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우당탕탕 눈물찔끔 8인의 종합병원 노동생활

[이슈①] 슬기로운 병원생활

[출처: 은혜진 기자]

코로나19는 리트머스지다. 한국 사회의 약한 고리가 차례로 드러난다. 그중 하나가 의료다. 한국 의료기관의 90% 이상은 사립이다. 그런데도 10%에 불과한 공공병원만 코로나 전담병원으로 지정됐다. 병상 90%는 민간병원이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 환자 96%는 공공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공공병원은 환자로 미어터졌다.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한 응급환자도 발생했다. 코로나19 보호구 착용법부터 중증 환자 간호법까지 교육받지 못하고 투입된 의료 인력도 있었다. 정부는 K-방역을 말하며 방역에 자부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보건의료 노동자들은 ‘착시효과’라고 지적한다. 의료 노동자의 희생을 보지 않은 결과였다.

자연스레 공공의료를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정부는 의사정원 수를 확대하겠다면서도 급조한 정책을 내놨다. 의사들은 인력을 늘린다는데 파업으로 맞섰다. 그것도 노동조건이 가장 열악한 전공의가 중심이 됐다. 단번에 한국 의료가 응급 상황이 됐다. 그들의 줄다리기는 정부의 실패로 일단락됐지만 사회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런데 공공의료 정책 이야기에 왜 유독 의사의 목소리만 크게 들릴까. 의사는 공공의료 노동자 전 직군을 대표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가장 큰 국립대병원인 서울대병원 의사직은 1835명으로 전체 인력의 4분의 1을 넘지 않는다.

《워커스》는 종합병원 보건·비보건 의료 노동자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종합병원에서 일하는 8인의 이야기다. 전공의, 간호사, 간호조무사, 간병인, 환자이송노동자, 미화 노동자, 급식 노동자, 병원 노동조합 활동가. 그들 모두의 슬기로운 병원생활을 살펴본다. 이 이야기는 실제 인물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했다.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신원이 드러나지 않도록 각색됐다.


좌충우돌 우당탕탕 눈물찔끔 8인의 종합병원 노동생활

도희

오후 3시 30분, 데이 근무를 끝낸 도희는 집으로 가기 전 공방에 들렀다. 인류애가 사라질 때 도희는 종종 공방에 들러 뜨개질 재료를 산다. 뜨개질에 집중하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멈춘다. 다양한 색과 굵기의 실을 구경하는 것도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었다. 뜨개질의 완성이 의심 없이 성취로 연결되는 것도 좋았다. 이변 없이, 따뜻하고 포근한 무언가가 남는 게 좋았다.

간호사 일을 시작하고 얼마 간은 스트레스를 풀고 두려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 간호사의 실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에 직결된다. 그래서 실수가 없어야 하는데도 교육 시간은 짧았고 책임은 온전히 개인에게 돌아갔다. 그전까지 느껴보지 못한 강도의 불안과 공포를 처음으로 알게 됐다. 동기들 역시 비슷했다. 도희는 그렇게 무언가를 잊게 한다는 점에서 술과 뜨개질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병원에선 잊고 싶은 일도 많았지만, 게 중엔 절대 잊으면 안 될 것들도 있었다. 첫 병원에서 만난 선배가 없었다면, 도희는 병원 현장을 떠난 유휴 간호사로 남았을지 모른다. 닮고 싶은 선배는 답답한 질문에도, 조언을 구하는 일에도 매번 진심으로 말해줬다. ‘빛나’라는 이름을 가진 선배는 병원에서 혼자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계속 빛나서 우리가 여기 있다고, 우리는 이곳에서 세상을 비추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간호사로서 가지고 싶었던 자부심, 설렘으로 떨리던 마음이 질 때쯤이면 도희는 선배를 생각했다.

