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명하지도, 간청하지도 말자

[레인보우]


지난해 기초노령연금 수급 신청을 하면서 어머니는 여러 차례 긴장 섞인 한숨을 내뱉으셨다. 자식들이 달마다 조금씩 드리는 최소한의 생계비 외에는 최저생계비 수준에도 한참 못 미치는 수입을 가지고 계시는데도, 통장에 들어온 돈의 출처와 병원비 내역까지 꼬치꼬치 확인하는 과정에 많이 지치셨던 모양이다. 수급 자격을 얻기 위해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시간들. 이혼 후 혼자 세 자녀를 키우면서 살아남기 위해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건만 그렇다고 익숙해질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살아가기 위해 계속해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장애가 있는 사람은 장애를 증명해야 한다. 게다가 역설적이게도 최소한의 지원이나마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한 번의 증명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응원 대신 언제라도 해명을 요구하기 위한 의심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이주민과 난민들은 또 다른 증명을 요구받는다. 언제 본국으로 돌아갈 것인지, 얼마나 열심히 일할 것인지, 어떤 사정이 있는지, 그 사정은 얼마나 간절하고 진실한지. 때론 한 사람의 정체성과 삶 자체를 모욕하는 질문들 앞에서도 나의 말이 상대방에게 제대로 가닿는지도 모른 채 답하고, 또 답해야 한다.

혹여 불미스러운 사건이라도 하나 발생하면 집단 전체가 긴장하게 된다. 서울시민 A씨의 범죄는 개인의 잘못일 뿐이지만, 이주노동자 A씨의 범죄는 이주노동자 전체를 위험한 집단으로 의심받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언제든 이들의 자격을 박탈할 수 있는 근거로 편리하게 사용될 수 있다. 우한에서 발생한 바이러스가 확산되자 아무 근거도 없이 대림동을 들쑤셨던 언론들처럼, 마치 이 사회는 언제든 편하게 화살을 돌릴 수 있는 잠재적 혐오의 대상을 준비해두고 있는 듯하다.

최근에는 트랜스젠더가 이 불합리한 사회의 자격심사대에 놓였다. 성별재지정 수술을 받은 후 여군에서의 복무를 요청했던 변희수 하사는 소속 대대의 허가까지 얻어서 수술을 받고 돌아왔음에도 “더 쉽고 유리한 환경에서 근무하려고 수술을 받고 온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고자 숙명여자대학교에 지원했던 A씨는 수술을 마치고 법적 성별정정까지 마쳤음에도 ‘남자의 몸’으로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여대에 지원했으리라는 의심을 받았다. 또 여성의 공간에 침범해 언제 위협을 가할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반대와 혐오선동으로 인해 결국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그녀의 입학을 반대했던 이들은 환영 성명을 내고 ‘나름의 빅픽쳐’도 그려뒀는데 아쉽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A씨의 입학 포기 소식이 전해진 날,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담은 탄식과 분노 속에서 장애인권운동을 해온 두 분의 글이 오랫동안 눈에 머물렀다.

‘상상행동 장애와 여성 마실’의 김광이 대표는 이렇게 글을 남겼다.

“트렌스젠더 A씨가 숙명여자대학교 입학 등록을 하지 않았다는 뉴스를 조금 전에 봤다. 열감이 심장에서 눈으로 그리고 몸 깊게 퍼진다. 장애여성이어서,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라던 삶, 환경 속으로 끼어들 수 없었던 숱한 경험들이 일순간 A씨의 현재와 오버랩 되었다. 그러자 그 경험이 반복되면서, 인간으로서 존중받고자 내게 쌓인 습관적인 노력과 그만큼의 막막함의 습관이 떠오른다. 배제, 차별, 노골적인 거부와 부정과 공격의 일방적인 언어들. (중략) 여기 또 한 사람이 얼굴 모르는 A씨를 기억하며, 그의 이후 안부와 소식을 듣고 싶지만, 못 듣더라도 잊지 않고 축원한다. 앞으로도 단단하게 자유롭게 40대, 50대, 60대로 나아가기를”

그리고 김원영 변호사는 이런 글을 남겼다.

“‘너 도와주려다 다치면 누가 책임지냐. 아이들이 너 한 사람 때문에 피해를 볼 수는 없지 않으냐. 너와 같은 학생을 위해 특수학교가 있으니 그리로 가라.’ 그래서 15살까지 방구석에만 있었고 18살에도 고교입학 거부당하다 겨우 입학했지. 뇌가 폭풍 성장할 시기에 할머니랑 아침마당이나 보면서 10대 시절의 그 긴 시간을. 당연히 그들은 차별이나 혐오로 생각지 않았고 ‘생물학적 위험’으로부터 아이들과 나를 보호한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트윗이 있었다면 승리에 겨워했을지도 모를 일.”

단지 다른 몸을 지녔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수도 없이 의심받고 증명을 요구받아 온 두 사람에게 이 사건은 단지 트랜스젠더 A씨의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체화된 경험이었다. 비슷한 경험을 한 누구에게라도 그러했으리라. 그래도 그 의심과 증명의 굴레를 뚫고 나오는 한 사람이 있기에, 이 존재들을 짐짓 모른척하던 세상이 한 번씩 뒤집어진다. 그 용기를 보여준 A씨는 우리에게 이런 글을 남겼다.

“성숙한 사람에게 있어서,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는 더 알아가고자 하는 호기심이 되어야지, 무자비한 혐오여서는 안 된다. 이러한 혐오는 진정한 문제를 가리고, 다층적인 해석을 일차원적인 논의로 한정시킨다. 이러한 무지를 멈추었을 때만, 사회의 다양한 가치들을 이해하고, 보다 건설적인 방향으로 공동체를 발전시킬 수 있다. 나는 그래서 이 사회가, 모든 사람의 일상을 보호해 주기를, 다양한 가치를 포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그런 길만이 우리 사회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중략) 나는 비록 여기에서 멈추지만, 앞으로 다른 분들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또 감사한다.”

그리고 그의 용기를 지지하는 3003명의 개인과 253개의 단체는 “우리는 계속 ‘위협’이기를 원한다”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이렇게 화답했다.

“포기하거나, 실패하는 동시에 자신과 공동체의 더 나은 삶을 고민해온 모두가 우리의 동료다. (중략) 트랜스젠더는 언제나 여기 말고 다른 곳에 있어야 한다는 자들에게 해명하지도 간청하지도 말자. 그것이 사회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죽으라는 말과 과연 다를지 스스로 깨닫게 하는 사회를 만들자.”

우리는 이 용기들에 빚을 지고 있다. 그러니 더 이상 해명하지도, 간청하지도 말자. 소수자들의 삶의 조건에 증명을 단서로 달아 온 사회에, 해명 대신 책임을 요구하자. 우리 삶을 평등하게 보장하라는 당연한 책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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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저씨

    참세상이 3부라더만. 그러니까 죽자사자 노는 민중주의 언론이 2부는 된다는 소리잖어. "인터넷 세상"이라지만 여전히 그늘의 2부, 3부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