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corporation

[워커스 사전]


오늘날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 중에는 ‘기업’이 있다. ‘기업화’는 2000년대 이후 노동 의제뿐 아니라 경제 사회 담론에서 핵심어였고, ‘친기업’, ‘반기업’ 같은 단어를 비롯해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은 기업과 싸워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기업을 상대로 싸우는 일이 매우 힘들어졌다. 과거에 자본을 대표하던 ‘자본가’라는 인격적 실체와 달리 오늘날의 기업은 그 실체가 잡히지 않아서다. 정리해고나 노조파괴 같은 기업 범죄가 일어나도 노동자들은 유령과 싸우는 것처럼 누구와 싸워야 할지, 그 책임을 어떻게 물어야 할지 막막하다. 결국 실무책임자 몇 명이 교체되는 것으로 끝나거나, 기업의 주인이 바뀌거나, 아예 철수하는 경우도 있다. 기업을 상대로 싸워본 노동자들은 기업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게 된다. 노동자들이 사측과 근로계약을 맺을 때 계약당사자는 갑과 을이며 두 사람 간의 일대일 계약으로 나타나지만, 현실에서의 힘의 크기는 ‘일대일’이 아니라 ‘천만 대 일’이다.

이런 기업과 개인이 법적으로 똑같은 권리와 책임의 당사자가 될 수 있을까? 오늘날 법원은 기업과 노동자를 똑같은 일자(一者)로, 한 사람의 법인격적 실체로 규정한다. ‘법인’이라는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기업(corporation)이란 말은 자연인이 아니라 법률상에만 존재하는 법인(法人, corporation) 개념을 나타낸다. 이 말은 신체를 뜻하는 ‘코르푸스(corpus)’라는 라틴어에서 기원했다. 코르푸스는 부분으로 구성된 전체로서의 하나의 몸(body)을 뜻한다. 이 코르푸스는 살아있는 몸만이 아니라 죽은 몸에 대해서도 쓰인다. 기업의 기원에도 두 가지의 신체가 존재한다. 생명(생산) 활동을 위한 경제공동체로서의 기업이 있고, 생산 활동과 무관하게 화폐 가치만을 증식하는 기업이 있다. 전자가 생산을 통해 이익을 얻는다면, 후자는 투자를 통해 돈을 번다. 물론 현실에서는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지만, 금융자본주의는 생산을 위한 투자가 아니라 투자를 위한 생산으로 실물과 금융의 관계를 전도시킨다. 특히 오늘날 문제 되는 것은 후자의 기업이다. 이 기업들은 실물경제보다는 금융자산을 통한 재산증식을 주된 기업 활동으로 삼는다. 생산을 위한 투자는 실물경제의 한계 내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지만, 투자를 위한 생산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 지구와 인간을 파괴하는 약탈적 자본주의의 동력은 ‘투자를 위한 생산’을 촉구하는 금융에서 나온다. 승객이 없어도 비행기 운항 횟수를 늘리고, 적자면서도 저가 관광을 계속하고, 더 수용할 수 없는 상태여도 리조트와 비행장을 계속 짓는 것은 결국 투자 유치와 주식 가치 때문이다.

막스 베버는 기업의 기원을 가정경영체에서 발전한 것으로 추정하고 <경제와 사회>에서 가정경영체에서 기업경영체로의 이행 과정을 추적하려 했다. 하지만 베버의 시야에 포착되지 않은 또 다른 기업 모델이 있다. 그 모델은 해외 교역을 담당하던 무역 상단에서 기원한 것이다. 기업의 두 가지 유형과 기원은 겉으로 대립적인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상호보완적이다. 서구의 착한 기업들이 나라 밖에서는 나쁜 짓을 하고, 국내의 애국 기업은 국외의 악질 기업이 되곤 한다. ‘이곳에선 불법적인 것이 그곳에선 불법적이지 않다’는 말은 오늘날 북구와 남구에서의 차별적 기업 행위를 드러낸다.