간호사 생활 4년 차, 코로나라는 복병을 만났다. 지역의 공공병원인 도희의 병원이 감염병 전담병원이 됐고, 도희가 일하던 병동이 코로나 전담 병동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도희는 코로나19와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가 됐다. 도희는 30분 일찍 출근해 환자 상태를 파악하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이런 워밍업 과정은 초과 노동이기도 하지만, 노동시간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전 듀티 간호사에게 인계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일을 시작한다. 코로나 상황실에서 담당 환자와 유선으로 연락하며 불편한 것이 없는지 체크하고, 의사의 오더를 받는다. 입원 환자를 절차에 맞게 입원시키는 일, 퇴원 환자를 위해 서류를 구비하는 일 등을 함께 한다. 방호복을 입고 있는 시간은 하루 2~3시간 정도다. 환자의 식사를 챙기고, 수액이 잘 들어가는지 체크하고, 산소호흡기에 문제가 있는지 살피고, 거동이 불편한 환자의 체위를 바꿔주고, 기저귀를 가는 일을 한다.

도희 역시 코로나 상황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방호복을 입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만 하더라도 하루가 항상 막막했다. 바이러스 침투를 막기 위한 방호복은 다리 하나를 넣자마자 땀이 나는 옷이다. 땀복과도 같은 옷을 입고 하루 두세 시간 정도 코로나 환자들을 돌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이 흘렀다. 그래도 도희를 지켜주는 보호구인 방호복을 입고 일하는 건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 치매 환자들이 때리려고 하거나, 옷을 잡고 찢으려고 할 때가 있어 불안하지만 그래서 치매 환자 아니겠나 생각한다.

도희가 두꺼운 바늘을 잡고 익숙하게 실을 감아나간다. 씩씩한 손놀림이 이어지고 곧 촘촘한 엮인 타래가 자리 잡는다. 도희는 실을 엮는 씩씩한 손으로 내일도 환자를 돌볼 것이다.

숙자

검은 머리칼 웨이브가 보기 좋게 말린 숙자는 간병인 사무장이다. 보랏빛 보석 목걸이가 그도 어엿한 여사라고 말하는 듯 반짝인다. 그는 낮에는 일을 주선하고 밤에는 간병일을 한다.

간병인들은 엄마들이 다 가장이다. 남편이 없는 사람이 유독 많고 있어도 그 나이 때 남자들은 일거리가 없다. 자식들도 다 비정규직이라 자기 살기에 바쁘다. 정년을 훌쩍 넘긴 육십, 칠십 먹은 할머니들이 스물네 시간을 일한다. 환자 가래나 똥, 오줌을 다 받아내지만 그보다 더 받아내기 어려운 게 갑질이다. ‘너를 돈을 주고 부리는 것’이라는 돈단련이 적지 않다. 때로는 남자 환자의 손이 쑥쑥 들어오기도 한다. 아무리 조심해도 언제 어디서 옮았는지도 모르게 병균에 감염되기도 한다.

[출처: 정은희 기자]

그나마 환자가 잠들면 새우잠을 잔다. 하루를 꼬박 상주하니 속눈치가 뱄다. 전자레인지에 돌려 녹인 밥에 김치, 멸치조림 몇 가지로 눈칫밥을 삼킨다. 먹는 게 시원찮으니 몸도 시들하다. 24시간을 일해도 하루 9만 원을 벌어 한 달에 100만 원, 많으면 150만 원을 가져간다. 어쩌다 쉬는 날엔 쌓인 집안일로 종일 바쁘다. 그래도 돈만 벌면 다행인데 손목, 어깨, 허리, 무릎이 다 나간다. 환자를 일으키다 손목이 나간 할머니가 많다. 하지만 특수고용 종사자라고 의료보험도 산재도 못 받는다.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다.

숙자는 간병노동자가 보건복지부와 단체교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늘 부족한 병원인력인데, 간병인이라고 안 부족할 수 없다. 간호사 일이 폭주하는 만큼 간병인도 힘들다.

“우리야 추석 때 자식 기다리면서 일도 좀 쉬고 싶지. 그래도 일거리가 있으면 해야지. ‘가족이 없으니까 저렇게 일하나 보다’ 그런 생각만 하지 않으면 좋겠어.”

