돼 힘을 얻고 있다. 20년 전과 다른 것은, ‘노동 없는 사회’에 대한 우려나 비판의 관점이 아니라 그것을 포스트 자본주의의 대안적 미래로 검토하는 긍정론이 훨씬 더 우세해졌다는 점이다. 지금의 탈노동 담론은 주로 혁신주의- 리버럴 진영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 노동 없는 사회는 피할 수 없는 대세이며, 노동의 소멸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전유하자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인공지능, 로봇경제, 디지털 자본주의와 함께 분배적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기본소득론과 내용적으로 함께 구성되면서 탈노동의 신화를 재구축하고 있다.

혁신주의적 기본소득 진영에서는 실업 구제나 일자리 정책이 아니라 탈노동 사회로의 전환 대응이 필요하며 기본소득은 탈노동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정책적 대안 중 하나라고 본다. 여기서 말하는 노동의 소멸은 직업의 소멸, 일자리의 소멸, 지식과 기술 가치의 상승에 반비례하는 노동 가치의 하락을 의미한다. 이런 탈노동 사회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만성적 실업 사회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탈노동 담론은 그것을 기술 및 경제 발전의 필연적 귀결로 가정한다. 탈노동 사회에서 야기되는 여러 문제는 기술적으로, 즉 자본주의 안에서 수정 보완해야 할 것으로 말한다. 이런 현실론적 논리는 자본주의 경제의 내적 변화에 노동자들을 적응시키는 적응론과 순응론으로 우리의 사고를 이끈다.

탈노동 담론은 여기서 더 나아가 탈노동 사회를 적극 지향해야 할 상태로 규정하기도 한다. ‘인간이 노동하지 않는 사회’를 우리가 살고 싶은 바람직한 미래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부르주아-시민’과 ‘프롤레타리아-민중’ 사이에 존재하는 노동에 대한 가치와 철학의 근본적 대립을 드러낸다.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이 필요할 때는 노동의 가치를 찬미하며 착취를 미화하던 부르주아 경제학과 사회학은 지금은 ‘창조적 사고’에서 가치가 나온다며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을 이론적으로 무가치하게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 부르주아-시민적 이상에는 종종 부르주아적 관점에서 해석된 그리스 역사가 신화화돼 동원된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시민들이 노예에게 노동을 전담시킴으로써 여가를 누리고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신화이며, 현대의 시민들도 로봇과 기계에게 노동을 맡기고 생존의 노동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창조적인 일을 하면서 살아가자고 우리를 유혹하는 ‘탈노동의 신화’다.

이 탈노동의 신화는 임노동의 신화를 비판한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꿈꿔왔던 노동해방의 미래와 같은 것인 양 보이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대체로 지식층과 중산층 시민들이 ‘탈노동’에 호응을 보이는 것과 달리, 현장 노동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어떤 위험을 숨기고 있는 거대한 속임수처럼 들린다. ‘노동하지 않고 먹고사는 삶’이란 노동자들의 노동윤리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노동자들이 임금에 의해 노예적 상태에 길들여졌기 때문이 아니라 평생 정직한 노동으로 먹고 살아왔기 때문이고, 내가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누군가가 내 몫의 노동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을 경험과 직관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핀리(Moses Finley)와 폴라니(Karl Polanyi)를 비롯한 대부분의 고대 경제사 연구자들은 노예 경제가 성장할수록 자유인의 노동 가치가 하락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로봇 경제도 동일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고대 사회의 귀족들은 노동을 천한 것으로 여기지만 민중은 그렇지 않다. 아테네의 데모스도 노예처럼 노동하는 것은 거부했지만 노동하지 않는 귀족적 삶을 옹호하지도 않았다. 귀족들에게는 ‘노동하지 않는 것’이 고귀함의 징표이나, 민중에게는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노동’이 자유인으로서의 긍지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노예산업은 부자들의 힘을 키우고 민중의 힘을 약화시켰으며 과두주의자들의 힘을 키워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트렸다. 고대까지 가지 않더라도 자동화 기술과 기계 노동이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대신 노동자들을 기계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수없이 확인된 사실이다. 세탁기와 냉장고를 혁신해도 그것이 여성의 해방을 가져오지는 않으며, 트랙터와 하우스가 농민을 해방시키기보다 자본에 대한 예속을 강화한 것처럼, 자본가가 투자하는 혁신 기술이 노동자의 해방을 가져올 수 없음은 같은 이치로 자명하다. 노동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노동 주체의 정치적 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탈노동의 목표는, ‘자본주의 철폐’를 목적으로 하는 노동해방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노동해방은 노동계급이 노동의 주체로서 노동의 주권을 탈환하는 것이다. 생산과 노동에 대해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노동자들이 갖는 것, 그것이 노동의 탈환이고 노동의 해방이다. 그러나 탈노동의 주체는 노동자가 아니다. 지금 탈노동을 추진하는 주체는 노동자가 아니라 기계와 기술, 그리고 그것을 소유하고 독점하는 자본이다. 탈노동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힘을 해체하고 노동자들은 그런 탈노동에 저항해서 싸우고 있다.