그런 약탈적 기업을 대표하는 것은 ‘빵(panis)을 같이(com) 나눠 먹는 한솥밥 식구’라는 뜻의 컴퍼니(company)와 구분되는 ‘엔터프라이즈(enterprise)’라고 불리는 기업이다. 엔터프라이즈는 공습, 기습, 침략의 의미가 들어있고, 산업에서는 특히 모험을 뜻한다. 근대국가의 성립 과정에서 기업은 국가 대신 침략과 약탈을 수행했고, 전쟁자금과 물자를 조달했으며, 자본주의 시초 축적과 초기 근대국가의 국가 재정, 국민경제 형성의 핵심 행위자였다. 상품 판매로 이익을 얻는 기업과 달리 이 새로운 근대적 기업은 생산 없는 순수 교환―종종 강제적 방식으로 이루어진―만으로 수익을 올렸다. 이런 기업의 이야기는 해적선과 보물선 이야기 같은 모험담으로 치장되고, 항로 개척과 해상 무역으로 불렸지만, 그것은 식민지 침략과 약탈을 은폐하는 이름이었다. 근대 사업가들이 개척한 해상무역에서 핵심 품목은 ‘노예무역’이었다. 오늘날 기업이 저지르는 악행의 기원을 우리는 서구의 노예 사업에서 발견할 수 있다. 투자자는 자신의 투자금이 수익으로 돌아오는 여정에서 저질러진 악행에 대해 무지를 가장하며 책임을 면제받는다. 그것은 주권적 경계를 초월하는 글로벌 기업이 갖는 본질적 속성이기도 하다.

기업을 법적으로 인간과 똑같은 인격체(person)로 취급한 결정적 계기는 미국의 수정헌법 제14조의 적용 판결이었다. 이 법의 원래 취지는 흑인에게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업 소송에서 변호인들은 수정헌법의 ‘개인 person’의 권리가 법인(기업)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1886년 기업을 헌법상의 개인으로 볼 수 있다는 최초의 판결(웨이트 판결)이 나온 이후 1910년까지 수정헌법 제14조와 연관된 연방대법원 사건 307건 중 흑인 관련 사건은 19건뿐이었다. 나머지 288건은 모두 법인이 권리를 쟁취하려고 제기한 소송이었다. 이를 통해 오늘날 미국 기업은 범행 사실이 명백한 경우에도 불리한 진술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 반차별법의 보호와 같은 헌법적 권리를 똑같이 요구할 수 있게 됐다. 소수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기업의 ‘표현의 자유’와 ‘사생활의 자유’를 보호하는 법으로 악용된 것이다.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권리를 강자가 가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것은 곧 전쟁과 공황으로 나타났다. 루스벨트 시대의 뉴딜은 바로 이 고삐 풀린 기업의 폭주에 제동을 거는 것이었다. 특히 금융자본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핵심이었다. 증권중개소와 투자은행을 상업은행에서 떼어냄으로써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엄격히 분리한 ‘글래스-스티걸법’(1933)이 대표적인 사례다. 1933년의 증권법, 1934년의 증권거래법, 1940년의 투자회사법을 통해 주식 거래 체계가 엄격한 공적 규제 하에 놓이게 됐다. 1929년의 대공황을 불러온 금융자본과 투기적 기업 모델은 전후 뉴딜체제의 규제 하에서 일시적으로 중단됐다가 1980년대와 90년대에 신자유주의 정부를 통해 부활했고, 2008년에 다시 경제를 붕괴시켰다.

한국에서 이런 미국식 기업 모델이 도입된 것은 IMF 때였다. 그전까지 한국에서는 기업을 시장에서 상품처럼 사고판다는 생각을 못 했다. 일본식의 가족기업이나 동업기업 개념이 지배적이었다. 처음 M&A 시장은 채무이행이 불가능해진 기업이 어쩔 수 없이 자산을 매각하기 위해 내놓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점차 기업 가치를 높인 재매각을 통해 투자이익을 얻으려고 매수하는 목적의식적 M&A로 유형이 바뀌었다. 기업을 사서 몇 년 후에 팔아 수익을 챙기는 사모펀드의 공격적 기업 인수와 매각이 M&A 시장을 엄청나게 키웠고,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로 투자 거품이 꺼질 때까지 계속됐다. 현재 기업 M&A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등에서 보듯이 재무 상태가 양호한데도 경영권 승계를 위한 방편으로 활용되거나 배달의 민족과 딜리버리히어로의 인수합병에서처럼 현금화를 위해 보유자산을 매각하고 경영자가 책임지지 않는 투자자로 전환하기 위한 수단적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수합병의 종착지는 결국 소수 거대자본의 독점화로 귀결되고 이것은 기업의 힘을 키우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소수 기업의 압도적 힘의 크기가 전체 노동과 자본 관계, 국가와 기업의 관계를 좌우한다.

