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사회 카르텔 깨부수기

[꿘 여성의 생존기] 지속가능한 운동을 위하여


오래전부터 운동 사회에서는 ‘지속가능한 운동’에 대한 고민과 토론이 이어져 왔다. 운동의 미래와 전망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선배 활동가들은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활동가들에게 ‘하루 이틀 운동할 거 아니지 않느냐’며, ‘길게 보고 가야 한다’며 조언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주제는 항상 몇 가지로 국한된다.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 빈번한 야근과 주말 근무 등 열악한 노동환경, 혹은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고 열심히 해도 좀처럼 변화하지 않는 현실 등이 그것이다. 반면 동료와 관계 맺는 법,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과 조직 운영 방식, 운동 사회의 오랜 관습이나 운동에 대한 인식 등은 지속가능한 운동의 요인으로서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빈곤과 과로가 지속가능한 운동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활동가는 활동을 중단하는 이유에 대해 “사람들과 관계가 틀어져서”, 혹은 “조직문화가 맞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접점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일반 회사라면 모를까, 같은 의제로 고민하고 사회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모인 운동 사회에서 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걸까?

“노사 간에 벌어진 일이 아닌 같은 활동가들끼리 일어난 일을 착취나 폭력이라고 말하면 안 되죠.” 최근에 한 인권단체에서 발생한 활동가들 간의 위계 폭력에 사건에 대해, 해당 단체를 옹호하는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운동단체들은 상명하복이나 관료제의 원리로 운영되는 것이 아닌, 그 단체의 활동 방향과 이념, 규약 등에 따라 운영된다. 때문에 일반적인 회사에 비해 서로 간의 위계가 상대적으로 약하거나 비가시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운동 사회에서는 원칙적으로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단체 역시 평등한 공간일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위계가 약하거나 비가시적이라는 것은 위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평등은 선언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족이나 연인 관계에서도 서로 평등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데, 운동단체라고 활동가들 간의 관계가 온전하게 평등할 수 있을까?

당장 자신이 있는 조직에서 누가 가장 말을 많이 하는지, 누가 가장 먼저 혹은 마지막에 말을 하는지, 의사 결정 과정에서 누구의 말이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등을 보면, 의외로 각각에 해당하는 사람이 거의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운동 사회는 일반 기업과 달리 단순히 나이와 경력, 학벌 등으로 위계가 결정되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위계가 존재하며 그 위계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다. 분명한 것은 그 어떠한 관계도 상호 간의 노력이나 성찰이 없으면 평등해질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위계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선배 활동가가 경험이 많고 식견이 넓으니 중요한 의사결정 시 그의 의견이 더 많이 반영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랫동안 반복돼온, 위계를 정당화하는 굉장히 고전적인 논리다. 또한 모든 사람의 경험을 획일화하고 양적으로 측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성립하는 논리다. 이는 자칫 다른 이들의 경험을 존중하지 않고 다양성 및 소수성을 배척하는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완전히 똑같은 경험이 있을 수 없을뿐더러, 똑같은 경험이라도 이를 정의하고 해석하는 것은 각자 다르다. 결국 오래 활동한 사람의 의견이 더 존중돼야 한다는 주장은 기존 활동가가 새로운 활동가들의 입을 막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 외에도 가장 헌신적이고 일을 많이 하는 활동가가 발언권을 많이 갖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주장에 따르면 건강상의 이유로 야근이 불가하거나 육아 등 가정에서 돌봄 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주장은 운동 사회가 비판해왔던 주류사회의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를 답습하는 것 아닌가? 운동 사회에서는 평등이 당연한 가치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운동 사회가 평등하다고 볼 수는 없다. 활동가들조차 소수자를 배제하는 사회와 그 논리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이것을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평등한 사회에 대한 상상력과 불평등에 대한 성찰 능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운동단체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 아닐까.

활동가 스스로가 위계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것뿐 아니라, 위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역시 위계 폭력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다. 자신이 조직에서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활동가들은 자신보다 연차나 직급이 낮은 활동가들에게 존댓말과 완곡한 어조를 사용하며 위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시도들은 평등하고 건강한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에서 그친다면 위계에 대해 대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 공대위에서 피해자 변호사 중 한 명이 “권력은 액티브 스킬이 아니라 패시브 스킬이다”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법원은 1심에서 안희정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안희정과 김지은 씨 사이에 위계가 존재한 것은 맞지만 위계를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위계는 권력을 가진 이가 권력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어야 발동되는 것이 아니다. 안희정이 고압적으로 행동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지은 씨는 안희정의 기침 소리가 무서웠다고 했다. 안희정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헛기침을 했고,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권력을 가진 사람은 권력을 활용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윽박지르거나 폭행·협박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그저 기침 한두 번이나 ‘돌려 말하기’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위계는 보통 서로의 영향력이 불균등한 경우에 형성된다. 나는 운동 사회에서 강한 위계를 형성하는 특수한 문화와 이를 방관·묵인하는 그룹이 있다고 생각한다. 운동 사회 안에서는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공통 의제를 중심으로 단체들이 모여 운동을 전개하기 때문에, 같은 분야의 활동가들은 대부분 서로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경우가 많다. 게다가 앞으로도 계속 봐야 하는 사이라, 다른 단체에서 폭력이 일어나고 공론화돼도 타 단체 활동가로서 목소리를 내기란 쉽지 않다.

이런 사적인 이유뿐 아니라, 공적으로도 어떤 단체의 내부 문제에 타 단체 활동가가 말을 보태는 것은 단체 간 알력다툼이나 정파 간의 갈등으로 비화될 우려가 있어 문제가 있어도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신입 활동가, 혹은 상대적으로 권력과 사회적 자원이 적은 활동가들이 활동을 이어갈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한다. 나는 위계 권력과 이로 인한 폭력을 방관하는 문화와 그룹을 ‘운동 사회 카르텔’이라 말하고 싶다. 이 카르텔 밖의 사람들은 위계권력 아래에서 소외돼 버티지 못하고 단체를 탈퇴하거나 운동 사회에서 배제된다. 권위와 권력을 가진 활동가들만 남고, 빈자리는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위계적인 조직문화, 그리고 이 문화를 침묵·은폐하고 나아가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운동 사회 카르텔을 바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