누군가는 해야 하는 몫이고, 필요한 일이다. 간병일은 벌 받는 것처럼 몸도 마음도 괴로운 일이다. 간병인이 빠지면 병원이 돌아가지 않지만 병원은 그래도 인정을 안한다. 식권도, 하다못해 독감 예방 접종도 자기 돈을 내고 맞는다. 환자와 같이 생활하니 간병인에게 필요한 물품이 많은데 이런 물건을 놓을 공간도 없다. 병원에서 간병인의 존재는 그림자와도 같다.

기훈

“잘 먹었습니다. 맛있었습니다.” 환자들은 가끔 메모를 남겼다. 깨끗하지 않은 메모지에, 공들여 썼을 그 글자들을 보며 기훈은 직업적 보람을 느꼈다. 조리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호텔 식당에서 일했던 그는, 병원 환자식을 만드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환자식은 ‘일반식’뿐 아니라, ‘치료식’도 있다. 건강한 사람이 치료식을 먹어보면 “맛없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출처: 은혜진 기자]

병원 급식노동자 120여 명은 끼니마다 800인분의 음식을 만든다. 5년 전, 기훈이 정규직으로 채용돼 병원에 왔을 때만 해도, 이들 중 20~30명은 시간제 노동자였다. 당시만 해도 순번이 있는 것처럼 병원은 정규직 퇴사자가 발생하면 오래 일한 사람부터 한 명씩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정규직 전환 투쟁을 통해 지난해 11월 모두 정규직이 됐다.

노동자들은 병원의 직원이면서 환자다. 대용량 조리를 하다 보니 모두가 근골격계 질환이 있었고 돌아가면서 병가를 써야 했다. 병가자의 빈 곳은 시간 외 근무를 통해 서로 메웠다. 주말에 같이 낚시도 하고, 운동도 다니던 동료들이었다. 그러나 기훈의 병원에서 확진자가 나오기 전, 동료들은 ‘확진자 1호’가 되지 않기 위해 가급적 만남을 피해왔다.

가뜩이나 어수선한 병원인데 의사들이 진료까지 거부했고 병원은 이를 지지하고 나섰다. “지금 진료를 보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의대 학생, 전공의, 전임의의 단체행동을 함께합니다”라고 적힌 수납처의 팻말은 병원 전체의 목소리처럼 붙어있었다. 중환자 가족이 있는 기훈은 의사들이 필수 의료 인력까지 거둬버린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병원에 바로 방문해야 하지만, 평소 내원하던 세브란스병원은 다른 병원에 가라고 통보했다.

의사 집단행동에서 언론은 대표적인 국립대병원인 기훈의 병원에 초점을 맞췄다. 실제로 의사 진료 거부 이후 맨눈으로 봐도 환자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수술, 환자 수가 줄면서 자연스럽게 할 일도 줄었다. 일이 없는 부서는 강제로 휴가를 보냈다. 이 사태는 의사들이 주도했지만, 싸잡아 지탄받는 기분이 들어 스트레스가 쌓였다. 병원은 환자가 줄어들어 적자 경영이 예상된다며, 현재 진행 중인 임금 단체협상에서 임금 동결을 주장하고 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어렵다며 노조의 양보를 끌어내려 하고 있다. 일이 줄었어도 환자는 있었고, 기훈과 그의 동료들은 병원을 지켜왔다.

지하 1층 조리실에서 병동으로 올라갔던 어느 날, 와병 환자가 자기 손으로 밥을 먹었다. 이 환자는 기훈이 지은 밥과 반찬을 먹고 회복해 병원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노동자에게 밥은 임금인데, 임금 동결을 저리 쉽게 이야기하다니. 기훈은 그런 사람들 밥부터 조금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연