저항은 전통적으로 노동계급의 주력부대였던 조직화된 기업 노동자들이 아니라 주변화된 노동영역에서 일어났다. 프랑스의 노란조끼 시위에서는 서비스 부문 노동자들, 특히 간호사들이 선두에 있었고 화물 노동자들과 임시직 노동자들이 중심으로 등장했다. 여기에 양극화된 지식층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하층 극단에 존재하는 노동자들이 가세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가열찼던 투쟁의 현장을 돌아보면 톨게이트 수납노동자들이 있고 영남대의료원 간호노동자들이 있고, 대학 강사들의 강사법 투쟁이 있었다. 이들이 탈노동화 된 노동자들의 현 실태다. 노동을 재구성하는 주체들도 바로 이들처럼 노동자이면서 노동자의 권리로부터 배제된 존재들, 해체되고 주변화된 노동자들로부터 나올 것이다.

기술에 의한 노동 대체를 바람직한 것으로 보고, 그래서 로봇 경제와 스마트 경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왜 고속도로의 매연 속으로 돌아가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하루 종일 톨게이트에 앉아 돈을 받고 영수증을 주는 일을 반복하는 것은 어떤 창조성도 발휘할 수 없는 단조롭고 무의미한 단순 노동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기계적인 노동은 기계가 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기업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노동자 자신을 위해서도 그런 노동은 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이들에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투쟁과 직접고용 요구는 하나의 아이러니이며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그들은 “왜 노동자들이 스스로 임금 노예가 되기 위한 투쟁을 하는가?”에 답할 수 없어 괴로워한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노동자들이 노동의 현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노동 주체의 권리와 존엄에 대한 요구이며, 무엇보다 억압이 있는 그 현장이 곧 그것을 철폐하는 투쟁의 최전선임을 알기 때문이다.

탈노동의 개념에는 두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노동이 사라진다는 가설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가 사라진다는 가설이다. 노동이 사라진다는 가설은 ‘고용 없는 사회’를 ‘노동 없는 사회’로 은폐시킨다. 기업의 고용 회피와 고용 감축, 그에 따라 야기되는 해고와 실업 사태를 ‘사회변동론’을 통해 정당화하는 것이다. 노동자가 사라진다는 가설은, 노동계급을 개인사업자와 소비자로 파편화시키고 노동조합과 단체들을 계획적으로 분쇄하는 자본의 힘을 은폐한다. 노동자는 기술과 사회 발전의 귀결로 자연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 드러난 재벌 기업들의 노조파괴 문건 등에서 보듯이, 노동계급의 쇠퇴는 체계적이고 조직적 분쇄의 결과이며, 상층부의 관리 계급은 돈으로 회유하거나 포섭하고, 하층 노동자들은 파편화해 더욱더 비참한 상태로 몰아가는 ‘분리, 차별, 양극화’의 통치 기술에 따른 결과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저항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소멸에 저항하는 주체로서 자본의 탈노동화를 거부하는 힘을 보여준다. 그들은 노동의 해방이 생산력의 발달이나 기술에 의한 탈노동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계급적 단결과 투쟁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적 힘을 통해 쟁취할 수 있음을 실천으로 증언한다. 노동해방의 의미는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착취로부터 노동을 해방하는 것이며, 그 목표는 노동하지 않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다운 노동에 있다. 노동해방이 임노동을 철폐하는 노동계급의 주체적이며 능동적 운동을 의미한다면, 탈노동은 자본에 의한 노동의 해체를 필연적이고 객관적인 사태로 둔갑시키는 기술적 용어다. 우리가 찾아야 할 길은 노동으로부터의 탈구가 아니라 노동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철폐하는 길이다.

