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의 시대, 코로나 경험에서 배우기

[녹색 스트라이크]


그다지 특별한 일도 없이 그저 열심히 하루의 삶을 살고,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 오랑. 어느 날 이 도시에서 죽은 쥐가 발견되더니 눈 깜짝할 새에 천 마리가 넘는 죽은 쥐들이 길거리를 채운다. 시민들의 요청에 당국은 그 쥐들을 수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죽은 쥐와 사람의 접촉으로 역병이 창궐하고 오랑은 순식간에 마비된다. 여행과 우편이 중단되고 도시는 봉쇄된다. 생존을 위해 사람들은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하지만 상황은 악화돼 급기야 계엄령이 선포되고, 당국의 명령을 어기고 오랑을 벗어나려는 이들이 사살되는 일도 벌어진다. 숨죽인 오랑 시민들은 자신이 다음 차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버티지만, 사람들은 픽픽 쓰러져 간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1947년 발표한 《페스트》라는 소설에 나오는 장면이다. 반나찌 레지스땅스 멤버로 2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카뮈는, 이를 통해 이 세상이 돌아가는 어처구니없는 방식과 여기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코로나19의 시대, 유럽 몇몇 도시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을 것만 같은 상황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얼마 전 프랑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코로나로 힘들어 하는 우리에게 카뮈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는 “우리가 겪는 고통은 랜덤(random)하다”라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나약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조건에서 삶의 ‘어처구니없음’의 깨달음은 절망이 아닌 ‘희비극적 구원(tragicomic redemption)’으로 승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카뮈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역사 속의 숱한 역병들을 연구했지만, 정작 그가 살았던 시대의 감염병 지식은 지금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오랑 당국이 길거리에 널브러진 천 마리 넘는 쥐를 보호 장비 없이 수거하는 것의 위험만 알았어도 ‘페스트’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형 감염병은 그저 랜덤한 자연재앙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에 갇힌 온갖 동물들이 들어찬 우한의 한 시장에서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장은 살아있는 동물과 죽은 동물, 그리고 사람이 촘촘하게 들어찬 공간이다. 동물들의 분비물과 도축과정에서 나오는 피, 이를 씻기 위한 물이 뒤섞인 ‘물기 많은 시장(wet market)’에는 온갖 미생물과 병원균이 넘쳐난다. 카뮈의 소설에 나오는 흑사병처럼 동물과 인간에 공통적으로 해가 되는 병원균이 있는 반면, 에볼라, 사스, 코로나 등 최근 급증하는 감염병들은 동물 몸 안에 무해한 상태로 있던 미생물이 인간을 비롯한 다른 동물종에 전이되면서 변이를 일으킨다. 우한의 화난시장과 같이 각종 생물종이 뒤섞여 있는 공간은 이와 같은 병원균의 전이와 변이를 일으키기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한다.

우한 시장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대규모 벌채, 농지 확대, 축산 시설 조성, 광물과 화석연료 채굴, 도시 확장 등 무차별적 자연 착취에 기반한 인간의 경제활동으로 사람과 동물 간의 접촉이 증대했고, 이 과정을 통해 감염병의 발생과 확산 가능성도 계속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산업화와 공장식 축산으로 급증한 온실가스는 지구표면의 기온을 상승시켰다. 이는 다시 대기와 바닷물의 흐름, 동물의 서식지와 이동 경로를 바꾸어 전에 없던 인간과 동물 간 접촉을 불러왔다. 자연스레 대형 감염병의 빈도도 증가했고 그 향권도 확장됐다.

90년대 후반 이래 미국의 골치가 된 웨스트나일 바이러스는 나일강 열대지역 모기의 병원균이 변화된 철새의 이동 경로를 따라 미국에 상륙하면서 시작됐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적도를 따라 좁은 역에서 발생하던 지카 바이러스는 2015년 엘니뇨 기류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더니 중남미의 온대지역에까지 확산되는 대형 감염병이 됐다. 2016년 여름 시베리아에서는 사라져버린 줄로만 알았던 탄저균이 다시 등장해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이는 온난화로 북극 주변 얼음이 녹으면서 오랜 세월 그 안에 갇혀 있던 탄저균이 빠져나와 순록을 통해 사람에게 전이된 탓이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최근 빈번해지고 있는 대규모 감염병이 단지 우연히 발생하는 ‘자연재앙’이 아니라 인간 행위의 결과라는 점을, 자연환경과 다른 생명체를 이윤 창출의 도구로만 삼는 무분별한 자본주의적 사고방식과 개발의 산물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도, 코로나19와 같은 대유행병도 자본주의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인 셈이다.

이런 와중에 코로나19가 촉발한 전 지구적 위기는 자본주의의 문제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선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코로나 통제 실패와 이로 인한 확진자의 기하급수적 증가, 마스크와 호흡기조차 공급하지 못하는 허약한 공공의료 체계, 그리고 이와 연동된 경제 시스템의 붕괴는 지금의 사회체제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구축되어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독일 메르켈 총리에 의해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위기’로 묘사된 코로나 정국은 현 사회 시스템에 대한 성찰과 지속가능한 대안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아울러 이미 존재하던 불평등과 기후위기 담론, 그린뉴딜과 같은 사회개조의 상상력과 결합되며 더 큰 공명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결과 몇 차례의 경제위기에도 꿈쩍 않던 각국의 지배층은 특단의 조치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줄줄이 비상사태를 선포하는가 하면 이태리, 스페인, 벨기에 등에서는 봉쇄조치가 내려졌다. 이들은 또 2008년 경제위기 때보다도 큰 규모의 재정정책을 계획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재난 시기 악화된 시민들의 경제상황을 돕기 위한 현금 지급도 포함돼 있다. 이에 더해 스페인은 효과적인 코로나 대응을 위해 모든 민간 의료기관을 국유화했고, 프랑스에서는 월세와 각종 공과금 지불, 빚 상환 등을 중지하는 명령까지 발표했다.

역사적으로 제대로 된 변화의 동력은 위기상황에서만 만들어진다 했던가. 이런 단기성 조치들은 중장기적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도 적지 않은 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코로나 비상상황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된 새로운 일상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경제활동 감소에 따라 탄소배출도 줄어 우리는 더 깨끗한 공기를 마시게 됐고, 많은 이들은 출근하지 않고도 일할 수 있음을 배워가고 있다. 밤늦게까지 밖을 돌아다니지 않고, 집에서 건강과 그동안 소홀히 했던 일들을 챙길 여유도 생겼다. 공무원과 의료 노동자, 배달 노동자 등 우리가 그간 잊고 살았던 노동의 소중함도 새삼 깨닫는다. 이 와중에도 최소치의 국가경제는 돌아가고 있다. 주거와 기본소득까지 보장된다면 꽤나 괜찮은 사회의 모습일 것 같다. 이런 경험— 혹은 상상—은 기후위기 시대 이후의 사회를 그려야 하는 우리에게 무척이나 소중한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지금의 위기는 기후위기가 드러나는 한 방식이며 오늘의 대응은 이후에 닥쳐올 지도 모를 더 심각한 기후재난에 대비하기 위한 리트머스 테스트이기 때문이다.

페스트가 사라지고 도시의 봉쇄가 풀리자 살아남은 자들은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카뮈는 그러나 그런 기쁨도 한 순간일 뿐이라는 점을 각인시킨다. 이 병균은 어디선가 끈질기게 살아남아 ‘죽음 그 자체와 인간의 깨달음을 위해’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그러나 오랑이 대비를 철저히 하면 또 다른 페스트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운 나쁘게 감염병이 다시 도지더라도 그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김선철 (독립연구자,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정책위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