대학병원인 D병원은 세연을 ‘간호조무사’로 부르지 않는다. 세연과 직접 대면할 일이 많은 의사와 간호사는 세연을 ‘사원님’이라고 부른다. 저희끼리는 ‘선생님’ 하지만 간호조무사에게 ‘선생님’ 호칭을 붙이는 건 큰일이라도 날 일인 것처럼 말을 한다. 간호조무사는 동료로 묶이기 어려운 것인가 서러운 생각도 든다. 의사의 막말은 젊은 시절엔 참아주기 어려울 정도였다. 집안에선 다들 착한 아들일 텐데, 병원에서 인성 좋은 의사는 찾기 어려웠다. 세연은 한 명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세연은 다음 세대 간호조무사들을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을 애써 지우려고 한다. 세연은 D병원의 거의 마지막 정규직 간호조무사다. 세연 다음으로 병원이 뽑은 간호조무사들은 모두 비정규직이었다. 정규직 간호조무사가 나가도 그 자리는 비정규직이 채웠다. 같은 비정규직 간호조무사도 병원 직속 간호조무사와 용역업체에서 파견된 간호조무사의 처우가 달랐다. 파견된 간호조무사는 어떤 수당도 없이 최저시급에 맞춘 급여를 받았다. 그 중엔 쉬는 시간도 없이 밥도 못 먹으면서 뛰어다닐 바에야 편의점 알바를 하는 게 더 낫겠다며 3일을 못 채우고 그만두는 사람도 많았다.

일자리가 절실한 사람은 기간제 근로자가 최대 다닐 수 있는 2년을 꼬박 채웠다. 그런 사람 중엔 잠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2년을 다녀, 그렇게 꼬박 4년을 채우고 나간 사람도 있다. 비정규직 간호조무사들도 그랬지만 대학병원의 정규직 간호조무사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부러워했다. 병원의 복지는 일괄적으로 적용됐고, 연봉도 매년 올랐다. 개인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 간호조무사가 직접 주사를 놓는 것을 보고 스스로 부끄러웠던 적도 있었다. 세연보다 훨씬 적은 월급을 받으면서 일할 텐데 참 다양한 일을 해내는 것을 보고 들었던 생각이다.

위계가 강한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는 약체 중 하나였는데, 젊었을 땐 더럽고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고 싶었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일자리를 더 이상 구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만둔다는 생각은 사치가 됐다. 불만과 문제가 있어도 말로 꺼내지 않았다. 운 좋게 정규직으로 다니면서, 비정규직 간호조무사 월급의 몇 배를 벌면서, 라는 말을 들을까 입을 맴도는 말들을 삼켰다.

세연은 일이 익숙해지기보다 바쁜 게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3교대 주 40시간, 듣기엔 준수한 노동시간이지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일을 매일 8시간씩 견디는 일은 쉽지 않다. 일을 시작하면 세연의 업무용 폰엔 오더가 뜨기 시작한다. ‘xxx님 엑스레이 촬영’ ‘xxx님 수술 준비’ 같은 오더가 뜨고 일은 주로 3~4개가 겹칠 때가 많다. 간호조무사 인력도 많지 않기 때문에 일에 과부하가 걸리는 건 기본이다. 병원을 누비고 다니다 보면 어느새 퇴근 시간이다. ‘무릎아 정년까지 버텨다오!’

경자

경자는 코로나19 병동 청소노동자다. 집에서 30분 걸리는 코로나 병동에 도착하면 고글과 마스크, 두 개씩 겹친 장갑을 낀다. 마지막으로 방호복을 입는데 이 옷은 입는 순간 벗고 싶게 만드는 대단한 옷이다. T병원에서 7년째 일하고 있는 경자는 코로나19 청소에서는 최고참이다.

간호사실, 스테이션, 복도, 화물칸 순서로 청소하다 보면 3시간이 훌쩍 가 있고, 콧물이며 눈물은 물론, 온몸에 땀이 흘러내린다. 방호복 안에서 땀이 흘러 걸을 때마다 찰박찰박 소리가 날 정도다. 소독을 끝내고 병실 12개에서 나온 폐기물을 포장한다. 한 달 전만 해도 폐기물 배출 업무는 간호사 선생님들이 했는데 일손이 부족해 64명의 청소노동자 중 20명이 투입됐다. 한 층에 1~2명씩 배치돼 격일제로 근무 중이다. 퇴원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쓰레기도 늘어난다. 하루 세끼 제공되는 도시락통, 담요, 침대 커버, 옷을 넣으면 35리터 폐기물 통이 70개가 넘게 나오는 날도 있었다.