[각주]
1) 알렉스 캘리니코스·크리스 하먼 지음. 이원영 옮김. ⟪노동자계급에게 안녕을 말할 때인가⟫ (책갈피, 2001).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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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효정(정치학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강사)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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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저씨

    육체노동을 착취, 해방과 연결하는 데에서 멈추어 아쉬운 글이네요. 지금은 정신노동이 굉장한 속도로 구축되는 것 같던데요. 인공지능이 육체노동 뿐만이 아니라 정신노동까지 구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더 나은 글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며칠 전부터 기계가 쉽게 대체하지 못하는 분야가 오히려 스포츠 분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축구, 농구 등을 보면서 그랬습니다 이 분야는 대부분 육체로 하잖습니까. 그렇지만 나노정밀기술단계에서도 그 분야는 인간이 기계보다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그러했을 때는 단순히 정신노동이 육체노동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아저씨

    코로나 사태는 보면서

    정부와 여당은 최선을 다 하는 모습을 피력하고, 미래통합당은 사실과 호도를 하는 여론전에 머무는 것만 같습니다. 국민들은 코로나의 병명을 정확하게 알고 싶고, 가벼운 증상과, 중증, 사망 그 각각의 원인과 과정을 더 알고 싶지 않겠습니까. 의사는 구체적으로 알겠지만 환자는 몸으로만 알 것 아니겠습니까. 더민주당, 미래통합당이 총선에만 최선을 다하지 마시고, 코로나의 정확한 병명 원인을 알려주셨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한국은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감기 정도라면 공포를 느껴야 할 정도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의 경과로 볼 때 중국의 코로나와 한국의 코로나가 전혀 다른 병명이라고 생각됩니다만.

  • 아저씨

    거기도 답변을 해줘야 되냐

    조원진-지방대,등빨
    김문수-서울대,인천노련 출신, 도지사 출신

    지방하고, 어르신, 서울대에다 여론조사율 해보면 되겠구나,

    여론지지율 0.01%

    집회를 하면 젊은 사람들한테 밀려서 안타까운 집회가 될 것 같다. 이 시국에 집회를 하는 것도 상당히 부담이겠다만. 경찰이 "어르~~~~~~~씨인.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고 해야 좋지 않겠나 싶다.

  • 아저씨

    현대중공업 자유게시판

    제목:어헛, 어디서 건방을 떠는고
    내용:자유게시판이 물이라면 현장은 피이다. 산재가 나는 날을 제외할 때는 하루에 흘리는 피의 양이 1리터는 되겠다. 현장 곳곳의 날카로운 쇠에 머리부터 발까지 부딪힌다. 그러니까 웬만한 사람은 돈 많이 줘도 일을 못한다. 하청의 일은 더 심하고. 발판 나르고 들어올리는 곳은 거의 육체미(바디빌딩) 선수가 된다. 종아리 근육부터 목 근육까지 다 완성된다.


  • 아저씨

    문재인 정부와 더민주당, 미래통합당은 작당정치 그만하라. 청와대에서 광화문에서 석고대죄하라.

    코로나는 당신들의 정쟁으로 확산된 측면이 있다. 당신들은 정확한 병명도 국민들에게 단 한번도 알리지 않았다. 오직 통치와 지배에 급했다. <공포정치, 마스크를 써라.> 건물 폐쇄 등등. 또한 당신들이 정쟁을 하는 동안 사망자는 나왔다. 당파투쟁이 건설적이지 못한 채 그 끝판으로 다가갔다. 집권을 위한 표에만 혈안에 된 채 당신들이 무엇을 하였는가. 청와대에서 광화문에서 석고대죄를 하라.

  • 엿장수

    어어, 박원순시장 야단났다. 전광훈 목사 집회에 조원진 의원하고 김문수 의원도 쫄따구로 연단 밑에 선단다. 불을 진압하려다 확산되겠는데 어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