이와 함께 살펴볼 것이 M&A 시장과 함께 팽창한 법률 시장이다. 국내 로펌의 규모는 IMF를 기점으로 급속히 성장했다. 기업 도산이나 인수합병 거래가 증가하자 로펌들이 외국계 회사를 대리하면서 높은 수익을 올렸기 때문이다. 이후 국내 기업은 로펌과 상시자문 계약을 맺고 사법연수원 우수졸업자나 유능한 변호사를 스카우트해 법조팀을 만들어 산재사고나 각종 분쟁에 대비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기업을 법인으로 창조한 것도 법이고, 노예 사업 등 악행을 합법적으로 만든 것도 법률가였다. 오늘날 대형 로펌들은 국제통상, 금융, 특허, M&A, 신규사업 진출, 노무관리 등 기업활동 전반에 걸쳐 컨설팅하고 있다. 막대한 국세 손실을 초래하는 국가-투자자 직접 소송제도도 로펌의 막대한 수입 원천이 되고 있다. 미국 법률 전문지 <아메리칸 로이어>에 따르면 세계 100대 로펌이 2018년 거둔 총매출액은 1144억 달러(약 136조 122억 원)다. 중국계 다국적 로펌 기업인 덴튼스(Dentons)는 소속 변호사만 1만 명에 이른다. 국내 1위 로펌인 김앤장의 2019년 매출액은 1조 원이 넘는다. 법도 기업화되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 개인이나 노동조합은 이런 로펌들의 법률적 지원을 받는 기업들과 맞서야 한다. 기업 합병에는 노동 인력 구조조정이 조건으로 붙기 일쑤다. 노동시장 유연화는 기업시장 유연화와 함께 도입됐지만 두 ‘유연화’의 결과는 상반된 것이다. 투자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업에서 인건비 감축은 곧 투자수익을 창출하는 주요 수단이다. 그러나 노동자 입장에서 기업의 유연성이란 한국에서 철수한 기업이 곧바로 인도에서 영업을 재개해도 노동자들은 삶터와 일터를 쉽게 옮길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의미했다. 기업이 한국의 노동자나 인도의 노동자들과 자유롭게 계약할 수 있다는 것은 노동자들에게는 역으로 가능하지는 않았고, 그것은 노동자들이 계약에서 불리해지는 조건이었다. 우리가 지금 뉴딜을 한다면, 무엇보다도 기업에 대한 뉴딜을 해야 한다. 루스벨트 시대가 1886년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면 한국에선 1997년을 바로잡는 조처가 필요하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IMF와 FTA를 통해 강화된 글로벌 기업의 약탈적인 투기 자본주의를 규제하는 뉴딜일 것이다.

세력으로서의 자본과 노동의 정치적 힘의 격차는 개별 사업장에서 그대로 반영된다. 마찬가지로 기업 경영에서의 노동과 자본 사이의 지배력의 압도적 차이는 국가 운영에서도 반영된다. 노동이 약화하는 과정은 자본이 강화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자본의 의지는 기업을 통해 실현된다. 오늘날 기업은 자본가의 영토이며 국가다. 이는 곧 노동권을 강화하려면 기업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민주적 통제 하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기업의 주인을 투자자에서 생산자인 노동자로 바꾸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기업에 대한 새로운 사회계약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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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효정(정치학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강사)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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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저씨

    고위공직자가 기자님의 글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올곧은 사람이야!", "배운 척 하는데", "돈 밝히는 여성들하고 비슷한 것 같다"

  • 아저씨

    두번째 보니까 이갑용 기고자의 글보다 몇 배는 더 해박하고 강한 글입니다. 확실히 참세상의 기사가 수준 면에서는 유수한 노동단체, 노동조합보다 높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