경자는 병원에서 일하기 전, 치매인 어머니를 위해 오랜 시간 수발을 들었다. 하루는 어머니 치료 때문에 의료원 대기석에 앉아 있는데, 여사님 소리를 들으며 일하는 청소노동자를 보고 부럽단 생각이 들었다. 7년 전, 다시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선택한 일은 경자의 삶에 활력을 주고 있었다.

경자는 청소를 하다가도 잠자리에 들지 못해 엎치락뒤치락하는 환자에게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한다. 환자가 심하게 아파하면 마음이 쓰여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행동이었다. 아픈 어머니를 오래 돌봐왔고, 함께 고통을 나눴기에 그에게 환자는 완전한 타인만은 아니었다. 의사들이 파업을 한다고 할 때, 필요한 일이겠거니 짐작했지만, 이해는 할 수 없었다.

[출처: 은혜진 기자]

지난해 6월에는 같이 일하던 동료가 숨졌다. 심 선생은 12일 연속 근무 중 폐렴에 걸렸고, 패혈증으로 이어져 사망했다. 심 선생은 2인 근무 원칙인 병원 의료폐기물 청소 업무를 혼자서 감당했다. 동료의 사망 원인을 두고 경자의 노조는 ‘과로사’라고 주장했고, 병원은 ‘지병’으로 몰았다. 심 선생은 남성이었기 때문에 지하 3층 하역장에서 근무했다. 경자는 심 선생이 아직 거기 서 있을 것만 같다.

경자도 당시 동료가 사망한 원인을 밝히기 위해 함께 투쟁했고, 지금은 ‘투쟁하자’고 말하면 동료들이 믿고 따라올 만한 조합원이 됐다. 하지만 벌써 내년 1월이면 정년이 된다. 계속 일하고 싶은데 나이가 너무 들었다. 앞으로 계속 일하고 싶은 마음에 일이 많아도 묵묵하게 하고 있다. 딱 스무 명만 더 있었으면 경자도, 동료들도 아프지 않고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재혁

재혁은 매일 새벽 당산역 첫차를 탄다. 이렇게 출근을 하면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꼬박 일손을 못 놓는다. 당직이 있으면 12시간 더 일한다. 한 달에 대략 8~10번 당직을 서는데 노동 시간을 따지면 주 80시간 이상이다. 수입은 한 달 390만 원 정도. 노동시간을 생각하면 최저임금이다. 어차피 돈을 쓸 곳도 없다. 주 80시간 노동을 하면 삶엔 일과 잠밖에 남지 않는다. 환자를 한 명 한 명 돌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재혁이 의사가 된 동기는 막연했다. 어느 날부터 나만을 위해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생물이나 생명에 관심이 많아 의학 공부를 선택했고, 1억에 가까운 등록금을 낸 덕에 의사가 됐다. 재혁은 이제 쓰이는 의사가 되고 싶다. 노동자의 건강권과 권리를 위해 쓰이기 위해 재혁은 최근 직업환경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재혁은 최근 부쩍 환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있어 어색하고, 부끄럽다. 재혁은 의사파업에 참가하지 않은 병원 내 유일한 전공의였다. 다른 전공의 100여 명은 모두 참가한 터라 앞으로의 관계가 껄끄러울 것이 예상됐지만 파업에 참가해서 할 후회하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다. 아직까진 다행히 누가 시비를 걸지도 않았다. 언론사 기자가 찾아와 파업에 참여 안한 이유를 물었던 적도 있다. 재혁은 생각해왔던 말을 쏟아냈다.

“말로는 국가를 위해서라고 해도 의사 수 증원에 버튼이 눌려 나온 거죠. 명분도 대안도 없었고요. 하지만 현실을 보면 의사 수가 너무 부족해요. 일 분배나 근무시간도 조정도 필요하죠. 다른 직종도 마찬가지죠. 모두 업무량이 너무 많아요. 병원이 환자 수를 조정해야 하는데 이윤 때문에 그러질 않죠. 그 속에서 그냥 기계의 부품이 된 느낌. 병원이 크면 클수록 더 해요. 한 번은 과장님한테 혼이 난 적이 있어요. 지나가다가 자기한테 말 걸었다고요. 내 아래 간호사만 30명인데, 인턴 주제에 감히 어떻게 말을 거냐고 하시더라고요. 위계 구조도 공고해요.”

재혁은 파업에 참여한 전공의들이 일면 이해도 된다. 의사가 되는 길은 힘들고, 돈도 많이 든다. 보상심리가 클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기회를 더 많이 가진 이들이 공정성을 얘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 병원의 90%가 민영이듯, 의사들도 시장논리에 빠져 있다. 교육 역시 그 방향을 옹호하고 있다. 쓰이는 의사가 되는 길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부쩍 들고 있는 재혁이다.

정흠

환자에게 얻어맞기는 했는데 정흠은 대응하기 귀찮았다. 야간에 일하다 보면 술 취한 환자에게 맞는 일이 있는데, 오늘이 그날이다. 퇴근하려고 보니, 다른 직원이 신고했는지 경찰이 진술서를 쓰라며 다가왔다. 귀찮은 일이다. 다음날 가해자는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자 어제 왔던 가해자 아들이 “아빠가 그런 거 맞잖아”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가해자는 그제야 때렸다는 걸 인정했다. 정흠은 고소할 생각도 없었지만, 아이를 봐서라도 용서하기로 했다. 정흠이 일하는 의료원은 공공병원이다 보니, 홈리스들도 많이 찾는다. 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씻기고 면도해주는 일도 종종 있었다.

정흠은 “할 말 다 하고 사는” 요주의 인물이다. 입사 전, 개인사업을 하다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생고생을 한 적이 있을 만큼 산전수전을 다 겪어 봤다. 그런 그는 주폭에도 대충 넘어가 놓고는 병원에는 유독 강성이다. 2016년 정흠은 조합원 몇 명과 함께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가 이듬해 부당해고 됐다. 병원이 기간제 노동자의 임금을 차별했기 때문이다. 병원에 반기를 들어 제대로 ‘찍’혔지만, 그는 복직 투쟁 끝에 병원으로 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2017년 5월 정흠이 속한 노조는 서울시, 병원과 정규직 전환을 두고 단체협상을 했고, 그 결과 계약직 노동자 모두가 무기계약직(공무직)으로 전환됐다.

공무직이 된 기간제 노동자들은 각종 수당, 성과급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전 임금분도 소급됐다. 그런데 호봉제는 아니다. 정흠이 일하는 응급센터 환자이송노동자 중엔 정규직도 있다. 공무직 정흠과 정규직들은 교대 근무는 물론, 일도 똑같이 한다.

골절환자가 응급센터로 오면, 방사선을 찍어야 하는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방사선사와 호흡을 맞춰 환자의 이쪽저쪽을 사진 찍으려면 ‘힘’만이 아니라, ‘요령’도 필요했다. 정흠은 보통 하루에 50여 명의 환자를 검사실로 이송하는데, 이들의 60%는 추가 검사를 받는다. 응급센터 환자의 70~80%는 혼자서 거동이 어렵기 때문에 환자의 몸을 들어야 하는 일이 많다. 나이가 드니 무리가 있었다.

정흠의 병원은 지난 1월 코로나19 전담 병원으로 지정되며, 폐쇄된 응급센터에선 선별 진료가 진행되고 있다. 정흠은 일반 환자가 없어지자, 코로나19 인력으로 투입됐다. 코로나19 검사 후 나오는 검체를 검진센터에 전달하고, 응급센터에서 필요한 물품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코로나19 전에도 정흠은 다른 직원들이 바빠서 퇴근을 못 하면, 되는대로 도와주고 나서야 병원을 나오곤 했다. 지난 8월 코로나19 2차 대유행으로 병원 환자가 폭증했다. 만일 또 코로나19 환자가 폭증해 간호사들의 업무가 많아지면 환자이송노동자들은 코로나19 병동 안 업무를 보조하기로 했다.

미래

미래가 노조 상근을 다시 시작한 건 지난 5월이다. 간호 현장에서 다시 10년 만에 진창 같은 노조로 복귀했다. 노조 일이라는 건 간호사 일 만큼이나 답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더 심할지도 모른다. 간호사는 8시간 근무하면 대충 인계라도 하고 가서 집에서는 쉬기나 하지, 노조 일은 잔잔하고도 묵직하게 항상 생활을 짓누른다. 주로 문제를 제기하는, 이른바 ‘투쟁하는 일’이 많은데 이마저도 완벽한 승리는 없다. 깔끔하지 못한 일이란, 얼마나 힘을 빼는 일인지 미래는 잘 알고 있었다.

미래는 간호사로 일하면서 깔끔하지 못한 인계를 보면 그렇게 화가 났다. 신규 간호사들은 종종 기함할 만한 일들을 주고 떠났다. 오전 10시에 끝나야 할 일들이 줄줄이 밀려있으면 감당이 안 돼서 눈물밖에 안 나왔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누르면 그때부터 분노가 치밀었다. 신규를 내 눈앞에 놓고 소리 지르고 갈구고 싶었다. 참는다고 참았지만, 분노는 새어 나와 신규 역시 그 분노를 얼마간 뒤집어썼을 테다.

노조를 떠난 이유는 노조 일이 힘들어서만은 아니다. 노조 일과 육아를 병행하다 한계를 맞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10년 전, 아이가 계속 아팠는데 아무리 병원을 데려가도 원인을 몰랐다. 아이를 돌봐주던 친정엄마도 지쳐가는 게 보였다. 그날도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주사 한 대를 맞고 울음이 터졌는데 도무지 그칠 생각을 안 했다. 아이는 엄마 때문이라며 화를 내며 울었다. 또 엄마 탓을 하나보다 하면서 달래는데 아이가 말했다. “엄마 때문에 아프잖아. 엄마가 없으니까 계속 아픈거라고!” 그때 아이가 아픈 건 애정결핍 때문이구나 알았다. 몇 주를 고민하다 노조를 도망치듯 나와 다시 간호사 일로 돌아갔다.

조합 활동은 꾸준히 했다. 매년 조합의 투쟁에 앞장섰고, 현장에서 간호사들이 겪는 부당한 문제들이 있으면 함께 따지는 역할도 했다. 2년 전부터는 대의원, 교섭위원 같은 역할도 맡았다. 미래에겐 곧잘 상담 요청도 들어왔는데 미래가 그만큼 전면에 나서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은지도 상담을 요청해온 간호사 중 한명이었다. 그날 은지의 살짝 웃는 얼굴이 묘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은지는 불면증이 심하다고 털어놨다. 잠을 잘 못 자서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 건지, 심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자꾸 실수하고 있다고 했다. 어느 날엔가는 동료들조차 자기를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봤다고 했다. “그날 자꾸 그 눈빛들이 생각나면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원래 수면제 반 알만 먹는데 그날은 네 알을 먹었어요. 잠들고 싶어서, 눈뜨고 싶지가 않아서요. 저도 제가 이상해요. 그런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안 하고 싶어요, 뭐든.”

미래의 병원은 코로나 사태로 많은 인력을 파견보냈는데 병원의 남은 간호사들이 크게 지치고 있었다. 이런 때일수록 노조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코로나 상황은 투쟁의 방식 또한 새롭게 바꾸라는 숙제를 던져주고 있어 고민이 많다. 미래는 은지를 생각하며 다시 무거운 마음으로 교섭 준비를 시작했다. 올해는 5명 증원에 그쳐선 안 될 것이다. 3000명에 가까운 간호사가 일하는 병원에서 밑 빠진 독에 물붓기를 멈춰야 한다.